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지몽(胡蝶之夢)
235는 전신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뭔가?
뭐란 말인가?
대체 왜.
어떻게 자신의 배 속에 알파에너지가 들어와 있단 말인가?
정말로 방금 그것이...
꿈이 아니었단 건가?
무엇보다도...
우우웅-
'철법결'이란 것이 실제로 운행되는 것을 보자, 235는 혼란스러웠다.
"야! 뭐하고 있어! 빨리 밀어 보라니까!"
바위 반대편에서 파울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235는 그 소리에 몸을 움찔거리고, 일단 일을 마치기로 했다.
파울로의 명령에.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것이 E 시리즈가 태어날때부터 유전자 단위에 박혀있는 명령이었으니까.
콰과광!
얼마 후 235가 밀고,다른 E 시리즈 동료들이 바깥에서 바위를 당겨서 바위가 밀려나갔다.
그러나 그때였다.
우르릉!
바위가 깔려있던 곳 위쪽의 천장이 진동하며, 돌무더기가 몇 개 쏟아져 내렸다.
쾅, 쾅쾅!
"끼야아악! 제기랄, 죽을 뻔했잖아!"
파울로는 비명을 지르며 돌무더기를 피했고, E 시리즈들은 대부분 돌무더기를 피했다.
하지만 235는 안쪽에 있었던지라 미처 돌무더기를 피하지 못하고 한 개를 얻어맞았다.
그 모습을 본 파울로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E 시리즈들에게 명령했다.
"이런 젠장, 이러다가 다 깔려 죽겠군! 난 광산 바깥에서 명령을 하달할 테니까 너희는 여기서 이걸 다 치우고 올라와라! 에잇, 제기랄!"
파울로는 허둥지둥 위쪽으로 도망쳤고, 그 모습에 다른 E 시리즈들은 각자 한숨을 쉬며 파울로가 명령한대로 다른 돌무더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돌무더기를 얻어맞은 235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정도 충격이라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찢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235의 몸은 어떤 곳도 딱히 탈이 난 곳이 없었다.
"이게 대체..."
235는 믿기지 않는단 눈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바라보다, 근처를 지나는 E 시리즈 중 하나에게 자신이 돌무더기를 맞은 곳 중, 자신의 어깨를 보여주며 물었다.
"이봐. 혹시 내 몸에 멍이 들거나, 그런 곳 혹시 있어?"
"음?"
다른 E 시리즈 동료는 235의 몸을 한 번 둘러봐주곤 고개를 저었다.
"겉으로 봐선 멀쩡한 거 같은데. 운이 좋았나 보네."
"아... 그런가. 고마워."
자세한 건 물론 홀리카 캡슐로 들어가기 전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문제가... 없다고?'
235 자신이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235는 파울로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깊숙한 곳에 있는 돌무더기를 치운다 하며 동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왔다.
'철법결!'
우우웅!
철법결의 법력(法力)이 235의 몸 위로 은은하게 뿜어지며, 단단하게 뭉쳤다.
영기가 일순간 모공으로 뿜어져 나와 외피를 만든 것이었다.
'알파에너지가... 나를 보호했어.'
여태껏, 235를 비롯한 E 시리즈의 몸을 갉아먹기만 했던 것이 알파에너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위험에 처하자 알파에너지가 스스로 움직이며 그를 보호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가능하려면, 가능성은 하나였다.
'진짜로... 꿈이 아니었다고?'
그 세상이?
재화 걱정 없이 마음껏 맑은 공기와 흙내음, 풀내음, 꽃내음, 물내음을 맡을 수 있고, 따스한 햇빛을 건강한 신체로 내리쬐는 게 가능한 그 세상이?
홀리카에 접속한 동안 입에다가 영약액을 주입하는 게 끝인 이곳과 달리, 왕만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던 그 세상이?
형제라 생각했던 234가, 원율이란 이름으로 살아있는 그 세상이?
'그 세상이. 진짜라고?'
그렇다면...
235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가고... 싶어.'
그 세상으로, 다시 가고 싶었다.
그 세계가 꿈이 아니었다면...
'다시 가고 싶어.'
가서 그 세계에서, 인간다운 행복을.
사람다운 취급을 받고 싶었다.
후우우우...
