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신메뉴 개발은 핑계고

13화) 신메뉴 개발은 핑계고
“우와! 이제 진짜 여행 온 거 같다.”
도시락 가게에서 마차를 타고 5시간가량을 달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르상 마을’.
다른 마을과는 달리 깔끔하고 알록달록한 건물과 깔끔한 보도블럭 도로 풍경으로 인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마을 중 하나였다.
태용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여행 유X브에서 이런 비슷한 것들 봤어요. 마치 유럽에 온 것 같아요.”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오래 살면서 여기는 처음 와보는군. 놀라우면서도 낯선 느낌이다.”
태용과 알파볼트가 놀라는 동안, 브루스타는 자신의 책을 뒤져가며 열심히 맛집으로 안내했다.
멀리서 길게 늘어뜨린 줄을 발견한 브루스타가 당연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책을 덮었다.
“보세요. 역시 제 책 인기는 아직 안 죽었다니까요. 얼른 줄 서자구요.”
“일단 서긴 서는데··· 줄이 너무 길다. 오늘 안엔 먹을 수 있는 거 맞아?”
“헤헤, 태용 님의 가게도 곧 이렇게 되실텐데요 뭘. 미리 체험한다고 생각하세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선 아무리 오래 걸려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구요.”
그러나 맛집을 가는 것도 좋고 중요하지만, 신기하고 낯선 이세계를 구경하고 관광하는 것 또한 너무 재밌고 하고 싶었던 태용이었다.
꼬르륵.
워낙 거친 흙길이라, 마차 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태용의 배가 음식물을 넣어달라고 아우성을 피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으니까, 일단 먼저 먹고 구경하면 되지. 다행히 날씨도 좋네.’
그렇게 3시간이 훌쩍 지났다.
* * *
“저번에 갔던 튀김집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몸의 가게가 맛집이 되는 건 절대 반대다.”
드디어 자리에 앉은 도시락 가게 임직원들.
알파볼트는 단단히 팔짱을 낀 채 주둥이를 삐쭉 내밀었다.
“여긴 유명한 관광마을이래잖아요. 유동인구가 훨씬 많으니, 당연히 더 줄이 길겠죠.”
“흥! 인간들은 그렇게 시간을 아무렇게나 낭비하나보군. 우리 라이칸족은 배고프면 기다리기보단 직접 사냥을 나섰지.”
“그럼 오늘 먹을 메뉴도 직접 숲에 가서 사냥해보시지 그래요?”
“크, 크흠···! 직원이 먹고 싶다는데 이 몸이 빠질 순 없지. 사장이라면 새로운 맛을 경험하기 위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거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반면, 롤링은 의외로 볼멘소리 하나 없이 침착하게 잘 기다려 태용을 놀라게 만들었다.
“롤링, 너는 괜찮아? 이렇게 오랫동안 줄을 섰는데도 말이야.”
“당연하죠. 루터라면 기다리는 거에 익숙해져야 해요. 길 위에선 언제 답이 주어질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재촉한다고 답이 빨리 주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어른스럽다. 이미 어른인 롤링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람쥐족은 수명이 짧기에 빨리 어른스러워지는 게 아닐까 싶다.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3시간을 기다린 맛집 메뉴가 드디어 등장했다.
“기본 팬케이크와 생크림 팬케이크, 올리브 돼지기름 팬케이크. 그리고 저희 가게 시그니처인 단풍 시럽 팬케이크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브루스타의 말에 의하면, 팬케이크에 단풍 시럽을 올려주는 음식점은 이곳밖에 없다고 한다.
현실세계에선 흔한 메이플 시럽이 이세계 사람들에겐 이제 막 먹기 시작한 충격적인 맛의 신기원인 것이다.
“근데 브루스타, 올리브 돼지는 뭐야? 올리브를 먹인 돼지인가? 녹차 먹인 삼겹살처럼?”
“네? 농담이시죠? 올리브 돼지 나무에서 자란 돼지잖아요. 그 돼지의 젖은 우유가 아니라 기름이 나와서 요리할 때 엄청 많이 쓰니 모를 리가 없으실 텐데요.”
“아··· 다, 당연히 농담이지. 배고프니까 다들 기분 전환이라도 하라고······.”
아직도 이세계에 대해 배울 게 많구나.
태용은 각 팬케이크를 4분의1씩 잘라서 배분해주었다. 그리고 각각 맛의 차이점이 어떤지 먹어본 후 얘기해달라고 덧붙였다.
“자, 나도 이제 먹어볼까.”
갓 나온 따끈따끈한 팬케이크들을 먹어보는 태용.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핀다. 다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인다.
