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여인 (8)

모닥불은 더 빨리 익어갔다.
장작은 숯이 되었고, 숯은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종리검과 주화화도 함께 익어갔다.
그 밤도 그렇게 익어갔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말없이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주화화가 말했었다.
불멍 때리자고.
그때, 주화화가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종리검을 바라봤다.
지금보니, 진짜 귀엽다.
익어가는 불빛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었지?”
“응.”
“심드렁한 그 표정은 뭐야?”
“어? 내가 그랬어?”
파란 숯불 위에 주화화가 장작 두 개를 더 얹었다.
아예 긴 밤 보내자는 뜻이다.
화르륵 거리는 모닥불을 보며 주화화가 말했다.
“나는 할아버지 셋이 키웠어. 아주 궁벽한 산골에서.”
"할아버지 셋. 할머니도 아니고."
이렇게 시작된 주화화의 말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주화화는 황제의 후궁 몸에서 태어났다.
이건 주화화가 태어나기 바로 전의 일이다.
황제는 후궁의 부친 되는 사람, 즉 주화화의 외할아버지를 소환했다.
비밀의 방에서 황제가 외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후궁을 데리고 궁을 나가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출산해야 하네.>
외할아버지는 황제 말뜻을 즉각 알아들었다.
황제는 이어 말했다.
<왕자를 출산했는지 공주를 출산했는지 반드시 알려주게.>
외할아버지는 황명을 받들었다.
"명을 받듭니다."
황제가 외할아버지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이유가 있다.
갓 태어난 왕자와 공주가 자객에게 암습을 당하는 일은 궁중사(宮中史)에서 왕왕 있는 일이다.
태어나자마자 화를 모면하더라도 자라면서 화를 당하기도 한다.
특히, 똑똑하면 더 먼저 암살당한다.
먼저 태어난 왕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겐 적대적 관계가 되고, 눈엣가시가 되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즉시 후궁 즉, 주화화의 모친을 데리고 자취를 감췄다.
외할아버지는 지명도 알 수 없는 산골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후궁은 주화화를 낳았다.
외할아버지는 즉시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공주를 낳았습니다.>
황궁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왕자면 즉각 회답이 왔을 것이다.
황제에게 공주가 태어난 사실은 있으나마나한 일이었다.
황제는 겨우 황금 한 보따리만 보냈을 뿐이다.
주화화의 모친은 주화화가 젖을 떼기도 전, 풍토병으로 죽었다.
궁중 생활을 하던 모친은 낯선 산골생활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친구 두 분을 모셔왔다.
친구들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주화화를 키웠다.
그래서 주화화가 ‘나는 할아버지 셋이 키웠어.’ 라고 말한 것이다.
외할아버지 친구 두 분은 예사사람들이 아니었다.
한 분은 젊은 시절 금군교두(禁軍敎頭)를 지낸 노인이다.
주화화는 검노(劍老)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또 한 분은 천류태행(天流太行)이라는 별호를 지닌 노인이다.
당시,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을 지닌 노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환우신의(寰宇神醫)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유명한 천하명의였었다.
외할아버지는 과거, 황제의 주치의도 지내셨다.
세 사람은 오래전부터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서로가 서로를 황궁에 천거하여 수십 년 동안 황실 생활을 함께한 사람들이다.
주화화는 걸음마 시절부터 세 노인의 모든 절기를 이어받으며 자랐다.
외할아버는 늘 이렇게 말했다.
"화아야. 우리는 늙은이들이다. 언제 하늘이 데리고 갈 지 짐작할 수 없다."
그래서 일까?
주화화는 매일매일 빡 쎈 무공수련을 해야했다.
천수(天壽)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다.
주화화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검노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일곱이 되던 해에는 천류태행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검노 할아버지를 뒤따랐다.
열여덟이 되는 해에는 외할아버지께서 노환을 앓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는 제자들이었던 참장(參將)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참장은 정사품에 해당하는 무관(武官)이다.
하나같이 황궁십팔반 무예에 뛰어난 고수들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두 참장은 할아버지, 검노, 천류태행의 제자들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두 참장의 손을 번갈아가며 잡았다.
“자네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겠네. 화화(花花)를 아미파(娥媚派)까지 호송해주게.”
“명을 받습니다.”
“아미파 장문 신력신니(神歷神尼)는 화화의 이모(姨母)되는 사람일세. 화화가 아미의 도움을 받는다면 내가 저승에 들어도 걱정할 일이 없겠네.”
