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전회의에 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이시백은 이흔과 시현, 둘 다 데리고 편전으로 향했다.
전날 회의가 끝날 때 인조가 내일 회의 때는 세자도 부를 것이니, 이곳 산성 안에 있는 대신들의 자제도 다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렸었다.
매일 같이 치고받는 대신들의 싸움을 보다 지친 인조가 내린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그래도 이자들이 아비로서 체면은 있을 테니, 애들 앞에서는 좀 덜 싸울까 싶어 아들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한 참이었다.
'오쒸... 인조... 지금 왕을 만나러 간다는 거잖아... 전생에 대통령도 한번 못 만나 봤는데... 인조를... 설마 나한테 말걸진 않겠지?'
이곳에 온 후 시현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상태였다. 세자나 대군도 빡셌는데 왕을 직접 마주하는 건 또 얼마나 빡셀지 두려웠다.
어제 이시백에게 한쪽 귀를 잡힌 채로 돌아갈 때는 멀게만 느껴지던 길이었는데, 오늘은 순식간에 편전 앞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시현은 편전에 들어가 이시백의 뒤로 이흔과 나란히 섰다. 옆으로는 어제 보았던 삼인방 김익훈, 최서룡, 심재윤이 보였다. 그 외에도 여러 젊은 남자들이 각자의 아빠 뒤에 서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재윤은 시현과 눈이 마주 지자, 이내 고개를 까딱 하며 아는 채를 했다. 시현은 어제 그가 난리 치던 게 떠올라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마주 까딱 했다.
그 후로 편전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어제 같았으면, 인조가 오기 전부터 저들끼리 논쟁을 시작했었을 대신들도, 오늘은 아들들이 보고 있어 말을 삼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주상 전하 납시오!"
"세자 저하 납시오!"
그 소리에 편전 안의 모두가 고개를 크게 숙였다.
한 박자 늦긴 했지만, 시현도 그들을 따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으... 긴장돼 미치겠네... 이게 뭐라고...'
시현은 고딩 운동회 때 계주 출발선에 서서 앞 주자를 기다리던 게 생각났다. 그때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떨림이었다.
곧 인조와 세자가 자리에 앉은 후 묵직한 목소리가 편전 안에 울려 퍼졌다.
"경들은 고개를 들라."
'와... 목소리 뭐여... 4 채널 스테레오 사운든데? 이렇게 위엄 있다고?'
뜻밖의 인조의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놀라웠다.
고개를 들어 인조의 얼굴을 보니, 어젯밤 멀리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얇은 눈썹 사이 미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콧날은 매우 오뚝했고, 그리 크지 않은 두 눈은, 그 눈빛이 칠흑처럼 깊었다. 희끗희끗한 수염 사이로 보이는 얇은 입술은 고집이 아주 대단해 보였다.
'와... 개 빡세게 생겼네... 스테이션에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거 보면 긴장 좀 타야 할 상인데...'
소위 말하는 응급실 진상환자의 스멜이 났다.
"시작합시다. 그래, 어제 봉림은 어찌 잘 빠져나갔소?"
'오... 그래도 아들 걱정부터 하는구나.'
그 물음에 시현 앞에선 이시백이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대군 마마를 수행한 박별장이 이곳 지리에 밝고 날랜 자이옵니다. 잘 모실 것이오니 너무 염려 마시옵소서."
이시백의 칼 같은 대답에도 인조의 심기는 못내 불편했다.
"내, 경들이 하도 청을 하여 대군을 그리 내보내긴 했는데... 이게 정말 맞소? 성 밖으로 오랑캐가 천지인데... 봉림이 정말 살아서 강화까지 갈 수 있소?"
그래도 아비인지라 인조는 밖으로 나간 봉림 대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하. 만약 저 오랑캐가 이 성벽을 넘어 이곳의 모두를 도륙한다면... 사직은 정말로 풍전등화 이옵니다. 저들의 기세가 조금이라도 헐거운 이때, 안전하게 대군이라도 먼저 피신시키는 게 맞사옵니다."
대사간 오달제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 그, 자기 자식 아니라고... 경들은 정말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 아니요?"
인조의 말에 오달제가 그 자리에 바짝 엎드리며 울먹였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전하. 신 오달제, 오로지 사직을 생각하는 마음뿐이옵니다."
'흠...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봉림대군이 왜 여기 있었냐고... 어차피 이렇게 강화도로 다시 보낼 거면... 이게 역사가 기록이 잘못된 건가?'
시현은 봉림대군이 이곳에 있던 것도 의아했는데, 무리해서 다시 원래 역사로 돌려놓으려는 저들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 나가서 그냥 청에 잡히는 건가? 어차피 그게 원래 역사잖아... 진짜 뭐지?'
"도원수 김자점은 어찌하고 있소? 도대체 그는 언제 구원을 오는 것이오?"
인조는 이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신들에게 물었다.
"토성에서 크게 이겼다는 급보가 있은 후 열흘이 지났으니 곧 당도할 것이옵니다. 전하."
'응? 김자점이?... 그래 이기기도 했었지... 대부분 병크였지만... 근데 제일 큰 병크는 항복할 때까지 구하러 안 오는 거 아냐?'
역사를 알고 있는 시현은, 이들이 아직 김자점이 군대를 이끌고 구원을 올 걸로 믿고 있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아... 이거 말해줘야 하나? 근데 내가 막 끼어들어도 되나? 네가 어떻게 알아라고 시전하면 또 어떻게 할거여? 괜히 알려줬다가 역사가 틀어질 것도 걱정이고...'
