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흔비록 : 바람을 머금은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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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나무
작품등록일 :
2025.03.28 12:33
최근연재일 :
2025.05.1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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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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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7화. 황보산장에서의 나날

DUMMY

“아빠는 조만간 돌아오겠지, 뭐.”


황보선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과통 쪽으로 가볍게 걸어갔다. 곧이어 황보선아가 접객실로 들어가는 걸 봤는지, 중년의 기품 있는 여성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녀는 황보선아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손님과 함께 자리에 앉으시지요. 다과는 제가 내놓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황보선아는 부리나케 접객실 식탁 앞에 앉으며 태평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길에 태평은 강제로 자리에 앉혀졌는데, 악력이 웬만한 남자보다 센 거 같았다.


“너 냄새 난다. 이따가 좀 씻어야겠네.”


태평이 순간 움찔하며 너덜너덜한 자신의 옷깃을 슬쩍 잡았다.


“으.. 으응, 열흘을 제대로 못 씻어서 그래···”


태평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괜찮아! 처음 봤을 때보단 지금이 더 깨끗해!”


그녀는 태평의 등을 팡팡 두드렸는데, 손이 엄청 매워서 피하고 싶었다. 황보선아가 손을 멈추고 문득 태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 별일···”


안부를 물으려던 황보선아는 멈칫했다. 태평의 부모가 떠오른 것이다. 동시에 태평도 그것을 느꼈는지, 순간 접객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여기, 쌀쌀한 가을이니 따뜻한 용정차(龍井茶)를 내왔습니다. 향이 좋으니 한번 드셔보세요.”


“어··· 어···. 고마워요, 아줌마.”


황보선아는 냉큼 차를 받아 들곤 태평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마음을 태평도 느꼈을까?


태평도 차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그녀 앞에서 활짝 웃었다.


“이번 일도 그렇고, 저번 일도 정말 고마웠어.”


황보선아는 밝게 웃는 태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많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별거 아니야.”


따뜻한 차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중년 여성이 둘 사이에 접시를 놓고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접객실을 빠져나갔다.


태평은 매고 있던 행낭을 그제야 바닥에 내려 두었다.


접시 위엔 동그란 모양의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이 있었는데, 태평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황보선아는 그걸 보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호두경단!!”


그녀는 호두경단을 한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태평이 그녀가 먹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황보선아가 뭐 하냐는 듯이 손짓했다.


“냠냠, 너듀 머고바.”


그녀의 손짓에 태평의 시선이 호두경단으로 가서 멈췄다. 꾀죄죄한 손을 뻗어 경단 하나를 들고 황보선아처럼 한입에 쏙 넣었다.


“!!!!”


한입 한입 턱을 움직일 때마다 태평의 표정이 점점 황홀해졌다.


“냠냠.. 와! 이거! 쩝쩝.. 진짜 맛있는데!?”


태평은 입안 가득 경단을 연거푸 넣으며 정신없이 먹었다.


그런 태평에게 질세라 황보선아도 경단을 연달아 입에 넣더니 더욱 먹는 데 집중했다. 이따금씩 용정차로 목을 축였지만, 물 마시듯 하는 걸 보니 둘 다 차를 음미할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태평은 경단을 먹다가 여유가 생기자,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에 대해 말을 꺼냈다.


“냠냠, 선아야. 너 글자 알아?”


한참 맛있게 먹던 황보선아가 입안의 경단을 어느 정도 넘기고 답했다.


“글자? 당연히 알지. 왜?”


태평은 용정차를 한 모금 마시다 내려놓고 말했다.


“나 글자 좀 알려줄 수 있어?”


태평이 말하는 사이 황보선아는 그새 오른쪽 볼에 경단을 한가득 밀어 넣고 있었다. 태평의 말뜻을 생각하던 황보선아의 오물거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경단을 씹으며 태평을 바라봤다. 태평도 자연스레 마주 봤다.


‘다람쥐 같네, 귀엽···.’


상상을 멈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답 없는 그녀의 태도에 초조해진 태평이 말했다.


“나 여기서 지내면서 일 열심히 할게. 나 일 잘해! 정말이야, 밥값 꼭 할 테니까··· 그러니까 나 좀 지내게 해줘!”


하지만 그의 호소에도 그녀는 대답 없이 골똘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볼에 경단을 가득 채운 채 침묵하는 황보선아를 보자, 태평은 점점 더 안달이 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황보선아는 경단을 꿀꺽 넘기더니, 어눌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움.. 넌 바보인 거야?”


태평의 눈이 둥그레졌다.


“으응?”


그녀는 의자 뒤로 몸을 누인 채 팔짱을 꼈다.


“흐음, 어떻게 글자를 몰라?”


그녀의 황당하다는 태도에 태평은 더 황당했다.


