7화

강율이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긴 파이프 담배를 피고 있는 펜 영감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강율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은 펜 영감은 아까 그에게 팔려다가 불발이 된 파란 알약이 담긴 통을 건넸다.
“내가 말해주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낫겠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한 사과다. 아 그 알약은 내가 직접 만들었으니 걱정하지말고 다른 이들도 종종 먹여보기도 했다.”
“믿어도 되는 거 맞습니까?”
펜 영감은 물음에 욱한 듯 했지만 이미 저지른 전과가 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의심되면 먹지를 말던가.”
다행히도 파란 알약을 먹은 후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상태창만을 보여줄뿐.
[이름: 이강율(스테이지 2 진행중)
종족: 인간.
특성: 육감, 의지(잠김)
특이사항:펜 영감에게 대출한 깃털이 15개 남아있고, 몸 깊숙한 곳에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
힘: 10
체력: 10
민첩: 10
행운 :7
감각 :12
보유 아이템 목록: 추적의 은반지, 어느 노기사의 낡은 검집,
보유 스테이지 포인트: 0]
‘저번에 보던 것보다 더욱 자세하네. 그나마 바뀐 것을 꼽아보자면 특이사항의 기재, 정도인데···’
“검집과 추적기를 제외한 나머지 물건들이 아직 제게 들어오지 않았는데···”
강율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펜 영감은 자신의 등껍질을 닮은 봉투를 흔들었다.
“아 당신이 가지고 있었으니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의 의지가 깃들었다는 여성의 목소리인데.”
펜 영감은 말 없이 담배만을 뻑뻑피다가 강율이 어떤 여성의 목소리를 입에 담자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가···”
“중요한 순간인 것 같아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의지가 깃들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고, 그리고 당신을 부를 수 있는 그 패부터 준 후에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 그게 이치에 맞지. 자 일단 이거부터 받게.”
펜 영감은 여지껏 보여주었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진중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이 패의 사용법은 간단하네. 안전한 곳에서 이 패를 정면에다 비추게. 그러면 내가 나타날 걸세. 너무 자주 부르지는 말게. 스테이지 당 한 번 정도가 적당하겠어.”
그는 녹빛 패와 함께 봉투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의지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몇 가지 없네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알고 있지. 그 의지가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 자네가 바라는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네.”
‘....’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내가 자네를 깨우려고 먹인 포션이 얼만지 알면 그런 표정을 하지 못할텐데.”
협박 아닌 협박에 강율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펜 영감을 지긋이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포션이야. 무슨 일이 있으면 해주셔야 했을 조치인 것으로 압니다.”
“깨어나고 나서 자네의 느낌이 좀 바뀌었군. 망설임이 사라졌다고 해야하나.”
강율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지만, 펜 영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것에 대해 말씀하기 싫으시다면야. 다음 주제로 넘어가볼까요? 펜.”
“너와 나 사이에 할 다음 주제가 무엇이지?”
제가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아까부터 전전긍긍하시는 것으로 보아 여성과 연관이 있으신 모양이고 둘 사이에 제가 어쩌다 낀 상태가 되어버렸네요.“
“그거야 뭐 조금만 추론한다면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모습이 되어가는 동안에 중간 중간 목소리가 들려올걸세. 들을지 말지는 자네의 판단에 달렸고.”
“제게 전할 말은 이 정도가 전부입니까? 무언가 더 숨기는 게 있는 느낌인데?”
“다른 할 말도 있지만 아직 자네가 들을 준비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은 이 정도까지 하는걸로 하지. 그러니 자네 죽지말게. 내게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퉁명스러운 말투 너머로 느껴지는 펜 영감의 걱정.
“죽어도 대출은 다 갚고 죽을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클클 녀석이 입만 살았군. 지켜보겠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강율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펜 영감은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어쩌자는거냐? 안젤리아. 연약하디 연약한 아이에게 네 운명을 건다는 거냐?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봤던 것이냐,”
옷 안에 숨겨놨던 펜던트에 걸려있던 사진을 쓰다듬으며 사진에 물음을 건넸다.
그 사진에는 빨간 머릿칼과 대비되는 푸른 눈을 가진 미녀가 젊은 시절의 펜 영감과 다정하게 껴안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웃음이 맴돌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슬픔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펜 영감의 물음에 대답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는 한동안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강울은 문을 나오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01:30:22]
멈추어 있던 시간이 흐르는 것을 확인한 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그러면 바로 다른 깃털들을 찾아볼까.”