"근데 안 오지 않소! 안 오질!! 토성에서 예까지 열흘이면 진작 오고도 남았을 거리인데! 혹, 이자가 딴마음을 품은 게 아니오?"
인조는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전하.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 하옵니다. 산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전투가 일고 있어 더뎌지는 것일 것입니다."
이시백이 그런 인조를 달래듯 얼른 답하고 나섰다. 시현의 앞에서 대쪽 같던 모습과 달리, 그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역시 왕 앞에서는 누구나 다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거, 그제 경기 이남에서 이겼다는 그 군대는 무엇이오?"
"전라도와 강원도의 근왕군이 전투를 치르며 구원을 오고 있는 걸로 아뢰옵니다."
병조 참판인 이시백은 직접 갑옷을 입고 수성도 하는 터라, 회의만 하는 대신들 보다는 외부 상황에 대해 빠삭했다. 결국 모든 인조의 질문 세례를 이시백이 혼자 받아내고 있었다.
"그들을 모으고 있는 게 심기원이라고?"
"그러하옵니다."
'올~ 너네 아빠?'
시현은 심기원의 이름이 나오자 얼른 고개를 들어 심재윤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저 놈은 아빠도 없는데 여긴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지? 웃기는 놈이네'
고작 약관이 갓 넘은 나이에 아빠 없이 혼자 편전에 들어와 있는 심재윤의 배짱도 사뭇 대단했다.
"그럼, 심기원을 도원수로 삼아 근왕군을 모아 얼른 이곳을 구원토록 하시오! 얼른!"
이어지는 인조의 말에 시현을 제외한 편전의 모든 대신들이 경악했다.
'응? 뭔데 뭔데? 심기원 도원수 삼는 게 왜? 아! 이게 그거구나. 진짜 트루였네?'
김자점이 도원수로 있는 상황에서 심기원을 또 도원수로 삼아 졸지에 도원수가 둘이 되어버린 상황에 모두가 경악하는 중이었는데, 이미 역사를 알고 있던 시현은 이게 진짜였다는 걸 깨닫고 그저 웃길 뿐이었다.
'지금이나 21세기나... 정치하는 분들 레벨은 비슷하네.'
이건 지극히 시현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전하.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다들 벌떼같이 달려들어 읍소해 댔다.
'어 이거 떼창 하는 건가? 나도 해야 하는 건가?'
시현은 고개를 돌려 다른 아들들은 어찌하는지 살폈다. 그들도 역시 한껏 고개를 숙이며 지네 아빠를 따라서 읍소하고 있었다.
'오! 존잼. 역덕으로 또 이런 걸 나 혼자 놓칠 순 없지. 얼른 해봐야지 캬캬'
"전하. 명을 거두어 주시... 어?!"
신이 나서 저들과 함께 타이밍을 맞춰 소리쳤는데, 한 박자 늦어 버리고 말았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이 말을 멈춰, 졸지에 시현 혼자 읍소를 해버리고 말았다.
젊은 유생의 당돌한 읍소에 인조를 포함한 편전의 모든 대신들의 눈이 시현에게 쏠렸다.
'아 시발... 진짜 ㅈ 됐네?!'
"호오... 그래. 자네는 누구인가?"
인조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소현 세자 역시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생각. 생각 하자. 최대한 존댓말... 극 존칭! 진짜 조지면 나 여기서 죽는다...'
"소생. 이시백 대감의 삼남 이열이옵니다. 전하."
'후우- 후우- 와 씨 돌겠네 진짜...'
시현은 머리가 핑핑 돌고 팔다리가 미친 듯이 떨렸다.
"이시백 대감의 자제였구나. 이리 보니 네 용모가 아주 훌륭하구나. 그래, 하면 심기원을 도원수로 삼은 명을 거두어 달란 까닭이 무엇이냐? 내 너의 이야기를 한번 듣고 싶구나."
'으... 아... 진짜... 죽는다...'
"김자점이 도원수로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 관직을 삭탈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간 보여왔던 김자점의 군사 행정가로서의 자질이 아까운 것도 있으시지만, 김자점이 일만에 가까운 군사를 아직 부리고 있어, 자칫 삭탈을 했다가는 다른 마음을 품지라도 않을까 두려우신 것이지요?"
시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인조를 보고 술술 대답했다.
대답 하나하나가 전부 인조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것들이었다.
"... 그래서?"
"근왕군을 모으는 게 심기원이라고는 하나, 사실 심기원을 부원수나, 행군총관에 임명하셔도 될 일입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고 부득이하게 도원수를 둘을 두면서까지 심기원을 도원수에 앉히려고 하시는 속내는, 자칫 근왕군을 다 모은 심기원마저 김자점에게로 가 그의 명을 따를까 두려우셔서가 아니옵니까?"
'응? 내가 뭐라고 떠든 거지? 뭐지? 이게 뭐야?'
시현은 입을 열자 자신이 모르는 내용까지 마치 AI처럼 술술술술 자동으로 떠들어 댔다. 대답을 하는 동안은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호오... 재미있구나. 두렵다라... 정녕 짐의 마음이 그러하단 말이냐?"
슬쩍 고개를 들어 인조를 보니, 말과는 달리 전혀 재밌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시현을 바라보는 다른 대신들의 얼굴도 상당히 심각했다.
시현을 돌아보는 이시백과, 이흔은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아... 개 조졌네... 이거 뭐야... 이것도 그 똑똑해진 능력 중에 하나야? 근데 컨트롤은 안되는 거야? 그냥 이렇게 왕 앞이고 뭐고 막 내뱉는 거야?!'
"전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살려... 아니 죽여... 아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시현은 얼른 인조 앞으로 뛰쳐나가 바짝 엎드리며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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