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풍흔비록(風痕秘錄)

그렇게 셋의 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위진풍은 본래 조만간 귀주로 돌아갈 작정이었으나, 이곳은 무공 수련에 있어 보기 드물게 완벽한 장소였다. 그는 척이를 데리고 나가기보단,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남기로 했다.
그것이 제자의 성장에 유리할 것 같았다.
계속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태평은 두 팔을 들고 환영했다.
‘정말 다행이야.’
이곳 공터 중, 입구와 가까운 큰 동굴을 위진풍과 척이가 쓰기로 했고, 작은 동굴을 태평이 쓰기로 했다.
큰 동굴은 둘이 눕고도 충분히 자리가 남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작은 동굴은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았다.
태평이 행낭에서 목함과 함께 자신의 물건들을 꺼내 구석에 밀어 넣고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바닥에 철푸덕 누워보았다. 발이 가까스레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나, 비가 내리면 젖을 듯하다.
‘이거 손을 좀 봐야겠구나.’
나중에 동굴을 좀 더 살기 좋게 꾸며야겠다고 생각한 태평이었다. 이곳에서 최대한 힘을 길러야 한다. 목표는 이미 황하를 건너기 전에 정했다.
가장 기억에 각인이 된 건, 야율수라군의 창잡이.
사실 위진풍의 말로 깨달은 게 있다.
내공은 갈무리가 가능해서 자신이 기감으로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걸 말이다.
황보성과 창잡이가 격돌했을 때, 기의 충돌로 정신을 잃었다. 무리하게 모든 기운을 읽으려하고 몸도 지쳐 있었기에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니 확실히 알게 됐다.
무인들은 평상시와 전투 시엔 기운이 전혀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기감으로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건 큰 실수일지도.’
위진풍의 말로는 갈무리를 잘하는 고수를 만나면 내공을 익혔는지조차 모를 것이라고 했다.
아직 그런 자는 만나보지 못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의 기감을 완벽하게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생각해야 할 게 많네.’
물통을 꺼내 목을 시원하게 적시는데, 척이가 야단맞는 소리가 들려 태평은 피식 웃었다. 문득 부러우면서도, 궁합이 참 잘 맞는 사제지간 같았다.
태평은 숨을 깊게 내뱉고는 주변을 살폈다. 해가 떠 있을 때, 미리 잠자리 준비를 해야 했다. 눈 밑의 나뭇잎들을 최대한 긁어모아 동굴로 가져다 넣었다.
그리고 동굴을 높은 지형으로 만들어야 비가 와도 바닥이 물에 덜 젖기 때문에 그것을 정비하려 했다.
“..어···?”
태평이 눈 밑을 파보니 동굴의 입구 쪽 땅이 제일 높은 곳에 있게끔 어느 정도 정돈돼 있었다. 이미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위진풍이 한 것일까?
태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올 줄 알고 이런 걸 해놓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동굴 벽에 숫자를 센 듯 희미한 빗금이 많이 그어져 있었다.
‘사람이 살았던 곳이구나.’
그 흔적은 매우 오래돼 보였다.
태평은 과거의 누군가와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 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보다 더 경사가 있어야 한다.
태평은 구도진에서 수많은 일들을 하며 겪었던 삶의 지혜를 최대한 뽑아내고 있었다.
“사나이는 주먹!!”
“사, 사나이는 주먹!!”
앞쪽 동굴에서 위진풍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뒤이어 척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벌써부터 수련을 시작한 걸까.
그 내용은 어쩐지 정신 개조에 가까워 보였다.
눈을 최대한 걷어내고 굴러다니는 돌 하나를 집어 얼어붙은 흙을 깨부쉈다. 삽이 간절했지만 엄살을 피울 순 없다.
젖은 나뭇잎과 흙이 뭉탱이로 떨어져 나왔다. 몇 번 이 짓을 반복하니 금세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 갔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호숫가에서 대충 얼굴을 물로 적시고 코를 킁 하고 풀었다. 물이 너무 차가워 뒷골이 땡긴다.
이 물에 뛰어든 저 어르신이 더 대단해 보였다. 돌아보니 둘은 가부좌를 틀고 서로 마주 앉아 눈을 감고 있다.
태평은 물기가 묻은 얼굴을 손으로 스윽 닦아내고는 바닥에 털었다.
‘난 내일부터 하자.’
벌써 어두워져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태평은 동굴로 돌아와 펼쳐 둔 나뭇잎 위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닫아 세상이 검게 변하자, 기감이 더욱 확장되고 세밀해지기 시작했다.
넘치는 생명의 기운들이 팔딱대며 주위를 맴돌다 천천히 사라진다.