두 참장도 다 죽어가는 외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일은 염려 마십시오. 저희가 아미파까지 목숨을 걸고 화화공주를 보좌하겠습니다.”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삼일 후, 외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다음 날이다.
두 참장과 주화화는 천하 이목을 피해 사천에서도 오지인 차마고도를 통해 아미파로 가는 길을 잡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도화궁의 일급 무사이자 지금은 천하제일루 총관으로 파견된 도혼에게 뒤를 밟혔다.
그날, 두 참장은 죽음을 당했다.
주화화는 무수한 검상을 입었고 어깨에 도혼의 검을 관통당한 채 차마고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주화화는 실신한 상태로 연못에 떨어져 종리검이 구해주었다.
환우가 장작 두 개를 더 얹었다.
모닥불은 자신을 태워가며 화르륵 위력을 뽐냈다.
소 한 마리를 올려놓아도 모조리 익혀낼 기세다.
호리병 술은 두 병을 남기고 바닥을 보였다.
주화화의 주량도 어지간했다.
“이 여인네가 완전 술독일세.”
“오빠도 만만치 않아.”
“알지.”
주화화가 자기변명을 했다.
“어릴 때부터 세 할아버지와 살았다고 했지? 세 분 모두 술독이셨어."
술독은 술항아리를 낳고 술항아리는 술병을 낳고...
어쨌든 그랬다는 것이다.
주화화의 자기변명이 이어졌다.
"그러니 내가 뭘 배우고 살았겠어.”
진짜 일리 있는 말이다.
종리검도 똑같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노천행승 형과 늙은 조카 종리후 역시 배에 술독 하나씩 꿰차고 사는 사람들이다.
종리검은 ‘술독으로 가는 지름길’을 두 사람에게 배웠다.
주화화가 싱긋 웃었다.
모닥불에 발그레하게 익어가는 그녀의 두 뺨이 너무 사랑스럽다.
“날 밝으면 이번엔 술만 사와. 쪼잔하게 몇 병만 들고 오지 말고 왕창 사 와.”
그게 정답일 것 같다.
“알았어. 술맛 좋은 집에 가서 커다란 술독 하나 쑥 뽑아올게.”
잔별들이 기울기 시작했다.
잔별은 아침이슬에 스러진다.
아침이슬은 햇살에 스러지고.
지금은 잔별이 스러지는 시각이다.
두 사람은 씩씩하게 밤새도록 퍼마셨다.
“오빠. 나 졸려.”
“그럼 자야지.”
“이 오빠 바보 아냐? 내가 왜 그말 했는지 몰라?”
“몰라.”
“은근슬쩍 다가와서 팔베개를 해주겠다느니, 추울 테니까 꼭 안아주겠다느니 그런 소릴 하면 죽여 버린다.”
*
천 장(丈) 높이의 산(山).
웅장한 태양이 치솟고 있다.
이 산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더 웅장하다.
자금성보다 더 거대한 헌원세가 동장철벽의 성곽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헌원세가는 허락을 받지 않은 자는 절대로 출입할 수 없는 죽음의 금역이다.
외부인이 출입하면 즉시 열두 곳에 천라지망이 펼쳐지고 여덟 곳 결계가 발동된다.
그리고 즉시 사지가 절단되어 혼백마저 사라진다.
형형한 눈빛을 지닌 청색 경장의 사나이.
타오르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은 사년 전보다 더 형형하다.
꽉 다문 입술은 굳은 결기가 담겨 있다.
다부진 몸매는 혹독한 무공수련으로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전체적으로 사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나이는 산 정상에서 한 동안 헌원세가를 바라보았다.
헌원세가!
일천 년을 이어져 온 자신의 본가(本家)다.
사나이는 헌원세가의 소가주(小家主) 헌원패였다.
어디선가 천리회유성이 들려왔다.
“소가주께서는 아침 명상이 끝나면 언제나 본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헌원세가의 군사 천하제일뇌의 음성이다.
헌원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극강의 천년 가문이 자랑스럽기 때문이오.”
“껄껄걸. 오늘은 세류원(洗柳苑)에 가십니까?”
산 아래에서 들려오는 천리회유성이지만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또렷하게 들렸다.
그것은 천리회유성을 보내는 자의 내공수위가 고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소. 세류원은 세상 공부에 아주 적합한 곳이오.”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군사께선 어찌 말 끝을 흐리시오?”
“소가주께서는 최근 중원 소문을 알고 계십니까?”
