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한 번의 검격으로 모든 기력을 다 소모한 듯람은 두루마기를 다시 부적으로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강율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은 머릿 속으로 완벽한 검로를 그리고 있어라.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가 툭하고 건들면 나올 정도로 선명하게 만들어라. 또한 마나의 활용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갔어요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네요.”
그 조언을 같이 듣고 있던 연은 그를 향해 보냈던 선망의 눈초리를 거두고 툴툴거렸다.
그 순간.
[퍼플 진영의 선봉대장 쿠르탱이 블랙 진영의 선봉대장 모루셀을 죽였습니다.]
강율과 연에게 떠오른 공지.
“저 쪽에서도 날뛰기를 시작했네. 가까운 곳은 아니지만 저 쪽으로 이동을 해보자고 아직 그 때 보여줬던 공간 이동 마법은 할 수가 없는거지?”
강율은 부적을 품에 챙기며 연에게 물었다.
연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강율이 예상했던대로였다.
“짧은 거리는 이동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강율씨가 목표로 하고 있는 곳은 아직까지는 무리에요.”
“아직은 이라는 말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원하는 장소로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
“완전히 정확한 위치로는 이동이 불가능하겠지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능할 거에요.”
머뭇거리면서도 끝내는 당당하게 말하는 연,
“그러면 됐어. 일단 너는 나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기운을 보충해. 싸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아까도 그러고 있었어요. 무임승차라고 생각하실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이유가 그거였고요.”
-최고의 연습은 실전이지. 언제나 실전만큼 나를 흥분시키는 건 없고.-
품 안에 잘 집어넣었던 부적은 어느새 강율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었고 부적의 안에는 수정구까지 같이 들어가 있었다.
“품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거라. 네가 싸우는 모습을 내가 지켜봐야 뭘 더 가르쳐 주고 보완해야 할지 알 것 아니냐. 거북이가 맡긴 임무를 잘 하는지도 감시해야 하고.-
“... 알겠습니다.”
강율은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
“정황상 이번에도 이강율은 펜 영감의 상점에 다녀왔고, 거래를 통해 수정구와 부적을 얻어냈다.”
강율의 개인 관리자가 된 미카엘라.
그녀는 실시간으로 강율의 여정을 지켜보지 않고 한 지점에 멈추어 있었다.
그가 펜 영감의 상점에 다녀온 순간.
강율을 포커싱한 게 아니라, 그의 손에 쥐어진 수정구와 어느새 생겨난 부적에 집중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수배 전단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신입 교육 때였나?”
미카엘라는 중얼중얼거리면서 강율의 곁에 있던 부적 속 사내의 특징을 추출하여 검색 하기 시작했다.
<부적. 도사. 곰방대. 푸른 눈. 수정구>
검색 결과가 210건 나왔습니다. 더욱 정확한 검색을 원하신다면 더 많은 키워드를 넣어보시길.
무수히 많은 정보들 중 가장 위에 걸려 있는 정보를 읽기 시작한 미카엘라.
[이제는 소멸한 도사들의 상징. 곰방대와 수정구. 동방의 도사들은 꽤나 리치와 닮은 구석이 많다. 그들의 마나와 생명력을 라이프 배슬 같은 곳에 담는 것부터···]
그 정보를 읽던 도중 그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간 단편적인 기억.
“소멸한 도사? 이 정보와 내 기억이 맞다면.”
미카엘라는 이번에는 다른 키워드를 집어 넣어 검색을 시도해보았다.
<도사. 소멸. 대전쟁. 라이프 베슬. 최후의 생존자>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검색 결과가 아닌 경고창이었다.
<지금 검색하신 키워드는 천사 등급에 따라 배제된 키워드이며 더 이상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미카엘라는 그 경고창을 보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상관에게 달려가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까.. 검색 결과 전체 삭제는 눌러 놓고.. 뭐 10분 자리를 비운다고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진 않겠지. 뭐 여차하면 도와줄 물건도 주변에는 많고.”
잠시 강율에게 시선을 거두는 것을 걱정한 미카엘라였지만, 잠시 동안 생각을 해본 결과. 자신의 실적이 우선이었다.
기저에는 강율에 대한 믿음도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
“여기다. 찾았다. 검을 든 인간과 그 인간의 옆에 연!!”
강율과 연의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어야 했다.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한 무리가 둘의 행색을 보더니 주변에 인원들을 다 끌어모았기 때문에.
“블랙 진영인데. 어째서 저희를 붙잡으려는걸까요?”