235는 광산에서 금 속성의 영기.
광산 내부의 알파에너지를 철법결을 통해 흡수해 보았다.
'그냥 두었을 땐 알파에너지가 몸을 갉아먹었는데...'
이젠 느껴진다.
몸을 계속 갉아먹었던 알파에너지가, 더 이상 몸에 해를 끼치지 않고 그가 도인(導引)하는 경로를 따라 철법결의 구결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철법결을 운용하면 할수록, 오히려 알파에너지가 몸에.
아랫배 부근에 축적되며 정신이 또렷해지고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235는 문득 정신을 강하게 집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우우우웅!
알파에너지.
금영기가 몰려들며, 235의 의식이 뇌의 정중앙으로 몰려들었다.
'아아아...'
그와 동시에, 235는 자신의 몸 안쪽, 혈맥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관조하는 게 가능해졌단 걸 깨닫고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근육 하나하나, 그의 내장, 신진대사 등이 모조리 의식 속에 잡혀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 자체에 '뭔가'가 깃들어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건... 뭐지?'
몸 자체에 뭔가가 '덧씌워져' 있었다.
마치 몸에 들러붙어 있는 듯한 그것은... 235가 보기에, 마치 235의 본질과 같아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문득, 235는 자신과 '덧씌워진' 듯한 그 기이한 무언가의 정중앙에 팔각형의 '거울'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억!"
그 거울을 인식하자, 235는 마치 자신이 그 거울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235는 황급히 집중을 풀었고, 그러자 거울은 그제서야 그를 빨아들이는 듯한 흡입력을 멈췄다.
235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건너편 세계는 진짜야. 그리고...'
이 거울은, 그 세계로 건너가게 해 주는 무언가였다.
분명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235는, 건너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기쁨에, 잔뜩 흥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 *
그날의 일과가 끝났다.
235는 하루종일 열심히 일을 하며, 철법결을 따라 알파에너지를 끊임없이 흡수했고, 알파에너지를 흡수하면 할수록 기운이 나고 정신이 맑아졌기에 그날의 능률은 최상위였다.
일과가 끝난 후, 235는 다시 파울로의 인솔에 따라 E 시리즈 보관소에 도착했다.
"이상없음, 다음. 건너가. 다음."
E 시리즈 보관소 입구에선, 파울로와 같은 렙틸리언 종족 출신의 검사관 '쟝'이 E 시리즈를 검사하고 있었다.
E-B3은 알파에너지가 가득한 행성이었고, 알파에너지에 노출된 E 시리즈에 변질이나 변형이 가해지는 지를 검사하는 검사관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235가 검사관 앞쪽에 있는 검사대를 통과했을 때였다.
"E-235... 음? 야, 파울로."
쟝이 파울로를 부르며 235를 가리켰다.
235는 그의 손짓에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철법결이 들킨 걸까?
해부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뇌 전체를 정밀검사당해서, 그의 몸 안쪽 어딘가에 있는 그 거울을 빼앗기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그 세계로 가서, 행복을 누릴 수 없단 사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리고, 쟝의 말이 이어졌다.
"이 생체인형... 이거 많이 낡았는데? 235면 몇년식이지?"
"음? 어디보자... 30년 됐네. 끔찍하게 낡았군!"
"씁, 이거 슬슬 기능고장이 나는 거 같아. 폐기할 때가 된 거 같은데."
"하긴, 너무 오래 쓰긴 했지. 안 그래도 슬슬 오래된 녀석들 모아서 단백질 분해조립장치에 넣을 예정이었어."
파울로와 쟝의 말에, 235는 안심했지만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거울은 뺏기지 않지만, 그가 곧 폐기된다는 소리였으니까.
"언제쯤 하려고?"
"빨리 좀 처리하고 싶긴 한데... 알다시피 최근에 지진 때문에 E 시리즈가 좀 많이 부족해졌거든. 그래서 E-A1에서 보급 오기 전까진 저것들을 계속 써야지. 그나저나 우리쪽 보급은 언제 오는 거야?"