글자를 모르는게 이렇게 황당해 할 일이었나?


태평은 볼이 화끈 달아오른 채, 두 손을 허우적댔다.


“나, 난 어릴 때부터 수영도 하고, 잠수도 하고, 장사도 잘하고···.”


그의 말에 황보선아는 시큰둥했다. 그러자 태평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조.. 조개도 잘 잡아!!!!!”


그의 목소리가 황보산장 접객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주변을 지나가는 가노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춰 섰다. 잠시 벙한 표정이던 황보선아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태평은 얼굴이 빨개진 채, 황보선아의 눈치를 살폈다. 둘의 눈빛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꺄~~~하하핫!!”


황보선아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태평은 그런 황보선아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뜨거운 용정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앗, 뜨거!”


한참을 웃어 눈가에 눈물이 맺힌 황보선아가 말했다.


“나 조개 좋아해!! 넌 오늘부터 우리집 전용 조개 사냥꾼이다!!”


“에...?”


갈길을 멈췄던 가노들이 다시 움직였고, 새빨개진 태평의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황보선아가 장난스레 말했다.


“근데 그 전에.”


“응···?”


그녀가 손가락으로 태평을 가리켰다.


“너 너무 약해.”


태평은 눈을 모아 황보선아의 손가락 끝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런 뒷골목 애들한테 맞고 다니기나 하고.”


태평은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싸움 한 번도 안 해본걸.”


“그래서? 계속 그렇게 약할 거야?”


순간 태평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벌떡 일어나 난데없이 소리쳤다.


“아니이—!!!!”


의자에 반쯤 누워 편하게 이야기하던 황보선아가 깜짝 놀라서 몸을 바로 세웠다.


“아우 씨! 깜짝이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쪽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황당한 듯 코로 숨을 크게 뿜었다.


황보선아는 왠지 이 놀람이 익숙했다.


‘전에도 이랬던 거 같은데.’


태평은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주먹을 꽉 쥐고 씩씩댔다.


“.....”


황보선아는 그런 태평을 올려다봤다. 자기 말이 심했나 돌이켜보기 시작할 때 태평이 입을 열었다.


“나 약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약한걸.’


황보선아는 태평이 또 소리칠까 무서워 속으로만 생각했다. 태평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정말 강해지고 싶어. 그러려면 글자를 배워야 해.”


“글자 배운다고 강해져?”


“응, 아마···.”


확신없는 태평의 말에 황보선아가 역정을 냈다.


“아니, 글자 공부하면! 무슨! 글자로 사람 팰 거야?”


이유를 모르는 황보선아에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공서적 이야긴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아니지만 글자를 공···”


“됐고!!”


이번엔 황보선아가 크게 소리쳤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힘을 주고 태평의 이마에 검지손가락을 댔다.


‘으휴, 다 터져가지곤.’


엉망이 된 태평의 얼굴에 속상한 황보선아였다. 그리고 그녀는 태평을 향해 훈계조로 말했다.


“이제 나랑 같이 수련해.”


“응...?”


“나랑 같이 수련하자구.”


“어떤.. 수련?”


“내공! 무공! 권법! 그런 거.”


태평은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니가 가르쳐주는 거야?”


황보선아는 눈을 살짝 감은 채 목을 살살 긁으며 끄덕였다.


“글자도 가르쳐주는 거야?”


“음!”


황보선아가 입가를 내려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제야 태평이 기뻐하며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와!! 정말? 진짜야!?”


갑자기 손을 잡혀 깜짝 놀랐던 황보선아는 너무나 기뻐하는 태평의 얼굴에 내심 뿌듯했다.


“그렇다니까.”


태평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정말···.”


“히히, 글도 무공도 열심히 하자.”


“응!!”


황보선아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부모를 잃고 자신을 찾아올 때 어떤 마음으로 왔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겨우 놀러 오라는 한마디에···.’


그만큼 갈 곳이 없었단 소리겠지.


황보선아는 태평을 이런 식으로라도 달래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빛나는 눈으로 황보선아를 바라보던 태평이 물었다.


“근데, 넌 외동이야?”


“아니. 왜??”


“다들 널 공주님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서.”


“흠··· 그런 사람이 많긴 한데, 외동은 아니고···.”


그녀는 뜸을 들이다, 자신의 볼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혓바닥을 살짝 내밀었다.


“귀여운 막내야!”


“.....”


“.....”


당연히 호응해 줄줄 알았던 태평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민망해진 황보선아의 주먹이 나갔다.


퍽.


“억!!”


복부에 전해진 충격에 태평의 허리가 반사적으로 꺾였다. 그는 배를 움켜쥔 채 고통을 삼키고 간신히 입을 뗐다.


“왜··· 때려···.”


“흥!”


황보선아란 아이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아이라고, 태평은 생각했다.


