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05-무림맹으로

업보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생각나는 것이 너무 많아서 대꾸하기가 곤란했답니다. 그래도 대공자님이, 좀 외람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소위 자아성찰을 잘 하셔서 다행이에요. (명색이 시비라 차마 주제파악이라고 표현할 순 없었어요)
대공자님께서 전에 본인의 입으로 말씀하시길 문제해결의 시작은 문제의 인지라고 하셨으니 언젠가는 지금보다 의젓해지시리라 믿어요.
···.
믿어도 될까요?
갑자기 회의감이 드는데 대공자님께서 입을 여셨어요.
“생각난 게 있어.”
“어떤 생각이요?”
“일단 하남까지 멀잖아? 설마 걸어서 가겠어?”
“뛰어가겠죠.”
“.. 왜?”
제 대답에 대공자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으셨어요. 저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답니다.
“탐초행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공자님. 독초가 길거리에서 자라진 않는답니다. 귀할 수록 깊은 산속에 있죠.”
“···.”
제 말에 대공자님은 충격을 받았다는 듯이 말이 없으셨어요. 탐초행에서 왜 노숙을 하겠어요? 마차나 말을 쓰지 않고 두 발로 걷거나 뛰어서 그렇죠.
하지만 이내 대공자님에서 그럴 리 없다며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설마. 하남까지 길이 얼마나 먼데?”
“확인해보셨어요?”
“.. 아버지라면.. 그럴 수 있어!”
대공자님을 확인을 위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아무래도 가주전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보시려는 모양이에요.
대공자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저는 대공자님께서 쓰시던 다기를 정리하고 방을 청소했답니다. 대공자님께선 금방 돌아오셨어요.
“마차 타고 간데!”
“축하드려요, 공자님.”
기쁜 어조에 저는 축하를 드렸답니다. 야숙만 보름, 얼굴엔 땟국물이 줄줄 흘렀던 제 탐초행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모시는 분이 기뻐하시니 시비답게 기뻐하는 마음을 애써 끌어올렸어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려고 하는 걸 꾹 참느라 힘들었답니다.
이런 저의 감정을 속된 말로 배알이 꼴린다고 하죠? 아! 이런 천박한 말 쓰면 안 되는데. 대공자님께 너무 물들었어요.
아무튼, 대공자님께선 저의 축하에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말씀하셨어요.
“나 좀 나갔다 올게. 저녁은 밖에서 먹을 거야.”
“어디 가시나요?”
“대장간.”
갑자기 대장간은 왜?
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공자님께선 의기양양한 미소만 지으시고는 더는 말이 없으셨답니다.
= = = = =
암철각. 당가의 최대 기밀기관으로 당가의 암기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 역사는 당가가 무림세가가 될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부족한 무력을 보완하기 위해 독을 사용하려다보니 자연히 암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분명 암기에 독을 같이 사용하는 것은 위력적이었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암기는 소모품이었고, 쓸만한 암기는 대부분 철이라는 점이었다. 즉, 비싸다는 말이다.
암기술의 달인이 되면 대충 뾰족하게 깎은 나무 꼬챙이, 심지어 길가의 풀잎도 암기로 쓸 수 있다지만, 당가의 모두가 그 정도로 암기술의 경지가 높지 않았기에 가문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쓸만한 암기를 지급해야 했다. 그리고 아무리 경지가 높은 당가의 무인이라도 좋은 암기를 써서 나쁠 리가 없잖은가? 오히려 고수일수록 좋은 무기를 보급해서 그 생존율을 올려야 했다. 가문의 무력을 대표하는 귀하신 몸이니까.
이리하여, 암기에 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암기에 독을 적용하는 기술을 기밀로 하기 위해서라도 당가 내에 자체적인 대장간을 두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세워진 곳이 바로 암철각. 뛰어난 야금술과 성능 좋은 암기에 미친 이들이 몸을 담는 곳이다.
그만큼 자부심이 깊은 암철각의 야장임과 동시에 당가회의 의원인 암철각주 당화정은 갑자기 찾아온 대공자의 요구에 어이가 없었다.
