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序章), 떠도는 바람
석양이 지기 전, 붉게 물들기 시작한 드넓은 황야.
한 사람의 신형이 그곳을 폭발적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의 억센 풀이 가볍게 흔들렸다.
초상비(草上飛), 그리 보였다.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나.’
휘날리는 흑색의 도포, 격렬하게 흔들리는 장발의 말총머리.
도태평이 허리춤에 맨 도집에 손을 툭 얹으며 중얼거렸다.
“기다리기만 할 순 없잖아.”
무림맹(武林盟)이 득실을 따질 때, 그는 적을 쫓아 움직였다. 아무런 힘이 없던 시절부터 그의 칼끝이 향했던 곳.
‘야율수라군(耶律修羅軍).’
그 이름만 떠올려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풍기는 듯했다. 한때 중원을 공포로 물들였던 학살자들. 그들의 잔인한 손속은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았다.
야율수라군은 태평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원흉이었다.
“....빌어먹을.”
태평은 지나가는 옛생각에 살심이 끓어올랐다. 오랜 인연인 개방의 취오(醉吾)가 정보를 넌지시 건네 주었다. 야율수라군의 소규모 부대가 근처에 와있다고 말이다.
“진짜였네.”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이 누군가를 포위하고 있었다.
흑빛 갑주와 흑갈색의 투구 장식, 그리고 창과 검을 움켜쥔 역동적인 태세. 어렸던 그의 머릿속에 공포로 각인되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거리가 금세 가까워졌다.
이 섬광같은 속도는 그의 특이한 경공술 덕분이었다. 저들은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직 완성하지 못했지만······.'
지척에 등을 보인 야율수라군의 병사.
그 뒤에 사뿐히 내려섰다.
쉬이익!
망설임 없는 그의 칼날이 일순 번뜩였다.
'...일개 병사 정도야.'
병사는 뒷목에 선명한 혈선이 그어졌고, 머리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로 인해 벌어진 상처에서 핏줄기가 터져나왔다.
머리를 잃은 몸이 앞으로 서서히 넘어갔다.
쿠웅!
발밑에서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길게 뻗은 도(刀)를 휙 털어 올리자, 그 먼지는 둥글게 퍼져 희미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태평의 안광에는 절제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일순, 그의 몸 주위로 검푸른 무언가 일렁거렸다. 태평은 흥분으로 가슴께까지 차오른 호흡을 한 번 가다듬어야 했다.
“후우.”
저들 사이에 포위된 자는 중갑을 찬 중년.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뿜어내는 위용이 평범한 병사는 아닌 듯했다. 주위에는 중년의 동료로 보이는 시체들이 굴러다녔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태평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년의 시선을 받으며 태평은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남은 적은 다섯.
“웬 놈이냐!”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야율수라군의 병사들은 다시 한번 창을 고쳐잡았다. 이미 피에 붉게 절여진 저들의 저릿저릿한 살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태평은 무심히 답했다.
“저승사자.”
그 말에 공기조차 무겁게 가라앉았다. 병사들은 이게 무슨 개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쓱해진 태평이 어깨를 으쓱였다.
“재미 없어도 표정 좀 풀자.”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그의 발을 주시하고 있던 창병 하나가 바로 돌진해 온다.
“약해빠진 중원 놈이!!”
그때.
가라앉았던 공기가 단칼에 찢겼다.
태평이 있던 자리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쳤고, 병사는 다리를 멈추고 한 팔을 들어 눈을 보호했다.
“바람······!?”
불어오던 기류가 흩어지자, 팔을 내려 앞을 확인한 병사의 눈동자가 혼란 속에 흔들렸다. 그 잠깐 사이 태평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창대를 꽉 움켜쥔 손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어디로...?’
병사가 태평의 자취를 찾아 황급히 두리번거리던 그 순간.
바람처럼 병사의 후방에 스르르 모습을 드러낸 태평이 노을빛을 담은 칼날을 홱- 휘둘렀다. 그 주황 빛살이 반듯한 반원을 만들어냈다.
서걱!
병사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고 붉은 선혈이 그것을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길게 흩뿌려졌다. 공중에 뜬 병사의 눈은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 깜빡거리며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잠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하지만 상대도 산전수전 다 겪은 야율수라군의 병사들.
고요한 시간은 찰나였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없이 태평을 둘러싸고 창을 들이댔다.
높게 솟았던 병사의 머리가 뒤늦게 툭 떨어져 내렸다.
그 소리와 함께 태평이 날아드는 창의 틈을 꿰뚫고 적을 향해 빠르게 쏘아져 갔다. 쏟아지는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옷자락을 베었다.
