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저도 들어갈 수 있나요? 상점 판매자 분께서 허락을..”
연은 강율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신나게 말을 이어갔지만 이내 그의 손에 쥐어진 수정구에 시선이 팔렸다.
“미안하군. 특별 상점은 선택한 개인만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요. 그러면 손에 쥐어져 있는 수정구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비법인가요?”
-꽤나 신기하게 생긴 생물이로군. 내가 살던 곳에는 저런 생명체가 없었는데.-
연의 참새 같은 조잘거리는 말소리에 품에서 튀어나온 부적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상황을 타개할 물건은 이 부적이고, 부적을 이용하는 댓가로 수정구를 채워오라더군.”
사실을 알게 된 연은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말하는 부적이 신기하긴 한데.. 그게 저희를 살려줄 수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다른 걸로 바꿔 오시는 게.”
-쯧쯧. 생긴 것대로 물건을 보는 눈이 없구만-
펜 영감의 상점에서는 가만히 누워 있었던 남자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다리를 꼬고 앉아 곰방대를 뻑뻑 피워대는 중이었다.
“뭐요? 내가 생긴 게 뭐가 어때서.”
그림 안의 남자와 연이 투닥거리는 모습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뿐.
“둘 다 그만하시고, 당신. 부적이라고 불러야합니까.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들어가고나서야 투닥거림을 멈춘 둘.
-내 이름 말이냐. 보자.. 진명은 네게 알려줄 수가 없을 것이고, 예전에 썼던 이름 중에 적당한 것이..-
담배 연기가 마치 말풍선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여러 가지의 글자들이 적혔다 사라졌다를 반복 중이었다.
“정말 믿을만 한 것 맞나요? 이름 하나도 제대로 알려줄 수 없는데.”
“믿어봐야지. 영감이 자신만만하게 내게 준 것인데.”
“그래. 이 이름이면 적당할 듯 싶구나. 람. 람이라고 불러라. 네 놈이 싹수가 있는 것 같아보이면 다른 이름도 가르쳐주마.”
[강율님!! 강율님!!]
갑작스레 들려온 참모 고스트의 다급한 목소리.
“무슨 일입니까? 고스트?”
[휴. 드디어 연락이 닿는군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저희가 마지막으로 추적한 곳이 블루 진영의 성채 앞이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지셔셔..]
“그게 무슨. 제 위치가 잡히지 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강율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이 강율의 머리 위를 뱅뱅 돌면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강율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순간 이동하면서 좌표 교란을 위해 잠깐 수작을 부렸어요. 아마 그래서 연락이 되지도 않고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거에요.”
“호오. 생긴 것과는 달리 유용한 능력을 가지고 있군.”
“같이 있던 블루 진영의 인원과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뭔가를 했다고 하는군요.”
[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다친 곳도 없고 연락을 늦었지만 받아주셨으니까. 아 참 블루 진영에서 탈출할 때 그들과 충돌했다면 그들의 무력 수위는 어땠습니까.]
“블루 진영을 지키던 문지기에게 죽을 뻔 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 대적하긴 한 경우지만.”
[예? 강율씨 혼자요? 제가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지 않나요?]
“충분히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를 죽이기 전까지도 갔습니다만.”
[후우. 이번 만입니다. 다음 번에 그런 일이 있다면 당신을 도깨비씨와 자리를 바꿀 겁니다.]
“도깨비가 당신의 곁을 지키는 모양이군요. 블루 진영의 왕은 소환수들에게 버프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곧 저를 쫒아올 듯 합니다. 그들의 별동대가 되었든 아니면 선봉이 되었든간에.”
[... 대체 얼마나 휘저으신 겁니까?]
“뒷 일은 참모께서 책임져주신다고 하셨으니 선을 잘 타보려 하다가 그만...”
-이제 그만하면 정보 전달은 된 것 같으니 나에게 집중하거라.-
람은 어느새 담배를 다 피운 듯 곰방대로 툭툭 땅을 치며 시선을 집중시켰지만 강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참모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당신이 있는 곳은 저희가 가기엔 너무 멀고 가는 길에 블랙 진영의 성채가 있기에 갈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저희의 성채는 이 곳에 있습니다. 최대한 가까이 와주십시오. 적들을 피해서.]
참모가 이 곳이라고 하자마자 머릿 속으로 흘려들어오는 성채의 좌표.
“최대한 가까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들면 공병대를 보내 당신을 맞이하겠습니다.]
딱콩.
강율의 눈 앞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건 뭐에요?”
-눈은 좋구나. 이 인간도 보지 못한 걸 한 눈에 보았으니.-
강율을 때린 것의 정체는 부적 속의 남자. 람이었는데.
람은 지금 부적 속이 아닌 부적 바깥으로 나와 강율을 타격한 것이었다.
부적은 그를 지키는 망토가 되어 있었고, 곰방대는 검으로 변해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올 수도 있는 거였습니까?”
“길어봤자 15분. 원래 내 몸에 있는 마나를 태워서 있을 수 있는 시간. 부적으로 돌아가야 할 마나까지 계산한다면 7분 내외.”
7분.
한 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쪼개어 쓴다면 잘 쓸 수 있을 듯한 시간.