“전대(前代) 대마녀(大魔女)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말하는 것이오?”
“알고 계셨군요.”
헌원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군사가 천하를 희롱하기 위해 장난을 친 것이오?”
“껄껄껄걸. 소가주께서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참으로 영악한 늙은이다.’
헌원패는 또 생각에 잠겨야 했다.
천하제일뇌는 시원시원하게 알려주는 일이란 없다.
바늘 끝 만 한 일이라도 헌원패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게 하여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게 만든다.
전대 대마녀 출현이란 얼마 전 갑자기 나타나 천하를 유린하고 사라진 여인들을 말한다.
요지선자(妖芝仙子)가 음공을 시전하여 방파 하나를 궤멸시킨 사건.
추혼마령이 출현하여 색혼무와 음공으로천하를 교란시킨 사건.
적적마녀(赤笛魔女)가 혈적소(血赤簫)를 들고 나타나 천하를 어지럽힌 사건
아미파 적을 버리고 환속한 난타노신니(亂打老神尼)가 요지고(瑤池鼓)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사건.
천하제일뇌의 천리회유성이 다시 들려왔다.
“허면 중원 칠대방파가 암암리에 회동한 사실도 알고 계신지요?”
현원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께서는 본인의 개인 정보력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얼마 전, 소림에서 칠대방파의 비밀회동이 있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소림의 혜원 장문방장을 비롯하여,
무당(武當) 장문인 백운도장(白雲道長).
곤륜(崑崙) 장문인 곤륜벽력일섬(崑崙霹靂一閃).
화산(華山) 장문인 태태노야(泰泰老爺).
아미(娥媚) 장문인 신력신니(神歷神尼).
청성(靑城) 장문인 청성무진(靑城無盡).
개방(丐幇) 방주 취선개(翠禪丐).
칠대방파 수뇌들 외에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비밀회동.
헌원패는 개인 정보력을 통해 이 사실을 낱낱이 꿰고 있는 것이다.
천하제일뇌의 음성이 또 들려왔다.
“소가주께서는 소림 비밀회동에서 어떤 논제가 의논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화궁의 잦은 중원 출몰과 전대 마녀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비한 비밀회동이라고 판단되오만.”
천리회유성은 걸쭉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끊어졌다.
“껄껄걸. 소가주가 이토록 영명하시니 헌원세가는 걱정이 없습니다.”
헌원패는 산길을 걸어갔다.
그가 경신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명상을 즐기기 위해서다.
지금은 이른 아침.
헌원패는 서두를 일이 없었다.
세류원(洗流苑).
회수(淮水) 하류에 위치한 거대한 정원(庭園)이다.
회수는 초한시대(楚漢時代)에 항우와 유방이 처절한 회수전투를 치룬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위나라 조조의 대군과 오나라 손권의 대군이 합비 대전투를 치룬 곳으로도 유명하다.
회수 하류는 상류의 기름진 부산물들이 떠 내려와 저절로 기름진 토양이 형성된다.
세류원은 회수 하류 한 곳, 즉 기름진 토양 위에 태평노야(泰平老爺)가 지은 대정원(大庭園)의 이름이다.
태평노야(泰平老爺).
일백 살을 넘긴 노인이다.
젊은 시절엔 황사(皇師=황제의 스승)를 지냈다.
지은 책만 일천 권에 달했고, 편집한 고서(古書)는 일만 권에 달한다고 한다.
황제조차도 태평노야를 살아 있는 경전(經典)으로 칭송할 정도였으니, 그의 박학다식함은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태평노야가 평생 모은 거금을 쏟아 부어 세류원을 지었다.
세류원을 지은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태평노야는 원래부터 호방한 사람이어서 술을 좋아했고 현자(賢者)들과 지내기를 좋아했다.
천하 현자들의 이야기 듣는 것도 좋아했으므로 황궁 다음으로 큰 세류원을 지은 것이다.
태평노야는 일백 세 무렵 혀에 폐단(弊端=암(癌)이 돋아 혀를 제거해야만 했다.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현자들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다.
세류원은 남녀노소 누구든 출입할 수 있다.
세객(說客)도 출입할 수 있고 현자를 자처하는 뜨내기 학자도 출입할 수 있다.
거부는 물론, 학식 높은 대가의 아녀자들도 출입했다.
천하 유명 인사들의 방문이 점점 많아지자 껍데기 현자들은 발길을 끊게 되고, 천하에 이름을 두루 얻은 명사들이 대부분 자리를 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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