"아... 안 그래도 그거 말이지. 처리반 인형들도 최근에 좀 죽었잖아? 그거 때문에 A1 쪽에서 처리반 쪽에 먼저 보급을 해 주려는 모양이야. 일주일 후에 처리반 쪽 보급이 오고, 한두달쯤 후에 우리 쪽 보급이 올 거야. 그때 새 인형들도 많이 올 테니까, 그때쯤 오래된 것들을 폐기하면 될 거 같아."
"두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하... 30년식이면 두달 안에 그냥 고장나 버리는 거 아니냐?"
파울로가 툴툴거렸고, 쟝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뭐 어때. 그럼 그땐 네가 곡괭이 들면 되지."
"제기랄! 고귀한 렙틸리언족 백작가 막내아들이었던 내가 은하제국에선 곡괭이질이나 해야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뭐 어쩌겠어. 인간들 기술력을 못 따라간 우리 선조들 잘못이지."
쟝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235를 검사한 결과를 보며 말했다.
"뭐 어쨌든. 이건 엄청 낡아서 당장 한달 정도 있으면 기능정지할 확률이 94.5%야. 네가 곡괭이질 하기 싫으면 어떻게 다른 반에서 적당한 인형이라도 빌려야 할 걸?"
"제길... 어떻게 보급 올 때까지 수명 연장은 안 되려나."
"안 돼, 벌써 알파에너지 때문에 변형이 생기기 시작했어. 봐봐, 아랫배 쪽에 알파에너지가 몰려서 신경망이 꼬이기 시작했잖아. 곧 있으면 알파에너지에 침식되어 죽을 거야."
"그렇군. 그나저나 알파에너지가 아랫배에 몰리는 건 처음보는데..."
"꼭 아랫배는 아니더라도 침식이 심한 것들은 한 곳에 알파에너지가 몰리긴 한다고 하더라고. 아, 수다떠느라 좀 시간을 지체했군."
파울로와 함께 검사 화면을 보던 쟝은 235에게 손짓했다.
"어쨌든, 넌 끝났다. 가봐, 다음."
"......"
235는 어두운 얼굴로 캡슐로 들어왔다.
한두달 후.
그는 폐기된다.
쟝은 그가 곧 기능정지할 것이라곤 했지만...
235의 생각에, 그는 그렇게 빨리 기능정지가 올 것 같진 않았다.
쟝은 235의 아랫배에 알파에너지가 몰린 것이, 알파에너지에 의해 변질된 것이라 했지만... 235는 알파에너지에 의해 변질된 게 아니라, 오히려 알파에너지를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난 한두달 안에 죽지 않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알파에너지는 더 이상 그의 몸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상급자인 쟝과 파울로가 '기능정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는 다음 보급이 오면 폐기된다.
저항은 불가능했다.
E 시리즈 같은 생체인형들은 상급자에 대한 명령이 거부가 불가능하도록, 유전자 단위에 명령이 입력되어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저항해도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만약, 내가 이 세계에서 죽는다면... 거울 너머 세상에서도 죽는걸까. 그 세상으로 넘어갈 순 없는걸까.'
알 수 없었다.
불확실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래. 난 곧 죽는다...'
치이이익...
캡슐이 닫히며, 그가 홀리카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겠지... 그렇다면, 남은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형이랑 시간을 보내보자.'
* * *
홀리카에 접속한 235는, 인벤토리에 거울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거울... 도대체 왜 가상현실인 홀리카에 구현되는 걸까.'
그리고 왜 E시리즈를 실시간 감시하고 있을 검사관 AI는 왜 그를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가 궁금해할 때였다.
"어이, 235. 우리 레이드 갈 건데, 너도 따라올 거냐."
홀리카에서 그와 간혹 놀곤 하던 다른 E 시리즈 동료의 아바타가 235의 홀리카 내부 집으로 찾아와 고개를 들이밀고 질문했다.
홀리카에선 RPG 게임같은 게임이나 여러 게임들을 구현해 줘서 9등신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235는 삶도 얼마 안 남았으니만큼 신나서 달려갔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 235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안 갈래."
"쩝, 그래? 그럼 AI들이랑 가야지. 이번에 새 스킨 나왔는데 너도 구매해 보라고."
E 시리즈 동료의 옆에 흑기사 형상의 AI NPC가 생성되었다.
"어떻게 지난번에 왔을 때랑 방이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새 아이템이나 스킨도 없이 너무 밋밋하잖아. 사냥해서 번 재화로 방이라도 꾸며 봐."
