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03-당가주의 생일

“아무튼, 제발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볼 언행은 좀 자제하거라. 가문의 사람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노력해 볼게요.”
노력해 본다라..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큰아들놈이 빈말은 안 한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리고 정말 당조혁은 노력했다.
“형. 왜 그래?”
당진혁은 손수건으로 코 아래 입술을 가리고 있는 형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당조혁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팻말을 가리켰다. 작은 팻말엔 ‘默言(묵언)’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진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데?”
그러자 당조혁은 입을 가린 손수건을 내리고 소리없이 입모양으로 ‘수행’이라고 대답했고, 그제야 당진혁은 형의 목에 걸린 팻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갑자기 왜 묵언수행이야?”
그 말에 당조혁은 그저 눈웃음을 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지만 동생은 집요했다.
“형. 진짜 말 안 하는거야?”
당조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진혁은 손님들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형 소개는? 내가 해?”
어린 동생의 시선에는 아미, 청성, 점창을 비롯해 여러 문파에서 온 어린 손님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그들 형제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당조혁은 염화시중 같은 눈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형의 모습에 당진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형을 소개했다.
“제 형 이름은 당조혁이라고 해요. 저는 당진혁.”
그렇게 운을 띄운 당진혁은 슬쩍 형의 눈치를 살폈다. 형은 자신의 소개가 흡족한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당진혁은 자신감을 얻어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형은 벙어리가 아니에요. 평소에는 말을 정말 잘 한단 말이에요. 장로 할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도 형과의 말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수행을 하는 걸까요?”
고개를 갸웃하는 어린 소년에게 어린 손님들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아무튼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잘 대접하라고 하셨으니까 편하게 지내요.”
“···.”
당진혁의 말에 모두 웃으며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당진혁이 울상을 지으며 도와달라고 형을 보았다. 그러자 형이 말없이 검지와 중지로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시늉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당진혁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손님이 방문하면 으레 먹을 것을 대접하는 법이 아닌가?
당진혁은 모두에게 착석을 권하고 시비를 시켜 차와 다과를 내어왔다. 다들 입에 뭔가 들어가고 나서야 뭔가 어색하고 얼어붙은 분위기가 깨지고 서로 말이 오고 갔다. 모두 간단히 자신의 이름과 몸담은 문파를 소개한 후엔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단연 묵언수행 중이라는 당가의 대공자였다. 특히 아미의 제자라는 정호연은 직접적으로 (입을 가린 것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당조혁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사문이 불문이라 그런지 묵언수행하시는 분들을 종종 뵙는데 당가에서 묵언수행하는 분을 만나니 기분이 신기하네요.”
끄덕끄덕.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묵언수행을 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소녀의 질문에 당조혁은 검지를 들었다.
“하루요?”
당조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연이 다시 물었다.
“혹시 왜 묵언수행을 하시게 되었는지 여쭈어도 되나요?”
그 말에 당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게 되셨나요?”
그 질문에 당조혁은 곤란하다는 듯이 입을 가린 손수건을 가리켰고 호연은 아!하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지금 당조혁은 구체적으로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혹시 어떤 이유가 있으신가요?”
끄덕끄덕.
“혹시 깨달음을 위해서?”
절래절래.
“그럼 본의가 아닌 건가요?”
절래절래. 끄덕끄덕.
“?”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소녀의 눈엔 그런 형을 진지하게 관찰하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그 동생에게 대신 질문을 던졌으니 형제이니 더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본의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라는 뜻인가요?”
“음.. 제 생각엔 반반이라는 것 같아요.”
“맞나요?”
끄덕끄덕.
당조혁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호연은 과연 형제라고 감탄했고 이번에는 당진혁이 물었다.
“혹시 아버지께서 시키신 거야?”
끄덕끄덕.
“그리고 형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고?”
끄덕끄덕.
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진혁도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점창에서 왔다는 정현이라는 소년이 물었다.
“그건 곧 누가 시켜서 했다는 뜻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우리 형은 자기 마음에 안 내키면 누가 시켜도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아버지가 시켰지만 스스로 하기로도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반반이라고 대답한 거라고 생각해요.”
당진혁의 말에 무슨 그런 이상한 설명이 있나라고 생각한 소년이었지만 당사자인 당조혁이 흐뭇한 눈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본인도 억지로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당가의 대공자는 참 이상한 인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차와 다과가 나왔고, 다른 문파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각자 제법 어른스럽게 차를 즐기는 모습을 연출했지만, 아직 놀고 싶은 혈기방장한 아해들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살짝살짝 비틀고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는가?
그런 모습을 목격한 당조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짓했다. 손님들의 머릿속에서 전속 통역사(?)의 위치를 확보한 당진혁이 물었다.
“따라오라고?”
끄덕끄덕.
“모두?”
끄덕끄덕.
“왜?”
당진혁의 질문에 당조혁은 언젠가 제 숙부인 당이전을 반길 때 췄던 요상한 춤(말타는 것 같은 춤)을 잠깐 추어서 순간 소년소녀들의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익숙한 당진혁은 태연하게 형의 의사가 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놀러가자고?”
끄덕끄덕.
그러자 당진혁이 손님들을 보았다. 손님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집주인의 마땅한 도리였다.
당진혁이 당조혁을 대신해 모두에게 묻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들었다. 다들 무가의 제자나 자제들이기도 했고 얌전히 가만이 앉아있는 것도 좀이 쑤실 나이대였다. 또한 당가의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다들 당조혁을 따라 움직였으니..
