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스프 한 솥

31화) 스프 한 솥
“오늘도 잘 자랐네~”
엄마 라이칸이 각종 야채와 과일이 싱싱하게 자란 텃밭을 뿌듯하게 보고 있다.
아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끝과 끝이 시야에 다 들어온다.
저녁이 되고, 어린 알파볼트는 엄마, 아빠와 같이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밥을 먹고 있다.
“난 엄마 스프가 제일 맛있어요!”
“재료가 신선해서 그래. 텃밭에서 방금 수확한 옥수수로 만들었거든. 너도 엄마 따라 몇 번 도와줬으니까 잘 알 거야.”
“네, 노란색에 길쭉한 거!”
그 사이, 아빠는 스프를 한 그릇 뚝딱 다 비우고, 그릇에 코를 박은 채 맛있게 먹고 있는 어린 알파볼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엄마 또한 어린 알파볼트가 잘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빠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역시 당신 선택이 옳았어. 봐봐. 배에 탔으면 저렇게 잘 먹는 모습은 보지도 못했을 거야.”
“맞지. 그래도 족장님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돼. 분명 지금쯤 그들도 새로운 땅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있을 거야.”
“그 전설이 과연 진짜일까···? 솔직히 그들이 걱정돼. 그리고 배에 탄 우리 언니도···.”
“진짜라고 믿어야지. 그들도, 우리도 다 같이 잘 살아야 미래가 있는 법이니까.”
아빠는 손수건으로 어린 알파볼트의 턱과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어린 알파볼트는 해맑게 웃으며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엄마! 한 그릇 더요!”
“그렇게 맛있어?”
“네!”
“알았어. 엄마가 나중에 만드는 방법 알려줄게.”
“예! 신난다!”
아빠가 신난 어린 알파볼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자신의 커다란 송곳니를 보여주었다.
“그럼 아빠는 조만간 사냥하는 방법 알려줘야겠다. 아빠 알지? 라이칸족 최강 송곳니 대회 1등 한 거.”
“와! 역시 우리 아빠가 짱이야! 나도 어제 엄마 텃밭 괴롭히던 두더지를 잡았어.”
“역시 우리 아들이라니까.”
밤은 점점 깊어갔지만, 식탁의 온도는 식을 줄 모르고 포근하게 달아올랐다.
* * *
어느 한가로운 오후.
어린 알파볼트는 앞마당에서 일하는 개미를 관찰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 놀고 있다.
“아들, 뭐 해?”
“아빠, 저 지금 바빠요. 못 놀아드려요.”
“누가 놀아 달랬냐, 녀석도 참.”
아빠는 어린 알파볼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엄마가 찾으면, 아빠 울타리 만들러 떡갈나무 숲에 간다고 전해, 알았지?”
“네.”
“녀석, 건성으로 대답하긴. 아빠랑 같이 갈까?”
“지금은 말구요, 나중에요.”
아빠는 그대로 깊은 숲 속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경도 안 쓰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어린 알파볼트.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탕-!
숲속에서 들리는 외마디 총소리. 놀란 수 백 마리의 새들이 어린 알파볼트 위를 뒤덮었다.
새들로 인해 그늘이 져 개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어린 알파볼트는 총소리로 시선을 돌렸다.
“맞다! 아빠···!”
어린 알파볼트는 아직 혼자서는 들어가 본 적 없는 깊은 숲 속으로 홀린 듯이 들어갔다.
아직 미숙하지만 최대한 아빠의 흔적을 맡으며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어린 알파볼트.
그 때, 어린 알파볼트는 햄업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어? 햄업 아저씨! 우리 아빠 못 봤어요?”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도는 햄업. 그런데 총을 든 채 손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내, 내가 안 그랬어··· 나, 난 그냥 마누라 여우 목도리를······ 분명 여우였는데··· 내가 봤어··· 분명 여우였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먼 산만 바라보는 햄업. 그의 발밑에 아빠가 싸늘하게 누워있다.
“아, 아빠? 아빠!”
어린 알파볼트가 소리를 지르자, 햄업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어린 알파볼트를 공허하게 쳐다본다.
“봤니?”
“···네? 뭐, 뭘요···?”
“봤구나.”
헴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에 총알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드, 들키면 난 사형이야······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나만 보고 있는 걸······ 그래··· 안 되지··· 안 돼······”
“아저씨가··· 우리 아빠 저렇게 만들었어요···?”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안 들키면 돼······ 들키지 않게 하면 돼······ 죽이면 돼···.”
이윽고, 손에 떨림이 멎은 헴업이 총구를 어린 알파볼트에게 고정했다.