“뭐? 마차 개조?”
“네.”
고개를 끄덕이는 대공자의 태도에 당화정은 황당함을 감추고 대꾸했다.
“여기는 그러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중원에서 가장 철을 잘 다루는 곳 중 하나죠.”
대공자의 말에 당화정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철각이 안 만들어서 그렇지 만들기만 하면 웬만한 중원의 명공들 싸대기를 좌우상하로 갈길 수 있었다. 그것도 왕복으로.
당조혁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차에 판스프링을 달아주세요.”
“판 뭐?”
“거지 같은 중원의 길에서 마차의 흔들림을 완충해 주는 물건이요. 설계도는 여기에 있어요.”
당화정은 당조혁이 내민 그림을 훑어보았다. 대충 그렸지만 판 뭐시기라는 물건의 개념과 사용 방법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그림이었다.
“마차의 축과 마차사이를 탄성있는 철판으로 연결해 바퀴와 축으로 올라오는 충격을 완화하는 원리구나.”
“그거만 보이고 옆에 있는 이 쇼바는 안 보이세요?”
“쇼 뭐? 이거 그냥 부족한 결속력을 보완하기 위한 물건 아니냐?”
“아니에요. 그냥 철판만 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마차의 축은 축대로 흔들리고, 그 위에 달린 마차 몸체도 마구 흔들리고. 그건 쾌적한 여행을 원하는 당조혁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니, 충격을 흡수할 장치는 필수였다.
속에 기름을 채우고 기름의 점성으로 충격을 흡수한다는 장치의 개념을 들은 당화정은 감탄하면서도 고개를 저었으니, 당조혁은 재차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도전 정신을 자극할 만한 과제 아니에요?”
“도대체 암철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분명 네 설계는 참신하고 흥미롭지만, 암철각은 이런 거 하는 곳이 아니다. 무엇보다 네 설계는 너무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워. 돈도 많이 들고.”
탄성 좋은 철? 그건 곧 강철이라는 뜻이고 돈이 많이 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비싼 물건을 마차 하부에 설치한다고? 녹이 슬면? 대공자가 직접 기름이라도 바르고 정비라도 한다나?
쇼바인가 뭔가 하는 물건도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정교한 관을 만드는 품에 비해서 그 효용성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암철각주로서 효용성이 확실하지 않은 물건에 예산을 들일 수 없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었다.
당조혁은 그런 암철각주의 입장을 들었지만 먼길을 갈 엉덩이의 건강과 편안함을 위해서라도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이빨을 까기 시작했다.
“무림을 주파하며 사방으로 암기를 쏘아내는 마차. 실현되면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흐음. 괜찮군.”
“하지만 그런 마차가 있다고 합시다. 길을 질주하는 도중에 흔들리면 암기가 적중할 정확도가 어떨 것 같습니까? 마차의 흔들림을 줄이는 기술은 장차 당가의 꿈인 ‘당가비차(唐家飛車)’에 필수적입니다!”
당조혁은 그렇게 열변을 토해냈지만 당화정에겐 통하지 않았다.
“언제 당가에 그런 꿈이 생겼느냐?”
“목표가 없는데 어찌 발전이 있겠습니까?”
“그런 허황된 목표 아니더라도 우리 암철각은 골치 아픈 과제가 많다. 그리고 당가비차라는 물건에 굳이 흔들림 완화 장치가 필요하지도 않고.”
“어째서요?”
“고작 흔들리는 마차 위라고 암기를 못 맞추는 놈들을 당가비차라는 거창한 이름을 단 마차에 태우고 싶지 않다.”
“···.”
“무엇보다도 당가비차라는 걸 운용하려면 말로 끌고 가는 것보다 경공술이 뛰어난 무인들이 어깨에 짊어지는 가마의 형태로 만드는 게 더 운용의 폭이 넓어진다. 말로 끌고 다니면 길이 아닌 곳으로는 못 가지 않느냐? 그러니 판스프링인가 뭔가 하는 물건도 필요가 없지.”