일다경 가량 그렇게 쉬다가 동굴 바로 앞에 모닥불을 만들었다. 야영 몇 번 했더니 이제 불 피우는 것은 도사가 됐다. 태평은 동굴 안에 쪼그려 앉아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선아는 괜찮으려나···.’
혀를 한쪽으로 내밀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황보선아가 머릿속에 스쳐 갔다.
태평의 눈동자에 비친 모닥불과 슬픔이 교차했다. 마음속에 드리우는 복잡한 감정.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겨와 감싸안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한 아이다.
언젠가 성장하면 꼭 다시 볼 것이라 그렇게 다짐했다.
태평은 한참을 그렇게 따뜻한 불길 앞에서 시간을 보내다 깊은 잠에 빠졌다.
첫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 위진풍이 토끼 두 마리를 잡아 왔다. 그는 이번엔 챙겨주지만, 다음번부턴 사냥은 알아서들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곤 자신의 자루 안에서 벽곡단을 한 줌 집어 태평에게 나눠주며, 배가 고플 땐 이것으로 대신하라고 했다.
그렇게 셋은 토끼고기를 익혀 나눠 먹었고, 가죽은 태평과 척이가 하나씩 나눠 가졌다. 잠자리를 보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 태평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굴로 돌아왔다. 그는 동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목함을 손에 들어 살살 쓰다듬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그토록 경계했던 것.
조심스레 뚜껑을 잡아 열었다.
끼이익..
오래된 경첩에서 마모된 쇳소리가 나며 안의 내용물이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났다. 태평은 먼저 나무로 된 연갈색의 신분패를 꺼내 들었다.
대연화(大燃花).
태평은 이제 이걸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보이자, 말릴 새도 없이 저절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아이씨······.”
눈물을 슥 닦아내며 괜히 칭얼거렸다.
신분패를 돌려 반대쪽을 보니 직계(直系)라고 적혀있었다. 위쪽엔 작은 구멍이 있어 목걸이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꿰맬 끈을 만들어봐야겠구나.’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곳을 떠날 때쯤 목걸이처럼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분패를 다시 목함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평은 무공서적을 집어 들었다.
갈색 서책의 겉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풍흔비록(風痕秘錄).
“꿀꺽.”
태평은 드디어 첫 장을 펼쳤다.
서책의 필체는 날카로우면서도 균형감이 있었고, 마치 이 글을 읽는 자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적혀 있었다.
- 이 책을 나의 아들, 무예를 비롯한 후손들에게 전한다. 이것은 후대에 전할 나의 무공.
“후손······.”
어머니가 이 창업 군주의 후손이었을까. 하지만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어머니께 모국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 친우 걸사비우의 무덤 앞에서 처음 이것을 느꼈다. 자연의 흐름을 감지하는 낯선 감각이었다. 설명하기 어렵기에, 가장 익숙한 바람의 이름을 따 풍흔(風痕)이라 칭했다. 반대로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풍흔을 비풍흔(非風痕)이라 이름 붙였다. 이 비풍흔을 통해, 닥쳐오는 위험을 미리······
글을 읽을수록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이건!!!”
그렇다.
태평이 느끼고 있는 바로 그 감각.
“풍흔··· 비풍흔······.”
처음이었다.
이 낯설고도 혼란스러운 감각을 경험한 사람이 또 있었다니.
태평은 마치 긴 어둠 속에서 드디어 누군가의 손을 잡은 듯한 안도감에 희열을 느꼈다. 감격과 벅참이 뒤엉키며 서책을 든 손이 덜덜 떨린다.
그동안은 이 세상에 자신 혼자 이상한 사람 같았다. 편하게 읽던 자세를 고쳐잡고 바른 자세로 책을 다시 들었다.
- 후손은 앞서 말한 풍흔부터 깨우쳐야 한다. 아들 무예는 이미 이 감각을 느끼고 있으나, 각자의 기질에 따라 그 차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 또한, 망초(亡草)의 흔들림이 미리 그려지는 것을 이상히 여겼고, 그로 인해 이 감각의 존재를 처음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이 첫 번째 경지를 초도경(草掉境)이라 부르기로 했다.
“초도경······.”
태평도 알 것 같았다. 그도 풀의 움직임이나 낙엽이 떨어지는 방향같은 걸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미친듯이 책에 빠져들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콧잔등에 땀이 맺히고 손바닥이 젖어 들었다.
풍흔비록에는 총 다섯 가지의 경지가 존재했다.
기운을 감지하는 초도경(草掉境).
이를 이용하는 세류경(細流境).
가까운 기운을 제어하는 운산경(雲山境).
그 거리가 확장되는 풍파경(風波境).
그리고.