‘무난하게 맛있는 팬케이크들이야. 하지만 이런 가게가 현실에 있다면, 3시간씩이나 줄 서서 먹을 정도는 결코 아닌 맛이다. 그냥 집 근처에 있다면 요리하기 귀찮을 때마다 한번쯤 가볼 정도인 수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정도랄까.’
역시나 가장 먼저 순식간에 먹어치운 알파볼트였다.
그는 커다란 이빨을 한껏 드러내 보이며 웃은 채, 입가에 묻은 메이플 시럽을 핥아먹었다.
“줄을 기다린 보람이 있군. 엄청 맛있도다! 마치 보름달에 꿀을 발라 먹으면 이런 맛이 날 것 같구나.”
“이 네 가지 메뉴 중 뭐가 제일 맛있었어요?”
“당근 이 단풍 시럽이 발린 팬케이크다. 처음 먹어보는데 굉장히 달콤하구나. 태용, 너라면 똑같이 만들 수 있겠지. 다음 신메뉴는 이걸로 하자.”
이번엔 옆을 보니, 롤링이 접시를 들고 미친 듯이 싹싹 핥아먹고 있다. 이미 설거지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한데도 말이다.
“그렇게 맛있어?”
“네! 혓바닥이 닳아 없어질 것 같지만 엄청 달고 맛있어요. 우리 가게에서도 이거 팔면 좋을 거 같아요.”
맞은편에 앉은 브루스타는, 팬케이크 마지막 한 점을 접시에 묻은 메이플 시럽에 가볍게 한 번 푹 찍어먹으며 여유를 부렸다.
이미 자기는 한 번 먹어봤다 이거지?
“역시 또 먹어도 변치 않는 맛이군요. 율리오스 대륙에서 이 가게에서만 먹을 수 있으니 경쟁력까지 갖췄구요. 태용 님도 이 메뉴를 판다면 분명 엄청난 대박이 날 겁니다.”
메이플 시럽 팬케이크를 맛본 모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하나같이 우리들의 도시락 가게에서도 판매를 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너희들, 만약에 내가 이걸 만들면 매일 먹을 자신 있어? 알파볼트 씨, 삼시세끼 내내, 아니, 두끼만이라도 내내 먹을 수 있겠어요?”
정곡이라도 찔린 듯, 모두들 자신들의 배에 손을 올리고 빈그릇을 바라봤다.
“솔직히 자신이 없군. 맛있어서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조금 있다가, 혹은 내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저도요. 몇 년 만에 먹어서 좋았지만, 내일 또 줄 서고 싶진 않아요.”
“맞아요. 오빠의 빨간 닭구이 소스를 핥아먹었을 땐 바로 또 먹고 싶었는데, 이 단풍 시럽은 그러고 싶진 않은 것 같아요. 배가 부르니까 생각이 안나요.”
그렇다. 중독성.
단 음식은 금방 물리기 마련이다. 관광지처럼 어쩌다 경험하는 것은 좋지만, 매일 경험하라고 하면 금방 시큰둥해진다.
“맞아. 그리고 우리 가게에 있는 메뉴들은 전부 우리 가게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우리만의 메뉴를 만들어야지, 똑같이 따라 해서 손님을 불러 모으고 싶지는 않아.
애초에 메이플 시럽은 새우튀김처럼 더 발전시키거나 다른 메뉴에 응용하기도 까다로운 맛이다. 차라리 팬케이크를 이용하면 모를까.
* * *
“하~ 이제 살 것 같다.”
팬케이크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이들은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해 씁쓸한 커피와 차를 마셨다.
혀에 끈적하게 남아있는 기분 나쁜 단맛을 얼른 덮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 이들만이 아닌지, 주변의 카페들은 팬케이크 가게에서 나온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우유가 들어간 커피가 정말 맛있군. 긍지 높은 라이칸족에게 어울리는 깊은 맛이다.”
“전 이 모카 버터 참기름 바나나 건강 주스가 정말 맛있네요. 절대 뚱뚱해서 건강음료 먹는 건 아니에요.”
“이 도토리 칵테일 진짜 맛있다! 적당히 씁쓸해서, 알알했던 혀가 싹 내려갔어요.”
태용은 그냥 평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뭐니뭐니해도 기본이 맛있어야 한다는 그만의 철칙 때문에, 처음 가는 가게는 무조건 가장 기본적인 메뉴를 시키는 습관이 있었다.
다행히 카페는 서로 다른 메뉴를 시켜도 눈치 주는 이가 없는 장소다. 오히려 눈치를 주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정상화된 공간이다.