결국 야율수라군이 내지른 창격 하나가 그의 뺨을 긁으며 창끝에 핏방울이 맺혀 나왔다.
하지만 태평의 눈은 감정이 없는 듯 덤덤하다.
채앵!
태평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창 하나를 옆으로 쳐냈다. 빗발치는 창의 공세를 그는 기민한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흘려내기 시작했다.
시식! 샤샤샥!
그 몸놀림에 한 병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이딴 개같은 경신법(輕身法)이······!!”
마치 형체 없는 무언가를 찌르는 느낌.
정신없이 파고드는 병사들의 창끝이 한 곳으로 교차하는 순간, 잠잠하던 태평의 칼날이 번개처럼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슈아아악!
병사 셋이 한꺼번에 끅 하는 소리를 내며 목을 부여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피가 콸콸 뿜어져 나왔고 그들은 고통에 몸을 뒤틀다 이내 쓰러졌다.
남은 적은 하나.
태평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움직이더니, 마지막 남은 병사에게 가서 꽂혔다.
그 병사는 태평과 눈을 마주치자 흠칫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적수. 지면을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태평을, 병사는 절망 어린 눈빛으로 그저 응시할 뿐이다.
그렇게 다가온 태평은 놀랍게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병사가 칼칼한 고함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창을 휘둘렀다.
“으아아악!!”
그 순간, 닫혀 있던 태평의 눈이 가늘게 열렸다.
“..세 번째 바람, 연운(煙雲).”
그 속삭임이 오싹하게 병사의 귀를 파고 들었다.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이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간다.
그것은 치열했던 병사의 삶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 * *
세상이 아직 꺼지기 전.
오래전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거란족 일부 부족을 통해 전해져 오는 이야기.
- 동쪽에서 바람과 닮은 자를 만난다면 반드시 도망쳐라.
병사는 억울했다.
‘여긴 서쪽인데······.’
* * *
고요한 들판.
들판 한가운데 타오르는 모닥불이 어둠을 밀어냈다. 그 흔들리는 불빛이 갓 만들어진 십여 개의 무덤을 비추고 있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 고맙네. 함께 동료의 넋을 위령해 준 것도 말일세."
모닥불을 응시하던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타오르는 불길이 그의 두 눈동자에 일렁였다.
나뭇조각을 불 속에 던져넣던 태평이 담담히 답했다.
“도움을 드렸다니 다행입니다."
중년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마주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혹, 야율수라군을 모르는 건가?”
태평의 낯빛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무인으로 구성된 요나라의 정예 군대. 그들의 대장 격인 다섯의 호장은 중원의 장문인 급이거나 그 이상. 그리고 정점에 괴물같은 놈 하나. 그들의 손에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죠. 놈들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흥분해서 말하는 태평을 보며 중년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사연이 있어 보여 슬며시 눈을 감았다.
태평은 깊은 한숨을 후- 하고 내쉬며 끌어오른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른 모습이었다.
그가 겸연쩍게 입을 뗐다.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닐세. 어찌 보면 나도 자네와 같은 처지라네.”
주변에 보이는 동료들의 무덤이 그 말을 반증했다.
전란의 시대.
청년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야율수라군을 도륙한 그의 무위는 실로 가공할 만했다.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무위.
‘이 청년이 대업(大業)에 가세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지 않던가. 생각을 마친 중년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자네 말대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정말 많았지. 실례가 아니라면 고향이 어딘지 물어도 되겠는가?"
마음을 다스리던 태평이 잠시 멈칫했다.
정체 모를 이 중년의 질문에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아련했다. 태평이 품 안에 슬쩍 손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잊지 못할 곳이죠.”
잠시 후, 그의 손에 꺼내진 건 나무패가 달린 목걸이였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떠오르는 소중한 얼굴들.
그리고.
역겨운 피비린내, 붉게 물든 마을, 곳곳에 널브러진 날붙이들.
그는 살기 위해 어린 두 발로 달려야 했다.
과거에 잠겨있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평은 그것을 감추려 눈을 지긋이 감았다.
“구도진(孤岛镇). 이 일을 끝낸다면, 언젠가 돌아가고 싶네요.”
오래된 화첩(畫帖)을 들추듯, 태평의 심상이 십여 년 전 모든 이야기의 첫 장으로 빠져들었다.
정겹고 그리운 첫 장.
그 따스했던 그림에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젖은 얼룩은 이내 붉게 차올라 흰 바탕 위로 스르륵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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