강율은 추적의 은반지를 꼈다.
반지를 끼자마자 눈 앞에 떠오르는 글자들.
[은반지를 통해 추적하고 싶은 물건을 말하십시오.]
“스테이지 클리어를 위한 깃털들의 위치를 찾아줬으면 좋겠는데.”
[착용자의 음성을 확인. 현재 가지고 있는 깃털은 0입니다. 현재 착용자에게서 가장 가까운 깃털들은 빨간색 깃털과 파란색 깃털을 가진 이입니다. 그쪽으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무미건조한 반지의 음성과는 반대로 그 반지가 가르키는 경로는 너무나도 친절했다.
‘마치 네비게이션 같군.’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무미건조한 음성이 그의 정신을 깨웠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 잡힌 세 명의 그림자.
강율은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그들의 상황을 알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제가 언제 죽인다고 했습니까. 그저 당신이 가진 깃털을 빌려주시면 갚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둘의 깃털을 공동재산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겁니다. 제 힘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제 힘과 당신들의 기동력이라면 세 명 분의 깃털을 충분히 모을 수 있습니다.”
두 명을 압박하는 한 명의 근육질 남성.
그의 머리는 개의 모습을 띄고 있었고, 협박을 당하는 두 명의 모습은 작디작은 제비였다.
제비들의 곁에 다른 한 제비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세 마리의 제비가 한 무리였으나, 개에게 습격을 당해 쓰러진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저쪽도 저 셋을 완벽하게 압도하지 못한 모양이군. 시간을 끌리면 끌릴수록 생존에 불리해지니까. 일단은 나서도 큰 문제는 없겠어. 더군다나 방심하고 있으니 한 번에 죽아는 것을 목표로 해볼까.”
펜 영감이 뭔가 바뀌었다는 말을 할 때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봤을 땐 믿어야 했다.
‘원래의 나라면 몇 번은 더 고민했을테고 약한 이들을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율은 그렇게 대치하고 있는 이들의 앞에 나타났다.
서걱.
개의 머리를 상당히 쉽게 베어버리면서 말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하기도 잠시 둘 중에 조금 더 큰 제비가 강율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감사를 받은 강율은 도리어 의문을 표했다.
“나는 그저 깃털을 얻기 위해 근처에 있는 이들 중 하나를 사냥했을 뿐이다.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어.”
단호한 말에 기뻐하던 제비 한 마리의 표정은 이상해졌다.
“저희가 만약 가진 깃털을 드린다면 살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말을 잃어버린 제비를 대신하여 다른 제비가 입을 열었다.
“그건 모르겠군. 당신들이 가진 깃털의 개수가 내 마음에 든다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담담하게 사실을 말하는 강율.
죽음의 공포를 눈 앞에서 겪었고, 방금 전 개의 머리가 잘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일까.
제비들은 가지고 있던 깃털을 바치며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깃털은 파란 깃털 4개와 빨간 깃털 5개입니다. 지금 죽은 자의 것까지 포함한 겁니다.”
“어.. 그 정도라면 너희들을 살려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강율이 생각했던 것 보다 꽤나 많은 깃털들을 가지고 있던 자매였다.
[남은 시간 01:10:22]
깃털을 건네받은 강율은 시간을 확인하며 이들이 떠나기를 기다리며 은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비 자매는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꺼낼 시점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뭐지?”
“저희를 데리고 다녀주시면 안 될까요? 염치 없는 부탁인 줄은 알고 있지만요.”
“? 당신들 제 정신인가? 방금 눈 앞에서 적의 머리를 베어버린 인간에게 같이 다녀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당신 인간이었어요? 인간이 이렇게 강할 수가 있구나..”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어..”
작은 제비는 순수하게 그의 강함에 놀랐다면 커다란 제비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이 섞인 얼굴이었다.
“저희의 종족은 비연(飛燕)입니다. 능력은 잔상 생성과 꼬리짜르기인데.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거기서 희망을 얻은 큰 제비는 알아서 자신의 능력들을 술술 불었다.
“그다지 끌리지 않군. 내 입장에서는 짐덩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제비 자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고작해야 저런 녀석에게 허덕인다면 더더욱. 정보를 말해준 것은 고맙긴 하네. 더 할 말이 없다면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날게.”
강율은 그 말을 끝으로 은반지에게 다음 행선지를 물은 뒤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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