“아마도 블루 진영에서 나에 대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크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방법은 하나지. 일직선으로 최대한 빨리 뚫고 들어가서 우리 쪽 선봉대와 합류한다.”
-판단은 나쁘지 않다만 네 놈의 능력이 저들을 뚫을 수 있겠느냐?-
“이런 거 보시려고 바깥에 나와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연. 내 곁에서 떨어져 있지마. 틈이 보이면 바로 치고 들어갈테니까.”
“저야 여차하면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갈 수 있어요. 아니면 신경이 쓰이시지 않게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해주면 좋지.”
“알겠습니다.”
-내가 바람을 일으켜 주마.-
강율이 혼자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람은 작은 바람을 만들어 주었고, 그 바람은 람과 연의 생각대로 그녀를 저 높은 하늘까지 날려보내주었다.
“연 같이 생긴 녀석은 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왕이나 참모에게 연락해서 대공에 특화된 이들을 불러와!!”
오십 여명을 두루 지휘하는 누군가.
그 누군가의 말에 따라 하나가 무리를 이탈하여 왕에게 가려는 그 순간.
“어딜 가? 너희는 나랑 놀아야지.”
그의 등을 꿰뚫는 강율의 검.
검에 꿰뚫린 이는 모래성이 무너지듯 스르륵 스러졌다.
“젠장.. 어쩔 수 없군. 지금 저 녀석은 무기를 던졌다. 지금 몰아붙이고 나머지 이들은 무기를 회수하지 못하도록 시신을 둘러쌓아라.”
블랙 진영의 지휘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강율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손을 들었다.
콰드득.
그러자 갑자기 얼음이 그들의 발목을 묶었지만,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후우웅.
시신이 갑자기 떠올랐고 스스로 검이 뽑혀 강율의 손으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신기하고도 두려운 광경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마나의 활용은 상상력에서 나온다는 말 한 마디에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이야. 보는 맛이 있구만. 네 놈.-
람은 속으로는 놀랐지만, 강율은 죽을 맛이었다.
상상력을 활용하라는 말에 자신이 글에서 자주 썼던 상황을 구현해보았다.
저들이 보기엔 무섭고도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소모된 마나가 너무나도 컸다.
‘기선 제압에는 성공했다.’
그들은 발을 묶은 얼음이 사라졌음에도 섣불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일직선으로 뚫는다.’
남은 마나의 상당량을 검과 발에 분배한 강율은 그들의 수를 하나 둘 줄여나갔다.
“최선의 검로. 최선의 검로를 여유롭게.”
람이 말해준 조언을 입 밖으로 계속 내뱉으며 적들을 하나 하나 줄여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강율의 한 합으로 적을 죽이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채앵.
그것을 저지한 이는 거대한 탱탱볼처럼 보이는 새빨간 덩어리였다.
덩어리는 강율의 검을 막은 다음 거리를 벌렸다.
강율은 묵직하게 다가온 충격음에 손으로 검을 털어냈다.
그 모습이 즐거운 듯 덩어리는 회전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너 같은 궤적으로만 검을 휘두르더라?”
-이 쪽 세상은 내가 듣도보도 못한 생명체가 많이 나오는구나. 그나마 비슷한 건 거대한 멧돼지정도.-
“별동대가 도착했다. 저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 어차피 우리의 실력으론 무찌르기 힘들다. 달아나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그 쪽만 막는다.”
무리의 대표는 또 다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고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많은 이들이 물러난 것으로 보아 네 파괴력이 꽤나 강력한 모양이야?”
“인간으로 살 때 보다는 너무나 만족하는 중이지. 누구나 이 몸을 보면 눈을 내리깔거나 잘 보이려고 노력하거든.”
팽팽하게 제자리를 돌던 붉은 덩어리는 치타가 먹잇감을 발견하고 쫓듯 폭발적인 속도로 강율을 향해 다가왔고 이내 둘은 맞부딪혔다.
콰콰콰콱!!
강율은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덩어리의 회전을 막아내고 있었다.
뿌득.
온 몸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무게감.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이 덩어리를 이길 수 있지?’
그 순간 들려오는 람의 목소리.
-여유. 여유를 가지라고 내가 말했지. 그 말은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말고. 널 믿어.-
그의 조언은 빛을 바라지 못했다.
그를 오히려 고민 지옥에 빠트릴 뿐.
그래서일까 그는 정면 돌파를 포기하고 거리를 벌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 하. 저 멍청한..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마저 믿지 못할 줄이야.-
어깨 위에 올라탄 람은 처음으로 그를 보며 탄식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검 또한 그에게 실망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이해는 한다만..”
강율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짜증과 눈 앞의 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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