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여인 (11)

무림인들이 만나면 통성명이 빠질 수 없다.
사나이가 포권하며 겸손하게 말했다.
“소생은 광동 출신으로 태운산(泰雲山)이라 하오.”
종리검도 살짝 고개를 숙여 포권했다.
“소생, 출신은 애매모호하지만 이름은 종리검이오.”
주화화가 빠질 사람인가?
“저는 주화화예요.”
무림인들의 고리타분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열 손가락을 펼치고 갑자을축을 들고 나와, 자축인묘를 들이대며 나이 고하를 따진다.
따져보니 종리검과 태운산은 동갑이었다.
종리검과 태운산은 동시에 박수를 한 번 쳤다.
“우리는 갑장이구려.”
주화화가 동굴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상전 또 하나 늘었네.”
주화화는 환우와 태운산보다 한 살 적다.
종리검이 태운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다 백주대낮에 변고를 당했소?”
태운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갑장인데 말 놓고 삽시다.”
“좋소. 아니 좋지. 말끝에 경어가 들어가면 나도 불편해.”
태운산은 산길을 가다 금괴를 발견하게 되면서 겪은 일들을 낱낱이 말했다.
주화화가 눈빛을 빛냈다.
“외진 산길인데 마차바퀴 자국이 있었다고?”
태운산이 끄덕였다.
"허나, 마차는 보지 못했지."
종리검이 툴툴거렸다.
“사공이 많았나? 왜 마차가 산 위로 올라가?”
주화화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긴 머리카락이 두 어깨 뒤에서 잔잔한 물결처럼 아름답게 출렁거렸다.
“운산 오빠가 하는 말은 뭐든 다 어울리지 않아. 산에 금괴가 발견된 것도.”
태운산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의 상상 너머의 일이다. 라는 뜻이었다.
종리검이 예리한 질문을 했다.
“친구는 두 여인을 죽였고, 대주라는 여인이 발출한 도화골사회룡침(桃花骨蛇廻龍針)을 맞았다고 했어”
태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화골사회룡침은 도화궁에서만 사용하는 암기 아닌가?”
주화화의 뇌리에서 번쩍! 거리는 뇌성이 울렸다.
“이건 운명을 넘어선 우리의 숙명이야.”
종리검과 태운산은 ‘이건 또 무슨 지랄도 풍성하신 소리일까?’ 하는 표정으로 주화화를 바라보았다.
이건 과거 일이다.
주화화가 쫓길 때 분명 도화궁 대주(隊主)라는 여인에게 쫓겼다.
그때, 참장 두 사람이 죽었다.
참장을 죽인 대주 여인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주화화도 대주 검에 어깨를 관통당한 후 까마득한 차마고도 아래 단애로 떨어졌다.
물론, 종리검에 의해 구명지은을 받았지만.
우연의 일치일까?
태운산도 도화궁의 대주라는 여인에게 독침을 맞았다.
뿐이랴.
오년 전, 대주라는 여인은 녹색경장을 입고 종리검을 찾아왔었다.
당시, 형 종리목도 대주 여인에게 독장(毒掌)을 맞아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평생 불구가 되었다.
대주 여인은 그때, 종리검에게 분명하게 말했었다.
형을 불구로 만들었다고.
종리검, 태운산, 주화화는 공통으로 떠오른 대주 여인의 특징을 떠올려 보았다.
-눈매가 날카롭고 눈 끝과 입술이 약간 위로 솟구친 여인.
-갸름한 얼굴, 대단히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여인.
-녹색 경장을 입은, 몸매 중에서 가슴 지분이 구할 쯤 되는 여인.
공통분모가 있었다.
세 사람이 대주라고 알고 있는 여인은 천하제일루 총관 도혼(桃魂)이었다.
세 사람은 여인의 명호는 물론이고 천하제일루 총관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도혼은 도화궁의 참살대주(斬殺隊主)다.
천하제일루에서는 총관 직책을 맡고 있다.
즉, 이중 직업을 지닌 여인이다.
주화화가 빠르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우연 같은 사실이 존재할 수 있어?"
