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흔비록 : 바람을 머금은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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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나무
작품등록일 :
2025.03.2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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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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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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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4화. 황보세가를 찾아서(2)

DUMMY

태평은 갑작스러운 구타에 정신이 아득했다.


‘제남은 원래 이런 곳인가.’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살폈지만, 야율수라군이나 황보성 같은 압도적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방심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공 같은 게 없는 사람도 남을 해칠 수 있다는 걸 방금 깨달았다.


자신을 귀신(鬼神)이라고 부르며 도망간 건 이상했지만, 분해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감각을 느끼긴 했다.


태평은 손등으로 입을 훔치고, 바닥을 짚어 일어났다.


옆을 보니 덩치 큰 아이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같은 처지라고 연민이라도 느낀 걸까.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맹해 보이는 아이였다.


그를 보자 아버지 만복이 떠올랐다. 생김새가 무척 닮았다.


피식.


태평은 괜스레 웃음이 났다. 이제 신파가 지겨워, 그만 이 골목을 떠나기로 했다. 뒷골목을 벗어나려 발걸음을 옮기자, 뒤에 있던 덩치 큰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조, 조심해···. 여기 위험해···.”


태평은 멈칫해서 자리에 섰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너도 조심해.”


“으.. 응.”


태평은 덩치 큰 아이의 마음 씀씀이에 기분 좋게 뒷골목을 나섰다.


뒷골목을 나서자, 다시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는 인파 속에서 두리번거리다 지나가는 한 남자를 잡고 물었다.


“아저씨! 혹시 황보세가가 어디쯤인가요?”


“이놈아. 바쁘니깐 저리 비켜!”


그는 신경질적으로 태평을 툭 밀어내고 갈 길을 서둘렀다.


‘여긴 다들 화가 나 있네···.’


태평은 정신없이 오가는 인파 속에서 갈 길을 못 찾고 배회하다가 인심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보여 얼른 다가가 물어보았다. 그녀는 허리를 들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큰 길 쪽이었다.


“황보세가는 말이다, 저기 큰길 따라 쭈욱 가면 나온단다, 아가야.”


태평은 그 말에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으응.”


허리를 토닥이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할머니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묵묵히 큰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큰길에 닿자, 대도시의 번잡함이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저마다의 가게 앞에서 물건과 먹을거리들을 팔고, 행인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길을 바쁘게 지나쳤다.


태평은 밥을 못 먹은 지 조금 오래되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유운루(留雲樓)라는 객점으로 들어갔다. 돈이 많진 않지만, 요깃거리 해결할 정도는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자리에 앉자, 콧수염이 긴 아저씨가 찾아와 주문을 받았다.


“오늘 가능한 식단 적어두었으니 보고 고르거라.”


점소이는 이 어린아이의 행색을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보고 한 눈에 분석했다.


‘돈 없음.’


태평은 나무판 위에 적힌 식단을 보다가 손을 살짝 들면서 말했다.


“그냥 싸고 양 많은 걸로 주세요.”


‘역시.’


장사경력 스무 해, 이제 손님들의 주머니 사정이 눈에 훤히 보인다.


“그래~ 제일 싼 건 기장밥에 장국 한 그릇, 그게 전부야~”


“부탁합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게 되어 태평은 기대 중이었다.


구도진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토끼 육포와 간간이 길가에 자라난 열매, 그리고 물만 마시며 지내왔다. 그래서 그런지 구도진을 떠날 때보다 몸이 야위어 있었다.


점소이가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시야에서 금세 사라졌다. 그가 요리까지 겸하는 모양이다.


가게 안은 빈자리가 많았는데, 내부가 허름한 게 이름만 근사한 객점같았다.


‘대도시는 역시 만만찮구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이런 목 좋은 자리에서도 장사가 잘되기는 어려운 거 같았다.


들어서면서 본 바로는, 이곳의 객잔과 음식점들은 전장과도 같았다. 호객에서 밀리면 곧장 나락으로 떨어질 듯한 치열함이 길목마다 서려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점원이 음식을 내왔다. 그는 식탁 위에 기장밥과 장국을 조심스레 두고 돌아섰다.


“맛있게 드셔~”


“감사합니다.”


태평은 앞에 있는 음식들을 보고 눈을 빛내면서 입을 벌렸다. 벌린 입안으로 침이 고였다.


곧바로 기장밥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


“앗.”


맛있게 씹으려던 태평은 입안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잠시 멈췄다. 뒷골목에서 맞았던 안쪽 볼이 음식에 닿자 쓰라렸던 것이다. 하지만 태평은 개의치 않고 마구 씹었다.


