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대신 염동력 한 잔

혜수는 이어서 임무에 관해 차근차근 브리핑을 해줬다.
해당 지역의 상황, 예상되는 대상자의 성향까지.
“말했듯이, 지방은 대응 체계가 수도권만큼 촘촘하지 않아서, 한 번 일이 터지면 규모가 커지거든.
그래서 분별자급 전력이 직접 가서 대응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야.”
심지어—
그녀는 상수의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혹시 같이 임무 나가고 싶은 요원있으면 말해도 좋고”
“···예?”
상수는 당황했다.
‘같이 나가고 싶은 요원’이라니, 그런 걸 묻다니.
이 조직, 사람 대하는 태도 많이 달라졌네···
역시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
‘재성 요원’이었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혜수가 먼저 잘랐다.
“참고로, 재성이는 안 돼요.
이번 작전 동안 수도권 지휘를 맡아야 하거든.”
“···그렇군요.”
'왜 물어본 거야...'
상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격 테스트를 진행해준 김 상사.
이름도 못 물어봤지만 체력 테스트 도와줬던 요원도 떠올랐다.
‘···누가 좋을까.’
그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혜수가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요원들도 그랬지만,
그쪽 요원들 중엔 분별자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꺼야.
여기선 당신이 실수도 하고 구박도 받았지만,
그곳에선 백 상수 요원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있테니
그런 부분도 고려해서 정하도록 해.”
상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뜨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최현상요원이요.”
—
며칠 뒤, 상수의 집 앞.
검은색 벤이 조용히 도로에 멈췄다.
잠시 후, 어깨에 가방 하나를 걸친 상수가 천천히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이미 몇 명의 요원들이 타고 있었고,
가장 안쪽 좌석엔 혜수와
다른 요원들, 그리고 현상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상수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요원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상이 상수를 쳐다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저를 말씀주셨다고 해서...”
상수는 살짝 웃었다.
“최근에 우리 좋은 추억도 만들었잖아요.”
혜수는 둘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가 출발했다.
상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혜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부산 어디로 먼저 가나요?”
“해운대구.”
“···진짜요?
휴가지에서 활개치는 놈이에요?”
혜수는 고개를 돌려 태블릿을 열며 대답했다.
“관광지인 해변 주변하고, 장산역 근처 주거지역에서
번갈아가면서 피해가 발생했어. 패턴상 단일 대상자로 보여.
두 지역이 같은 시간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없으니까.”
“신호가 감지된 상황은 아니고요?”
“응. 확인된 패턴상 곧 나타날 확률이 높아서,
선제 대응하려는 거지.”
현상이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상당히 노련한 놈일 수도 있겠네요.”
혜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봤자, 결국은 사람들 속에 기생하고 다니는 괴물이야.
똑똑하든 조용하든, 끝은 다 똑같아.”
말을 마친 그녀는, 상수와 다른 요원들을 둘러봤다.
“가는 길 길어. 조금이라도 눈 붙여.”
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리는 차창 밖,
도시의 풍경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 조직에 제법 익숙해졌나보다.’
차가 멀어지는 도시를 벗어나며,
상수는 처음과는 조금 달라진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
“···휴게소 안 들리나요?”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창밖을 보던 상수가 물었다.
멀리 휴게소 간판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현상이 흘깃 상수를 바라봤고,
뒤에서 보고 있던 혜수가 덧붙였다.
“참았다가 졸음쉼터에서 가.
휴게소 들어가면 또 늦어진다고.”
“아무리 일이긴 해도··· 부산 가는 길에 낭만도 없네요.
차 타고 가면서 소떡소떡 하나 먹는 게 국룰인데···”
혜수가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시간 없어. 만약—”
“들리는 그 시간이 지체돼서 대상자 피해를 못 막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할라 하셨죠?”
상수가 미리 받아쳤다.
혜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알면서 왜 물어봐.”
“그래도 간식이랑 커피는 중요하잖아요··· 마음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그건 나중에.
지금은 임무에 집중해.”
혜수는 단호했다.
상수는 현상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작전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는데···
나중에 도대체 나중에 언제?”
“시끄러.”
혜수는 단호하게 말한 뒤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현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졸음쉼터에서 커피 자판기나 한 번 들러보죠.
캔커피도 괜찮잖아요?”
—
얼마쯤 더 달렸을까.
차가 조용히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
상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도착했나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요원이 대답했다.
“네, 와우산 인근입니다..”
차에서 내린 상수는
길게 기지개를 켜는 혜수를 바라봤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쪽이 장산역 주거지랑 해수욕장 둘 다 접근하기 좋아”
도착 지점엔 몇 명의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다가오며 말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부산 지역 담당 요원, 최강수입니다.”
부드럽게 들리는 인사였지만 말투엔 분명한 노련함이 묻어났다.
혜수도 고개를 숙였다.
“서울 수도권 지휘 담당, 박혜수라고 합니다.”
최강수는 잠시 요원들 사이를 훑어보듯 살피다가
혜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혜수는 알아차렸다는 듯, 옆에 선 상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쪽이 백상수 요원입니다.
분별자입니다.”
“아, 예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강수는 환하게 웃으며 상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수가 악수를 받자, 강수의 손에서 느껴지는 굳은살과 단단한 피부.
보기엔 유순하지만 이 사람도 현장에서 몇 번을 죽을 고비 넘긴 사람이란 걸,
상수는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분별자님은 좀 특별하시다고 하더라고요?”
강수의 말에 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분이 없진 않죠.”
강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혹시··· 너무 피곤하시겠지만,
잠깐 여기 현지 요원들 앞에서 능력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직접 보는 게 아무래도 제일 와닿으니까요.”
상수는 당황했다.
“에, 지금요?”
옆에 서 있던 현상이 웃으며 말했다.
“한 번 보여주시죠.
여기 같이 온 요원 중에서도 아직 못 본 사람들 많아요.”
상수는 혜수를 바라봤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혜수.
“···알겠습니다.”
상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근처에 우뚝 솟은 나무 하나를 바라봤다.
‘너무 과하면 안 되는데···’
그는 손바닥을 펼치고,
의식을 집중했다.
“후···”
숨을 고르며, 손에 기운을 모았다.
[파-앙!!]
공기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상수의 손바닥에서 터져나온 힘이 나무를 강타했다.
굵은 가지가 부러지고,
주변의 나뭇잎은 바람처럼 흩날렸다.
한순간에 고요하던 공기가,
휘몰아치듯 흔들렸다.
멋쩍게 웃으며 몸을 돌린 상수를 향해
강수가 크게 외쳤다.
“박수!! 박수!!”
처음엔 어리둥절하던 요원들도
이내 박수를 보냈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 속에서——
상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이다.
자신의 능력을 이렇게까지 인정받은 건.
민망한 동시에,
어딘가 묵직한 감정이 가슴 속에 내려앉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
기대, 의존, 신뢰——
그 모든 게 상수의 어깨를 살짝 눌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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