- 나는 풍파경의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도인들이 득도하여 우화등선 하듯, 풍흔비록을 익혀 깨달음의 극치에 이르면 세상의 숨결이 너와 함께 고동치리라. 과인이 목표했던 이 경지의 이름은······
풍흔비록 궁극의 경지. 서책의 주인은 이렇게 불렀다.
- 천경(天境).
태평은 소름이 돋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각 경지에서 어떤 식으로 기운을 이용하고, 제어할 수 있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태산진기공처럼 단전이 아니라, 혈 중에서도 주요한 혈에 기운을 채우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구나.”
중원의 무공들은 호흡을 통해 단전에 내공을 축적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번 쌓으면 온전히 제 것이 된다. 그것을 효율적으로 나눠쓰기도 하고, 한번에 집중시킬 수도 있다.
이 풍흔비록의 심법은 자연에 퍼진 기운들을 수시로 주요혈에 쌓아 사용하는 방식이다.
체력만 허용된다면 무한에 가까운 지속력과 변수에 유연한 임기응변(臨機應變)이 특징이었다.
단전의 힘이 강하면 주요혈의 기운까지 흡수하려는 성질이 있어 중원의 무공은 이 풍흔비록의 무공과는 상충 되었다. 균등하게 혈의 기운을 제어하는 것이 중요했다.
두 시진이 지나자, 태평은 책의 후반부를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필자는 바람을 매우 좋아하는 듯했다. 첫 번째부터 마지막 초식까지 숫자별로 바람을 줄 세워 놓고 있었다.
“첫 번째 바람, 초풍(初風).”
여기부터는 초식의 사용법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 초식 초풍은 검을 빼 드는 발검법, 또는 발도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초식들은 총 열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필자는 그중 열두 번째 바람의 초입까지만 당도했다고 한다.
- 열세 번째 바람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으나, 천경의 경지에 이르면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명명했다. 풍흔비록을 익히는 그대들이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초식. 그것은 땅에서 시작되어 하늘까지 닿는 길······
열세 번째 바람.
- 지천도(地天道).
풍흔비록의 마지막 초식.
태평의 주먹이 꼭 쥐어졌다가 책이 구겨지자 얼른 힘을 뺐다. 그는 글에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으나 어느 순간 주변의 바람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바람은 마치 태평이 글자 하나를 읽을 때마다 반응이라도 하듯, 조용히 춤을 췄다.
‘재밌다.’
태평은 어느덧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했다.
- 나는 이 무공을 익히고 단련하여 수많은 부족을 굴복시키고, 많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을 통합했다. 결국 나라를 일으킨 과정을 비롯하여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당부의 말도 적혀 있었다.
- 우측 장에는 후손들이 도달한 경지와 초식을 적어, 서로 정진을 도모토록 하라. 그리고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나 만일 과인의 나라가 멸망한다면, 이 서책은 쓸모를 다한 허물로 여기고, 조용히 불사르라.
그 아래에는 다른 글씨와는 다르게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문장이 있었다.
“추울텐데 모쪼록 감기 조심하거라.”
“....!!”
태평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글을 읽음과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그의 주변에서 세차게 흔들리던 바람이 어느새 사라져 있다.
‘뭐야, 대체···.’
이것이 서책의 마지막 내용이었다.
추울텐데 감기 조심하라니, 지금이 겨울인 것을 어찌 알았을까. 마치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 듯 해 태평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태평은 한참동안 그 작은 글씨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그 장의 밑부분에는 책을 남긴 자의 이름 하나가 당당하게 적혀 있었다.
- 발해왕 대조영(大祚榮)
“어머니와 같은 성······.”
아무래도 어머니는 이 창업 군주의 후손인 모양이다.
‘왕족이었구나······.’
발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태평은 들어본 적이 없는 국가였다.
그리고 마지막 장의 우측에는 네 명의 이름이 있었다.
- 대조영, 풍파경, 열두 번째
- 대무예, 풍파경, 열 번째
- 대흠무, 운산경, 아홉 번째
- 대인수, 운산경, 아홉 번째
‘네명만이 익혔던건가.’
모두 대씨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태평은 성이 다른 자신이 이것을 익혀도 될 지 잠시 고민했으나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들의 나라는 멸망했다.
불태워 사라질 거라면, 차라리 후손인 자신이 익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풍흔비록을 닫아 목함 위에 올려두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는 어제의 척이를 생각하며 서책을 향해 몸을 낮춰 큰절을 올렸다.
“저 도태평은 선조이신 대조영을 평생의 사부로 받들겠습니다.”
그 순간, 한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밝은 햇빛이 그의 등을 따스히 감싸주었다.
- 작가의말
드디어 풍흔비록 등장!
어느덧 31화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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