어린 알파볼트는 아빠와 총을 번갈아 쳐다봤다.
두려움에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 아빠······ 일어나요······ 도와주세요······”
“애야, 미안하다···. 나랑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탕-!
“안 돼!”
당겨진 방아쇠.
동시에 어린 알파볼트의 뒤에서 엄마가 나타나 헴업을 덮쳤다.
“······어, 엄마?”
총소리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뜬 어린 알파볼트는 눈을 뜨고 앞을 봤다.
눈앞에 헴업과 엄마가 포개진 채 바닥에 누워있다.
“엄마! 엄마!”
울면서 가까이 다가가는 어린 알파볼트.
헴업의 가슴에는 엄마의 커다란 발톱이 박혀있다.
“엄마, 아저씨가 죽었어요. 일어나 봐요···.”
어린 알파볼트는 엄마의 몸을 뒤집어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 때, 자신의 손에 묻는 붉은 액체.
그것의 정체는 엄마의 복부에 뚫린 구멍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엄··· 마···”
“하아······ 엄마 여기 있어······ 왜······?”
“엄마!”
어린 알파볼트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쏟아진 눈물에 놀라 엄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는 힘겹게 손을 들어 어린 알파볼트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엄마 괜찮아요?”
“어······ 괜찮아······ 아빠는······?”
“···몰라요. ······저 아저씨가 그랬어요.”
“하아······ 나한테 말도 없이······ 그러게 왜 대답을 안 해······? 엄마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구······”
“미안해요.”
힘들게 고개를 들어 헴업과 아빠를 쳐다보는 엄마.
아빠의 가슴에 난 붉은 구멍을 발견한다.
엄마는 어린 알파볼트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머리 위에 손을 올린다.
“엄마 말··· 잘 들어···”
“네.”
“모든 인간이··· 나쁜 건 아니란다···”
“네?”
“그러··· 니까··· 인간을··· 미워하지 마······”
“그럴게요.”
“착하다··· 우리 아들······. 스프를··· 많이··· 만들어 놔서······ 다행이야············.”
어린 알파볼트 머리 위에 올려진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엄··· 마···? 엄마······ 아빠······.”
어린 알파볼트는 여전히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 * *
초점 없는 눈으로 집에 돌아온 어린 알파볼트.
멍하니 집 안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창문을 두들기는 바람 소리가 집 안을 대신 채워준다.
킁킁-!
냄새를 맡고 무의식적으로 주방으로 간 어린 알파볼트.
식어버린 화덕. 하지만 그 위에 올려진 커다란 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뚜껑을 열어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안에는 야채, 고기, 콩 따위가 크게 송송 썰린 스프가 가득 담겨있다.
어린 알파볼트는 선반 위에 자신의 그릇을 찾아와 스프를 조심스럽게 푼다.
“···잘 먹겠습니다.”
식탁에 앉은 어린 알파볼트는 스프를 호호 불어 입에 넣는다. 아빠의 자리를 쳐다본다. 한 입 또 먹는다. 이번엔 엄마 자리를 쳐다본다.
그릇이 깨끗하게 비었다.
꼬리가 축 쳐져있다.
다음 날 아침.
어린 알파볼트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작은 봉우리 사이에 누워 잠을 청하는 어린 알파볼트.
밤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간 어린 알파볼트는 남은 스프를 먹었다.
며칠이 지났다.
스프가 가득 들어있던 솥단지는 텅 비어있다.
어린 알파볼트는 꼬리를 돌돌만 채 숲 속의 작은 두 봉우리 사이에 눕는다.
“보고싶어요······. 여기 계속 누워있으면 아빠랑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요···?”
어린 알파볼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하지만 집으로 가지 않는다. 소리가 날수록 몸을 더 둥글게 말 뿐이었다.
“이제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어린 알파볼트는 꼬리를 얼굴까지 덮었다.
잠시 후, 그의 머리 위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엄마···? 아빠···?”
포근함을 느낀 어린 알파볼트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그곳엔 낯선 인간 노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꼬마야···! 아직 살아있었구나!”
“으아아악!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어린 알파볼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두 개의 작은 봉우리와 어린 알파볼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많이 외로웠겠구나.”
“아니에요! 저 집에 갈 거예요!”
어린 알파볼트는 서둘러 집으로 뛰어갔다.
현관에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노인이 천천히 따라온 것을 발견한다.
“따라오지 마세요!”
“···좋은 집에 사는구나. 근데 어린 아이 혼자 살기엔 너무 위험해.”
위험하다는 말에 흠칫 놀라는 어린 알파볼트.