“언니 하나랑 오빠 둘이 있어.”


그녀는 양쪽으로 말아 올린 자신의 동그란 머리를 매만지다가, 자리에 앉아 용정차를 홀짝였다.


조신한 척, 차를 음미하는 그녀를 보던 태평이 부러운듯 입을 열었다.


“좋겠다, 난 혼자라···.”


“좋기는! 언니는 시집가고, 첫째 오빤 공부하고, 둘째 오빤 맨날 사고 쳐서 아빠가 쫓아냈다구!”


그녀는 한쪽 볼에 손을 대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 집에 믿을 건 나뿐이야.”


황보선아의 눈에 의지가 충만하다.


‘믿음직스럽긴 해.’


그녀는 매우 당차고, 직설적이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아이였다. 태평은 그녀의 성격이 부러웠고,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태평의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골똘히 생각했다.


이제 현실적인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급한 일을 떠올렸다. 이 아이에게 방을 줘야 한다.


가노들의 숙소가 있지만, 그곳에 함께 살게 한다면, 서운해할 거 같아 손님방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력은 빨랐다.


마음을 정하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태평은 졸졸 따라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태평은 혼자 덩그러니 작은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


행낭을 메고 방안을 둘러보는 태평에게, 바깥에서 황보선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 다 풀고 씻어! 냄새나니까~”


“굳이 그 말을···.”


태평은 투덜대면서 자신의 방을 여기저기 살펴봤다. 서랍과 가지런히 개어있는 침구류 외엔 아무것도 없이 깔끔하고 단출한 방이었지만, 공연히 뭉클해졌다.


“우리 집 만한 방이네···.”


구도진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방의 크기와 비슷할 정도라 태평 혼자 지내기엔 크게 느껴졌다.


‘어머니, 아버지도 계셨다면···.’


잠시 상념에 빠져 들었다가, 고개를 저어 다가오는 슬픈 감정을 애써 물리쳤다. 그리고 방안을 물끄러미 둘러보았다.


문득 자신의 방이라니 벌써 정이 들기 시작한 태평이다.


조심스레 행낭을 풀었다.


목함을 슥슥 쓰다듬다가,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고, 그 위를 헝겊으로 덮었다.


“글자 배우면 다시 보자.”


목함에 괜스레 말을 한번 걸어 본 태평은, 곧 서랍을 닫았다. 저 안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저 책이 별거 없다면, 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서랍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태평은 몰랐다.


훗날, 저 무공서에 절을 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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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55화. 무창(武昌)(1) +2 25.05.17 111 6 13쪽
55 54화. 취호객잔(3) +4 25.05.16 136 8 12쪽
54 53화. 취호객잔(2) +2 25.05.15 153 9 15쪽
53 52화. 취호객잔(1) +2 25.05.14 159 8 13쪽
52 51화. 군집하는 백도들(3) +2 25.05.13 168 8 14쪽
51 50화. 군집하는 백도들(2) +4 25.05.12 179 8 12쪽
50 49화. 군집하는 백도들(1) +2 25.05.11 191 8 11쪽
49 48화. 혈혼단(血魂丹) +2 25.05.10 204 9 13쪽
48 47화. 수상한 절(5) +2 25.05.09 201 10 14쪽
47 46화. 수상한 절(4) +2 25.05.08 207 10 14쪽
46 45화. 수상한 절(3) +2 25.05.07 244 11 12쪽
45 44화. 수상한 절(2) +2 25.05.06 234 11 13쪽
44 43화. 수상한 절(1) +2 25.05.05 274 10 13쪽
43 42화. 수도 개봉(3) 25.05.04 285 8 14쪽
42 41화. 수도 개봉(2) 25.05.03 300 8 14쪽
41 40화. 수도 개봉(1) 25.05.02 307 9 12쪽
40 39화. 강호행 25.05.01 308 10 12쪽
39 38화. 이제 그만 나가자 25.04.30 310 10 13쪽
38 37화. 자라난 아이들 25.04.29 314 10 13쪽
37 36화. 작별,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25.04.28 322 10 13쪽
36 35화. 내단 내놔! 25.04.27 333 9 12쪽
35 34화. 성장의 하루하루 25.04.26 320 9 13쪽
34 33화. 용린어 25.04.25 331 9 12쪽
33 32화. 흉도가 들끓는 천하 +2 25.04.24 343 9 13쪽
32 31화. 풍흔비록(風痕秘錄) +4 25.04.23 354 8 14쪽
31 30화. 척이, 제자가 되다 +2 25.04.22 327 9 13쪽
30 29화. 파천권객(破天拳客) 25.04.21 333 10 13쪽
29 28화. 짐승과의 조우 25.04.20 324 11 12쪽
28 27화. 태산으로 25.04.19 343 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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