여기까지 당화정의 논리가 전개되자, 당조혁은 일어나기로 했다. 광설이라고 불리는 혓바닥이지만 논쟁이 벌어지는 판이 도저히 유리한 점이 보지 않았다. 상대는 뼛속까지 장인 기질이 투철한 이이며 논쟁의 주제 역시 그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이지 않은가?
그래서 본질적인 부분을 직시하여 당조혁의 궤변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과연 당가 최대 기밀기관의 수장이라 할 수 있었다.
즉, 당조혁에겐 상성이 안 좋은 상대라는 의미였다.
“못한다니 할 수 없군요.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건강하세요.”
앞으로 영영 안 봤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들어있는 작별인사였지만 당화정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있었다.
“설계도의 형식이 생소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보기 더 편하구나. 다시 보니 투시법을 썼군. 앞으로 우리도 이런 식으로 설계도를 그려야겠어. 그리고 판스프링하고 쇼바라.. 우리 대공자가 이제보니 기관에도 재능이 있었군. 그러니 야금술에도 재능이 있겠어. 기관과 야금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중얼거리면서 대공자를 보는 뜨거운 당화정의 시선에 당조혁은 어디선가 아련하게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밀레~ 밀레~ 공밀레레레레~
당조혁은 당화정이 작별인사를 하길 기다리지 않고 얼른 포권을 하고 자리를 떴다. 다시는 암철각에 발을 들이밀지 않을 거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나자 부친이 불러 이런 말을 전했다.
“암철각주가 네게 야장 과정을 수료하게 하고 싶다더구나.”
그말에 당조혁은 눈을 껌벅이다가 물었다.
“혹시 수락하신 건 아니죠?”
“당연히 했지.”
당조혁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따졌다.
“아무리 소자가 탐탁지 않으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소자를 괴롭히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당옥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내가 널 공연히 괴롭히려고 수락했겠느냐?”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정말이지 넌 입으로 매는 버는 재주가 있구나.”
한 번만 더 복장 뒤집어지는 소리를 하면 회초리를 들겠다는 경고에 당조혁은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볼을 불퉁하게 과장될 정도로 부풀려 부친의 결정에 불만이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
당옥전은 큰 아들의 얄미운 짓거리에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고는 자신이 암철각주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를 설명했다.
“당가의 직계라면 암철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냥 진혁이 시키면 되잖아요.”
그 물음에 당옥전의 눈썹이 일그러졌으니, 말로 표현하자면 ‘이놈 봐라?’라 할 수 있었다.
“진혁이도 때가 되면 배울 테니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암철각이 돌아가는 방식을 굳이 화로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배울 필요는 없잖습니까?”
“넌 그럴 필요가 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남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고생하면 너의 그 괴팍한 사고방식이 조금은 교정 되겠지.”
“결국 소자를 괴롭히겠다는 말이잖아요.”
당조혁이 항의했지만, 당옥전은 큰 아들의 화법을 빌려 대꾸했다.
“아픈 만큼 성장하는 법이다.”
“.. 할 말이 없네요.”
당연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본인의 열변(궤변)에 애용하는 격언 아니던가?
당조혁은 부친의 화법에 대처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부친은 마냥 사람 좋은 호구, 아니 호인이 아니었고 큰 아들 놈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하아. 그럼 마차 개조나 허락해 주세요.”
“무슨 개조 말이냐?”
“하남까지 마차 타고 가면 엉덩이가 짓물러 질 걸요?”
“엉덩이가 걱정되면 두 발로 가면 되지 않느냐? 그게 싫다면 네 용돈으로 하렴. 말리지 않으마.”
“와아.. 치사합니다. 저만 가는 거 아니잖아요. 어린 진혁이의 엉덩이를 생각해보세요.”
당조혁 혼자 가는 게 아니었다. 무림대회 같은 큰 행사는 식견을 넓히기 좋아서 당진혁도 같이 가게 되었다. 가주인 당옥전은 당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지만 대신 당가의 정예가 포함된 무력대가 함께 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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