노인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어린 알파볼트와 눈높이를 맞춘다.
“라이칸족이니?”
“···네. 그런데요···?”
“너처럼 혼자 남은 수인 아이가 잘 지낼 곳을 안단다. 그곳에 가면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잘 키워줄 거야. 힘들겠지만 한 번 이 늙은이를 믿어보겠니?”
현관 기둥에 숨어 노인을 경계하던 어린 알파볼트.
노인이 아무것도 없는 빈손을 조심스럽게 내민다. 망설이던 어린 알파볼트는 결국 손을 뻗어 주름진 따뜻한 손을 잡는다.
“어른이 되면 이 집으로 돌아오렴. 그때까지 내가 집을 돌봐주마.”
어린 알파볼트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동시에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메아리친다.
“허허, 소리를 보아하니 늠름한 어른으로 자라겠구나.”
노인은 보따리에서 딱딱한 빵을 꺼내 어린 알파볼트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그것이 맛이 있든, 없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어릴 땐 잘 먹어야 하는 법이란다.”
빵을 다 먹은 후, 어린 알파볼트는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피곤하니? 하긴, 벌써 달이 높이 솟았구나.”
“졸··· 려······.”
“안아주마. 꽤나 먼 길을 떠나야 하니까 말이다.”
노인은 어린 알파볼트를 품에 안은 채, 달이 뜬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 * *
“여기군.”
어른이 된 알파볼트. 작은 보따리 하나만 등에 맨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은 기억 속 그대로였으나, 마당엔 못 보던 울타리가 쳐져있다.
“흥! 그 노인네, 돌봐준다더니 굳이 안 해도 되는 짓까지 했군.”
알파볼트는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이 몸이 돌아오셨다. 그동안 잘 있었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곳곳에 얇게 먼지가 끼어있다.
“이 노인네, 어디로 내뺀 거냐.”
뿌드득 이를 갈던 알파볼트는 식탁 위에서 접힌 쪽지를 발견한다.
쪽지를 열어보는 알파볼트. 날짜가 2달 전으로 적혀있다.
[꼬마야, 내 계산이 맞다면, 2달 뒤엔 늠름한 어른이 되어 돌아오겠구나. 하지만 난 그 멋진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할 거 같구나. 인간의 삶은 왜 이토록 짧은 것인지. 너가 없는 동안 뒷마당에 텃밭을 잘 가꾸어 놓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관리가 잘 되어있어 크게 손 볼 건 없었단다. 안전하게 지내라고 울타리도 지어 놨지만 어른이 된 너에겐 필요 없을 수도 있어 괜한 헛수고만 한 거 같구나. 너라면 날 찾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진 말거라. 내가 죽은 모습까지 볼 필요는 없지 않겠니. 그저 날 다 식은 빵 하나 건넨 못난 늙은이로 기억 하면 그거로 족하다.
훌륭한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한다.]
쪽지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접어 다시 그 자리에 놓는 알파볼트는 뒷문을 통해 뒷마당으로 나갔다.
잡초가 많이 자라긴 했지만, 각종 야채와 과일이 아직까지 싱싱하게 자라있다.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텃밭은 덤이다.
피식 웃는 알파볼트.
“인간들은 늘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군.”
* * *
이야기를 다 들은 태용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정작 알파볼트는 태연했다.
“이 몸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할 말을 잃었나?”
“아, 아니에요. 아니 뭐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런 말을 하면 동정하지 말라며 뭐라 할 거잖아요.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역시 넌 잘 아는군.”
마주본 둘은 서로 가볍게 피식 웃었다.
얘기하며 오다보니 어느새 그들은 가게 앞에 당도했다.
그런데 불이 켜져있는 것이 아닌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브루스타, 롤링, 펨베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다들 왜 여기 있어?”
“태용 님, 알파볼트 님, 왜 이제 오세요. 한참 기다렸어요.”
“설마 오빠랑 아저씨랑 단둘이 데이트라도 한 거예요?”
“그런 건 됐고, 나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배고파 죽겠어. 일부러 더 맛있게 먹으려고 지금까지 굶었어. 나 잘했지!”
펨베를 제외한 모두가 못 말린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굶게 만들 순 없죠. 조금만 기다려요.”
태용이 주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알파볼트가 태용을 번쩍 들어 의자에 앉힌다.
“왜, 왜 그래요?”
“오늘은 사장인 이 몸이 특별히 두둑하게 스프 한 솥 끓여주지.”
다들 깜짝 놀람과 동시에 기대된다며 입을 모았다.
태용 역시 알파볼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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