람의 모습은 강율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비장의 한 수가 있다면 왜 벌써부터 꺼낸 것입니까?”
“이게 비장의 한 수처럼 보이는구나. 애송아. 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네 녀석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보기 위해서다. 이제는 우리를 방해할 것 따위는 없는 것 같으니.”
람은 강율의 검은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음.. 역시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나? 그래서 몸 하나는 기깔나게 잘 뽑혔군.”
그의 눈을 잠시 응시하더니 마치 작품을 품평하는 평론가처럼 중얼거렸다.
“실전 경험은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난 뒤부터 시작. 그럼에도 눈에 띄는 성장세를 가지게 된 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직감. 때문인가?”
부적 속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느낌.
그가 곰방대를 들자 머리를 깨부술 정도로 울리는 직감.
강율은 그것의 인도가 이끄는대로 검을 뽑아 막아내었다.
“ 호오. 성능 하나는 죽여주는군. 마치 짐승같아. 내가 내리는 판단보다 더 빠를 것 같군.”
흡족해 하던 람은 이번에는 그가 꺼낸 검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명검이로구나. 내가 탐이 날만큼.”
람의 말을 들은 것인지 그의 곰방대가 부르르 떨었다.
“애송아. 그 검 또한 에고 소드인 것 같은데. 한 가지 가르침을 주마. 에고 소드들은 대부분 지들이 잘난 줄 안다. 내 검인 비검도 그렇고 말이야.”
[허. 저런 것 따위와 날 비교할 줄이야.]
람의 말에 긁힌 것인지 여지껏 대답 한 번 없던 그의 검도 부르르 떨며 강율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놈도 찔린 모양이구만. 큭큭.”
“농담 따먹기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 적들이 저희가 있는 쪽으로 당도할지 모르는 와중이니까요.”
초조함을 드러내는 강율에게 람은 가벼운 곰방대질로 그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안다. 다 봤다. 네 놈의 눈과 기억을 통해서. 뼈다귀 검사놈. 그것이 강하긴 했지만 지금의 너로서도 이길 수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 실제로 이길 뻔 했습니다. 마지막에 왕이 버프를 걸지만 않았더라도 급소를 베었겠죠. 하지만 결과는 저의 패배 였습니다.”
짜증과 자책이 섞인 강율의 발언에 람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훌륭한 검사는 방심과 자만을 하지 않으며 언제나 여유로운 척을 해야만 한다.”
그는 터벅터벅 길가를 걸으며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는 듯 했다.
“긴장에 쫓기면 완벽한 검로를 그려낼 수 없어. 너는 남들보다 긴장할 필요가 더더욱 없지. 직감. 그 사기적인 능력 덕에.”
람은 평소에 강율이 집에서 휘두르던 검로와 실전에서 사용하던 검로. 그리고 마지막 스켈레톤과의 싸움에서 보여주었던 검로를 각각 재현했다.
“어때?”
단순한 물음이었지만 강율은 대답할 수 있었다.
“여유를 갖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었습니까?”
“단순히 여유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 여유로운 검로를 휘두르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하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거든.”
“그게 뭡니까.”
“경험 혹은 내가 뻗은 검로가 최선이라는 믿음.”
“시간이 해결해주어야 하는 문제인 것이군요.”
“그것 참 배부른 소리인 것처럼 들리는구나. 검사로서 완벽한 몸에 분에 넘치는 명검에 누구나 탐내는 직감이라는 재능. 내게 필요한 건 시간 밖에 없다.”
“.... 누군가가 들었을 때에는 배부른 소리인 것처럼 들릴 수 있겠죠.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강율은 자신에게 따끔한 훈계를 가한 람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하지만 저는 생존이 더 중요합니다. 당신 같은 검사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왠만한 위협 따위는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는 강함. 그게 제 목표입니다.”
꾸짖음이 자신을 뒤엎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을 내뱉은 강율이었지만 돌아오는 건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안다. 나도 너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거든. 너는 더했겠지. 남들과는 달랐으니. 그럼에도 목표의 구체화는 중요하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고 선을 넘지 않을 수 있다.”
“....”
“지금은 일단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마. 내가 보여주는 이 한 번의 검격을 언젠가는 재현, 아니 뛰어넘을 거라는 생각을 가져라. 그만큼 아름답고 뛰어난 일격일테니.”
강율을 재현할때나 연에게 시비를 걸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람은 검을 비스듬히 쥐었다.
[잘 봐두어라. 현재 너에게 있어 가장 좋은 교보재가 될 것 같으니.]
이번에도 검은 자신의 할 말만을 하고 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열기는 강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쐐액.
검이 휘둘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검격이 낳은 여파는 강율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콰콰강!!
저 멀리 희뿌옇게 보이던 산의 봉우리가 갈라졌다.
“이게 가능한 거라고요?”
강율은 그가 보여준 것들을 머릿 속으로 되짚어 보고 있을 때. 연은 그가 떨 호들갑까지 더해 떨어주고 있었다.
“가능하겠냐?”
람은 애써 여유로운 척을 하고 있었지만 검을 쥔 손의 떨림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듯 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가르침 비슷한 걸 해보니까 조금 힘을 더주는 바람에 그런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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