피 맛이 섞이는 듯했지만, 그의 위가 밥을 미친 듯이 부르고 있었다.


“냠냠, 쩝쩝.”


씹을 때마다 은근한 통증이 퍼졌다. 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런 뒷골목 잡배들한테 두드려 맞는건, 이제 말이 안 돼.’


태평의 목표는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의 눈길이 바닥에 둔 행낭에 닿았다.


그 안에 있는 목함.


어머니의 유품, 창업 군주의 무공.


그녀가 말을 아껴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사람을 해치는 물건이라 했다. 그것은 태평이 원하던 바였다.


그렇게 믿었기에,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강해질 욕심을 품을 수 있었다.


태평은 순식간에 밥을 다 비우고 장국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 꿀꺽! 햐···.”


조금 부족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해서 배를 두드렸다.


‘얼른 황보세가에 가서 글을 알려달라 부탁해 봐야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행낭을 다시 들쳐멨다.


“잘 먹었습니다!”


“또 오셔~”


점원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길가로 나와 황보세가로 가는 길목을 바라봤다.


‘와,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적응이 안되네.’


주로 행인, 장사꾼들이 많았고 허리춤에 무기를 찬 사람들도 제법 눈에 보였다. 무기를 찬 사람들은 걸음걸이가 허세에 차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들을 피하며 걸었다.


‘강호인들도 많구나.’


수많은 인기척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진 태평은 일부러 다른 것에 집중하며 걸었다. 다른 것에 집중하면 사람들이 일으키는 흐름들이 희미해져, 머리가 덜 아팠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걸었다. 푸른 하늘에 듬성듬성 떠 있는 조각구름들이 예뻐 보였다.


“하늘 참 좋.. 읍!?”


그때 누군가 태평의 입을 강제로 막았고, 그대로 들쳐매고 달리기 시작했다.


태평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읍! 읍!!”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입을 막은 단단한 손이 얼마나 거센지 턱이 빠질 거 같았다.


발을 땅에 닿게 하고 싶어, 발버둥 치며 억지로 내려 보는데 닿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니 인파가 많아 태평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문득 몸을 움켜쥔 팔이 엄청 딴딴하단 걸 깨달았다.


‘!!’


기의 흐름에 집중하니 자신을 잡은 자에게서 내공이 흘러나왔다. 괴한의 팔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정신이 확 들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잡혀가는 와중에 저 멀리 인파 속, 조금 전 뒷골목에서 보았던 덩치 큰 아이가 보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쳐다 보더니, 이내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태평은 간절하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어디가! 좀 도와줘! 이 나쁜놈···.’


* * *


“으윽!”


또다시 뒷골목으로 끌려와서 길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이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자신을 때렸던 패거리들이었다.


바로 눈앞에는 약관(弱冠) 정도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혀를 내밀며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태평을 내려다봤다.


“캬하! 귀신이라길래 궁금해서 와봤더니, 그냥 시골 병신이잖아?”


태평은 몸을 일으키며 도망칠 틈을 살폈고,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했다.


“아, 진짜 조금 전에는 이상했다니까. 형!”


약관의 사내는 춘팔의 형인 춘삼이였다. 제남의 흑룡파는 창설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최근 강호인들을 흡수하며 점점 규모를 크게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는 일도 없이 보호세 명목으로 여러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 집단이었다. 돈을 안 주면 행패를 부려 최근 제남에서 골칫덩어리였다.


춘삼은 몇 년 전 흑룡파의 일원이 되었고, 본래 흑룡파 내부에서 잡일을 하다가 며칠 전부터 뒷골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뒷골목에 나온 후, 이 근방의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그냥 애새끼인데.”


태평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돌아 달렸다. 또래 중에서 달리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기습적으로 뛰면 못 쫓아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과는 달리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이 위험을 알려주었다.


‘피해···’


퍽!


“꺼헉!!”


태평은 허리를 향하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몸을 틀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강한 충격이 밀려오자,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나뒹굴며 바닥에 몇 바퀴 굴렀더니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돌바닥이라 통증이 심했다.


‘....!’


태평은 쓰러진 채 자신을 발로 걷어찬 자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 그 아이들과는 격이 다른 듯했다. 춘삼은 무릎을 올려 발을 땅바닥에서 뗀 채, 태평을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딜 도망치려고 새끼가.”


“왜 때리는 거야?”


태평은 분노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말이.. 짧네?”


뻐억!


다짜고짜 때리는 바람에 태평은 얼굴을 정통으로 차여 뒤로 나자빠졌다.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코에서 찡한 감각이 들더니 이내 코피가 찔끔 흘러내렸다.


“오, 뭐를 이렇게 많이 싸고 다닐까?”