태운산이 슬쩍 말을 돌렸다.
“내가 삼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했지?”
종리검과 주화화가 동시에 대답했다.
“응.”
태운산이 자신의 홀쭉해진 배를 관운장이 긴 수염을 쓸어내리듯 쓸어내렸다.
“그동안 뭘 먹였어?”
“죽.”
종리검이 거들었다.
"그냥 죽은 아니었어. 화화가 온갖 영초들을 뜽어 우려낸 물로 끓인 죽이었어."
태운산은 사람 좋은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술은 안 먹였지?”
종리검이 주화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일 화화 먹일 술도 모자랐어.”
주화화도 표정을 허물었다.
“운산(雲山) 오빠도 술독이야?”
“양조장 옆에 사는 게 소원이었지.”
하급 고수들은 툭하면 요양을 한다.
진정한 고수들은 특별한 요양을 하지 않는다.
눈을 뜨면 자가 치료요법, 운기행공을 수시로 시행하여 내가 진력을 보충한다.
화경(化境)에 도달한 고수들은 자면서도 운기조식을 취한다.
태운산의 무공수위는 화경에 이른 듯했다.
얼굴에 건장한 사나이처럼 붉은 주사빛 화색이 감돌고 있다.
그것은 체내 진기를 일주천시켰음을 의미한다.
종리검이 평소 자신이 입던 경장을 태운산에게 주었다.
태운산이 입고 있던 옷은 걸레로도 사용 못 할 정도로 찢어졌기 때문이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외출을 하겠다는 무언의 신호다.
태운산이 종리검을 바라보았다.
“친구는 알몸으로 다닐 거야?”
종리검은 촌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잠방이와 상의를 들어보였다.
“입어 본 사람은 알아. 엄청 편하다는 것을.”
주화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처럼 일급반점에서 특식을 먹으러 가는데 옷이 그게 뭐야.”
태운산도 거들었다.
“화아(花兒) 말이 맞아.”
종리검은 잠방이와 상의를 던져버렸다.
“어? 그래? 가면서 하나 사 입지 뭐.”
그 말을 끝으로 종리검과 태운산은 당장 동굴에서 쫓겨나야 했다.
주화화가 옷을 들고 왔다.
“나가서 기다려!”
종리검과 태운산은 먼 산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무려 반 시진 동안이나.
여자가 한 번 외출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지 순진한 두 총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주화화가 동굴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반 시진 전에 보았던 주화화가 아니었다.
방금 하늘에서 하늘거리며 하강한, 천상(天上)의 선녀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녀가 되어 있었다.
역시 여자는 꾸미기 나름인가 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화장빨!
*
하산(下山) 길이 죽음의 삭막한 지옥도(地獄道)가 될 줄이야.
종리검은 이름에 검(劍)이 들어있지만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우선 귀찮기 때문이다.
오늘은 검을 잡았다.
태운산과 주화화가 검을 들었기 때문이다.
종리검은 검을 잡으며 말했다.
“친구는 언제나 공평해야하지.”
별, 개가 뜯다 버린 살점 말라버린 돼지 뼈다귀 같은 소리를!
눈앞 풍광은 화려할 정도로 아름답긴 했지만 거칠었다.
산은 언제나 기암괴석을 품고 있고 거목(巨木)들을 안고 있다.
처음, 종리검과 주화화는 이목을 피하기 위해 거칠고 깊은 산을 찾았으므로 하산 길도 험하기 이를 데 없다.
단애는 키 재기라도 하듯 뾰족하게 솟아 하늘을 찔러댔다.
단애 중간엔 희뿌연 운무가 춤을 춘다.
운무는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수백의 산봉우리들은 녹색으로 물들어 바라보는 눈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계곡은 폭포를 잉태시키며 하얀 물줄기를 분산시켰다.
콰콰콰콰.
그야말로 선경(仙境)이다.
종리검과 주화화, 태운산은 천천히 걸어 하산했다.
주화화의 마음은 붕! 떠 있다.