“우리는!”
“당가오전대!”
“““···.”””
이게 뭐지?타문파의 아이들은 얼이 빠졌다. 일찍 방문해 있었던 서문이태와 서문이화도 이미 겪었으나 또 겪어도 신선했으니, 서문이태는 먼 산을 보았고, 서문이화는 닫은 입술에 꾹 힘을 주며 웃음을 참아냈다.
아무튼, 아이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전대기수식(?)을 해제한 당가의 아이들이 머리를 모으고 수군거렸다.
“다른 문파는 협객놀이를 안 하는 모양이야.”
“그럼 어떡하지?”
“누구나 아는 놀이를 하자.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라거나.”
“대련은 어때?”
“봐줄 어른들도 없는데? 그러다가 반성실에 갇힌다?”
“그런데 조혁이 형은 왜 갑자기 묵언수행이래?”
“몰루?”
“이유가 있겠지.”
“저 형이 언제 이유 따져가며 이상한 짓했어?”
“하긴.”
머리를 모으고 쑥덕거리던 당가의 아이들은 손님으로 온 아이들에게 술래잡기를 제안했는데 모두는 식상했지만 손님된 입장이라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술래잡기용 놀이터라는 곳에 도착한 아이들은 식상함이 단숨에 날아가버렸으니...
“여기서 술래잡기를 한다고?”
놀이터는 놀이터라기보다는 차라리 경공 수행장에 가까웠다. 길이가 다른 통나무가 다닥다닥 세워져 있었고 크기와 모양이 다른 탁자와 의자, 길다란 평행봉, 막대기가 매달려 늘어진 밧줄 등 다양한 장애물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일정 장소 안에서 일대일로 하거나 아니면 일대다수로 할 수도 있어.”
스스로의 당가 오전대의 적(赤)을 맡고 있다고 소개한 아이의 말에 어린 손님들은 호기심을 빛냈고, 당가의 아이들이 우선 시범을 보였다.
“이번에야 말로 잡고 말겠어!”
“아직 내 경공을 따라잡기엔 멀었도다!”
어느 당가의 아이가 이번에야 말로 1:1 술래잡기에서 기존의 ‘청’을 잡아 당가오전대의 ‘청’자리를 뺏겠다고 선언했고, 도전을 받은 ‘청’은 마치 역할극에서나 쓰는 말투로 대응했으니, 보기에도 참으로 유치해 보였다.
하지만 그 유치함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이는 당가의 아이들에겐 너무 익숙했던 까닭이었고 어린 손님들은 당가로 오는 중에 어른들에게 입조심을 신신당부 받았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다들 나이가 어렸던 탓인지 당가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유치함이 그리 싫지 않았다. 명문대파의 제자로서 항상 몸가짐에 지적을 받아 답답했던 마음을 긁어주는 면이 있다는 걸 자각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기분좋은 유치함은 어린 손님들에게 장애물 술래잡기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겼으니..
“우와! 잘한다!”
장애물을 넘나들며 쫓고 쫓는 당가 아이들의 몸놀림은 마치 다람쥐처럼 날렵했다. 보법과 신법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탁자 밑으로 무릎으로 미끄러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술래의 손아귀를 벗어나거나, 평행봉을 손을 짚고 뛰어넘거나, 나란히 서있는 통나무를 좌우로 밟거나 붙잡아 통나무 위로 도망친다든가 상체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이 마치 날렵한 영물급 성성이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끝내 ‘청’의 자리에 도전했던 아이는 시간 내에 ‘청’을 잡지 못했으니 다들 당가 아이들이 하는 술래잡기가 그리 지루하지 않다는 것에 공감했다. 몇몇은 이 놀이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물시계에도 흥미를 보였으니 자기 문파로 돌아가서 해볼 생각이 역력했다.
그렇게 시범이 끝나자 당진혁이 말했다.
“해보고 싶은 사람!”
그러자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들었으니 대부분이 남자아이들이었다. (서문이화를 제외한) 여자아이들은 즐겁게 뛰어노는 것보다 조신함을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지만 막상 술래잡기가 시작되자 누구보다 즐겁게 구경했다.
꺄아!
깔깔깔!
소녀들의 웃음소리는 소년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으니, 소녀 앞에서 소년의 경쟁심이 불타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음양의 이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술래잡기용으로 만든 단순한 물시계는 소년들의 경쟁심 과열을 적절한 수준에서 멈추는 안전장치가 되어주었고, 모두들 큰 사고 없이 술래잡기를 즐겼으니, 어느덧 여아들끼리만의 술래잡기도 치러졌다.
“당가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정말 잘하네요.”
여아들의 술래잡기가 끝나자 잠시 쉰 소년들이 다시 술래잡기를 했다. 그 와중에 청성파에서 왔다는 명련이라는 소녀가 감탄하며 말했다. 당진혁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당가는 경공에 정말 공을 많이 들이거든요.”
옆에서 당조혁이 흐뭇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쳐주었고, 그런 형제의 모습에 명련이 느끼는 감정은 ‘재밌다’였다. 묵언수행 중이라는 형은 좀 이상하지만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고, 동생은 그런 형을 ‘태연하게 감싸며 포용하는 모습’이 우애 좋아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놀이는 영원하지 않았다. 정오가 넘어가자 오전 회의를 마친 어른들이 아이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제자들이 재밌게 서로 잘 어울려 놀고 있다는 소식에 시비 등을 시켜 아이들을 불러오기보다는 직접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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