그는 태평의 행낭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 하지 마!!”


깜짝 놀라 몸을 던졌지만, 춘팔이 먼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짜고짜 주먹을 뻗어왔다.


‘보인다!’


휙!


태평은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이 새끼가?”


연이어 날아온 춘팔의 팔꿈치가 복부를 강타했다.


“윽..”


태평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눈앞에서 땅에 방울져 떨어져 내린다.


“피하면 안 맞을 줄 알았어? 키킥.”


“귀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키득거리는 형제의 조롱 섞인 웃음에, 태평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태평을 힐끗 본 춘삼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가 행낭 깊숙이 팔을 넣으며 중얼거린다.


“뭐가 있길래 그리 발작을··· 음?”


‘저긴 목함이···’


태평은 망연자실했다. 다리가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손 떼!!”


화가 치밀어 오르며 힘겹게 소리쳤다. 이러려고 구도진을 떠났나?


이건 정말··· 정말 아니잖아!


“제발···.”


탁탁탁탁!


그때, 어디선가 빠른 발소리가 울리자, 골목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춘삼 역시 행낭을 뒤지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고, 태평은 배를 부여잡은 채, 숨을 몰아쉬며 발소리가 난 곳을 올려다봤다.


골목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아까 그 덩치 큰 아이였다.


“뭐야!! 척척이!”


괜히 누가 올까 쫄았던 춘팔이 덩치 큰 아이를 확인하자 신경질적으로 나섰다.


“아직 덜 처맞았냐? 앙!?”


춘팔이 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덩치 큰 아이에게 다가가도,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자신이 달려왔던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헥.. 헥···.”


“대답 안 해? 이 새끼가 돌았···”


“동작 그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춘팔의 말을 뚝 끊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춘팔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곧이어 벽 모퉁이로 한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빛깔의 자색(紫色) 비단옷을 입은 여자아이였다.

커다란 눈, 하얀 피부, 작은 입술, 양옆으로 둥글게 말아 묶은 머리.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뒷골목에 있던 아이들을, 먹잇감을 노리듯이 스윽 훑어봤다. 그녀의 모습을 살핀 태평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동시에 눈물 맺힌 안도의 미소가 스쳐 갔다.


그녀를 보니 괜스레 안심이 된다.


“야! 우리 척이 친구 어딨어?”


그녀는 황보선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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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7화. 무창(武昌)(3) NEW +2 16시간 전 69 6 13쪽
57 56화. 무창(武昌)(2) +2 25.05.19 108 9 14쪽
56 55화. 무창(武昌)(1) +2 25.05.17 173 7 13쪽
55 54화. 취호객잔(3) +4 25.05.16 171 9 12쪽
54 53화. 취호객잔(2) +2 25.05.15 177 10 15쪽
53 52화. 취호객잔(1) +2 25.05.14 185 9 13쪽
52 51화. 군집하는 백도들(3) +2 25.05.13 193 9 14쪽
51 50화. 군집하는 백도들(2) +4 25.05.12 204 9 12쪽
50 49화. 군집하는 백도들(1) +2 25.05.11 215 9 11쪽
49 48화. 혈혼단(血魂丹) +2 25.05.10 232 10 13쪽
48 47화. 수상한 절(5) +2 25.05.09 225 11 14쪽
47 46화. 수상한 절(4) +2 25.05.08 228 11 14쪽
46 45화. 수상한 절(3) +2 25.05.07 267 12 12쪽
45 44화. 수상한 절(2) +2 25.05.06 256 12 13쪽
44 43화. 수상한 절(1) +2 25.05.05 294 11 13쪽
43 42화. 수도 개봉(3) 25.05.04 306 9 14쪽
42 41화. 수도 개봉(2) 25.05.03 319 8 14쪽
41 40화. 수도 개봉(1) 25.05.02 332 10 12쪽
40 39화. 강호행 25.05.01 331 11 12쪽
39 38화. 이제 그만 나가자 25.04.30 330 11 13쪽
38 37화. 자라난 아이들 25.04.29 335 11 13쪽
37 36화. 작별,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25.04.28 343 11 13쪽
36 35화. 내단 내놔! 25.04.27 353 10 12쪽
35 34화. 성장의 하루하루 25.04.26 341 10 13쪽
34 33화. 용린어 25.04.25 353 10 12쪽
33 32화. 흉도가 들끓는 천하 +2 25.04.24 368 10 13쪽
32 31화. 풍흔비록(風痕秘錄) +4 25.04.23 378 9 14쪽
31 30화. 척이, 제자가 되다 +2 25.04.22 346 10 13쪽
30 29화. 파천권객(破天拳客) 25.04.21 355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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