그들은 한동안 카페 테라스에 앉아 각자 시킨 음료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이 근처에 유명한 관광지가 있데요. 다 같이 가 봐요.”
이 지역 여행 가이드북까지 단단히 챙겨온 브루스타가, 한껏 들뜬 채 모두를 안내했다.
그래,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역시 여행은 마음 맞는 친구끼리 같이 놀러 가는 게 제일 설레고 신나는 법이지.
바쁜 생활에 치여 외국 한 번 가본 적 없는 태용은 이 꿈같은 생활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롤링. 여행 가이드는 원래 너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도 참! 전 관광지나 지역 명소를 찾아주는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루터란, 길 위에서 답이 막혔을 때 해결책을 찾아주는 고귀하고 신비한 일을 하는 역할이라구요.”
“음,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럼 부모 손을 놓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는 도와주나?”
“전 미아보호소도 아니라구요. ···뭐, 그래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요. 어후, 유치하게 그만 놀려요.”
이젠 서로 장난도 서슴없이 치는 사이가 되었다.
이러다 여행 몇 번하면 서로의 벗은 몸을 봐도 아무렇지 않게 되는 거 아닌가 몰라.
끔찍한걸.
그 사이, 어느덧 브루스타가 안내한 관광지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우와! 책에서만 본 것보다 훨씬 멋지지 않아요? 차원이 달라요.”
그들이 온 관광지는 르상 마을 전망대 타워.
높은 곳에서 올려다본 유럽 분위기의 마을 전광이 일품인 곳이다.
태용을 포함해서 원래 이세계에 살던 이들까지 전부 순식간에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었다.
알파볼트의 요란한 꼬리 움직임이 바로 그 증거다.
“숲에서 살 땐 몰랐는데, 이리도 멋진 곳이었구나! 내가 사는 숲도 아마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아름답겠지.”
“그러고 보니, 알파볼트 씨가 사는 지역엔 높은 산이나 전망대가 없었던 것 같네요.”
“그렇다. 넓고 윤택한 평지와 초원이 많아서 시장이 발달했지. 대신 숲도 많아서 너 같은 인간들은 거의 살지 않는 곳이다. 밤엔 위험하기 때문이지.”
그래도 이번엔 ‘나약한 인간’이라고 강조는 안 하네.
전보다 많이 유해진 알파보트였다. 인간인 태용과 친해져서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전망에 기분이 좋아져서인지는 ‘그’만 알 것이다.
[자- 자-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즐기는 레드 크라켄 호롱! 우리 가문 특제 양념을 발라서 더욱 맛있다오!]
[하나만 먹어도 든든한 토네이도 푸룬 감자 있습니더~ 아주 잘 익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랏빛 이지유~ 드셔보셔들~]
전망대 중앙에 각종 음식들을 파는 가판대가 설치되어있다.
역시 현실이나 이세계에서나 관광지에 왔으면 길거리 음식을 먹어주는 게 예의지.
“다들 언제까지 풍경 감상만 할 거야. 먹으면서 보면 더 좋아. 알파볼트 씨도 꼬리 그만 흔들고 잠깐 이쪽으로 와서 같이 먹어요.”
* * *
관광을 마친 이들은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여자인 롤링은 따로 방을 잡아주고, 남자인 나머지 셋은 커다란 한방에 숙박하기로 했다.
태용, 알파볼트, 브루스타, 이 셋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따뜻하게 깔린 이부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여행은 다 좋은데, 숙소에 오면 급 피곤해진다니까.”
“하지만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제가 책 쓰러 다닐 땐 새벽까지 열심히 먹으러 다녔다구요.”
“헹! 이 몸은 아직 끄떡없다.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아주 팔팔하지.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밤 관광을 계속할 수 있다 이말이다!”
10분 후, 태용의 양 옆에 누운 알파볼트와 브루스타가 요란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우우~ 크허허. 아우우~ 크허허.”
“커헝, 컹! 커헝, 컹!”
“이것들이···! 씻지도 않고···! 말이라도 하지 말던가.”
어차피 제대로 잠을 자긴 글렀으니, 태용은 수첩을 꺼내 오늘 먹은 음식들을 정리했다.
‘각종 팬케이크··· 커피랑 이상한 음료들··· 그리고 알고 보니 쭈꾸미였던 크라켄 호롱과 롤링을 폭풍 설사하게 만든 토네이도 푸룬 감자··· 흐음···’
전부 도시락 메인 반찬 메뉴로는 적합하지 않은 음식들. 태용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한 가지 음식에 꽂혀버렸다.
“팬케이크··· 팬케이크··· 그러고 보니, ‘전’을 ‘코리안 팬케이크’라고 부르기도 했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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