산에서는 꿩고기와 토끼고기, 사슴고기를 먹고 싸구려 독한 술만 마셨다.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일급 반점에서 일류 요리를 먹을 수 있고 이름 난 강남명주(江南名酒)를 마실 수 있다.
뿐인가.
밤에는 일급 객점에 들어, 그동안 태운산을 치료하느라 지친 심신을 푹 쉴 수 있다.
마음이 공기가 주입된 총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랬는데...
찬란한 일곱 색깔 무지개 꿈은 그 순간 산산조각 났다.
태운산이 종리검과 주화화의 걸음을 제지했다.
종리검도, 주화화도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살기!
자욱하게 깔린 운무(雲霧)처럼 스믈스믈 흐르는 지독한 살의(殺意)가 세 사람에게 날카로운 바늘 끝처럼 전해졌다.
세 사람을 포위하듯 검막(劍幕)이 형성되고 있었다.
우우웅.
미세한 검기(劍氣) 움직임이 일렁이며 세 사람의 진로(進路)와 퇴로(退路)가 일시에 차단되었다.
하수들이라면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감지할 수 없다.
검기가 움직이며 검막을 형성했다면 살의가 분명한 고수들의 매복이 분명하다.
태운산이 눈짓으로 섬뜩한 형상을 하고 있는 수많은 기암괴석들을 가리켰다.
기암괴석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말을 눈짓으로 한 것이다.
종리검도 눈으로 거목들을 가리켰다.
거목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화화는 턱으로 땅을 가리켰다.
‘땅속에....단절흡술(斷切吸術)로 숨을 참고 있는 암살자들이 있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허공에서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세 줄기 신형이 세 사람 눈앞에서 빠르게 번득였다.
피이이잇.
지옥 무저갱에서 터져 나올만한 음산한 음성도 그 순간 진동했다.
“계집을 낚아채라!”
계집을 낚아 채?
나타난 자들은 하나 같이 깡마른 중년인들이었고 손에는 검날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혈검(血劍)을 들고 있었다.
중년인들은 착지와 동시에 유령처럼 흐늘거리는 모습으로 세 사람에게 쏘아져 왔다.
휙. 휘익.
중년인들의 동작은 그다지 빠르진 않았지만 지독하게 암울한 사기(辭氣)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염라사자의 출현인 듯, 오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중년인들은 하나같이 회색 경장 차림이었다.
동일한 복장!
어느 단체든 문파든, 소속이 분명한 자들임을 뜻한다.
중년인들 손에 들린 혈검에서 흐르는 시뻘건 검기가 더 짙어졌다.
주화화보다 먼저 태운산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을 뽑으며 태운산이 조용하게 말했다.
“기암괴석과 거목. 지면(地面)을 유념해!”
종리검도 주화화도 이미 파악한 터였다.
태운산의 검은 검강이 가득 주입되어 우우웅. 거리는 파공음을 터트렸다.
태운산은 검기가 충만한 검을 앞세우고 세 중년인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번쩍.
세 중년인에게 쏘아져가는 태운산의 검이 새파란 검광을 일으켰다.
세 중년인도 태운산을 향해 쏘아져 왔다.
휘이익.
일순,
챙. 채채채챙.
태운산의 한 자루의 검과 중년인의 세 자루의 시뻘건 혈검이 연속 세 번이나 맞부딪쳤다.
번쩍!
챙챙챙챙.
태운산의 검에서 시퍼런 뇌전이 계속 피어났다.
태운산은 단신(單身)이었음에도 세 중년인이 주르르 밀렸다.
세 중년인의 눈은 가득한 불신을 담았다.
“네놈이 광동세가(廣東世家)의 후예란 말이냐?”
태운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운산의 검이 세 번, 또 다시 시퍼런 섬광을 일으켰다.
일순간의 일이었다.
세 중년인들 전신에서 뼈와 살이 동시에 조각나는 살벌한 음향이 터졌다.
서거. 서걱. 서걱.
세 중년인의 전신이 조각났다.
“으아아악.”
세 중년인은 시뻘건 핏물을 뿜으며 허공 속에 비산(飛散)되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