말을 마친 동료는 NPC와 함께 어딘가로 이동했고, 얼마간 동료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235는 문득 기묘한 것을 알아챘다.
'...왜, 저 녀석은... 내 손에 들린 거울을 못 본 거지?'
235는 딱히 필요 없는 걸 구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그런 그가 못 보던 아이템을 손에 넣었단 걸 알아챘다면, 동료가 분명 뭔지 질문했을 터였다.
그런데 235는 그의 바로 앞에서 거울을 들고 있었음에도 '지난번에 왔을 때랑 방이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새 아이템이나 스킨도 없이 너무 밋밋하잖아.'라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 이 거울.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건가? 그래서 저 녀석도 별 말 안 한거고. 검사관 AI도 안 찾아온 거야?'
235는 기이함을 느끼며, 이웃집에 사는 다른 E 시리즈 동료가 마침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그에게 거울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음? 어, 안녕...?"
그리고, 동료는 의아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역시나...'
아마 235가 손거울을 든 손을 아무것도 없는 그냥 빈 손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그냥 손인사를 받았다 생각하리라.
235와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갑자기 인사를 받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 안녕. 혹시, 이게 뭘로 보여?"
235는 거울을 든 손을 보고, 제대로 된 확인을 위해 동료에게 질문했다.
동료는 잠시 머리를 긁다가 말했다.
"어... 손? 손인사?"
"...그래. 여태껏 이웃집에 살았는데, 너무 서로 어색했던 거 같아서 인사 해본 거야."
"어, 그, 그래. 난 E-793이야. 넌?"
"E-235."
"그래, 그럼 잘 지내자 235. 그럼 난 이만 미사일 연속 발사 시스템 체험하러 가야해서 이만."
793은 235와 간단한 안면을 튼 후 미연시라는 게임을 하겠다며 사라졌다.
793이 사라진 곳을 바라본 235는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역시. 다른 사람들은 거울에 대해 인지를 못한다.'
이 거울은 역시, 그만이 인지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기이했다.
'거울 너머 세계로는 어떻게 가는 거였지? 지난번엔 어떻게 갔더라? 뭔가 조건이 있나?'
일단, 235는 거울 너머 세계로 가보기로 결심하고 지난번에 어떻게 넘어갔는지.
그리고 '원립'이었을 때는 어떻게 다시 이곳으로 넘어왔는지를 떠올렸다.
'잠. 잠이었어.'
잠에 드는 것을 트리거로 하여 그쪽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쪽으로 넘어왔다.
'좋아, 그럼 잠을 자보자.'
235는 침대에 누워, 거울을 쥐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 * *
깜빡-
235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눈을 부릅뜨며 허리가 아프단 걸 눈치챘다.
"으, 으으윽...!"
그는 눈꼽을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석실(石室).
적혈 노파의 동부 안.
원립의 방 안이었다!
'역시...!'
거울과 있는 상태에서 잠을 자면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235는 축축하고 서늘한 석실의 감각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 세상은... 가상현실이 아니야.'
가상현실 특유의 불쾌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브젝트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하면 픽셀이 보이던 홀리카같은 가상현실과 달리, 픽셀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우우웅-
235는 문득, 이 세상은 알파에너지.
천지영기의 밀도가 그렇게 높진 않다는 걸 알아챘다.
'적혈 노파가 자리잡은 이 산도 나름대로 영기가 짙은 영산(靈山)인 걸로 알고 있는데, E-B3에 비하면 꼭... 말라붙은 황무지 같군.'
235는 자리에 앉아서, 단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혀를 내둘렀다.
'거울을 통해 세상을 옮겨왔는데도, 단전에 축적한 알파에너지... 법력은 그대로다.'
이쪽 세상에서 쌓은 법력도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고, 저쪽 세상에서 쌓은 법력도 이쪽 세상으로 넘어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법력은 뭐길래 도대체 세상을 같이 넘는 것일까?
그가 자신을 관조하고 있을 때였다.
저벅, 저벅-
석실 바깥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렸다.
"좋아, 원율. 네 말대로 녀석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얼마간 근처의 다른 곳으로 보내서 경지를 올릴 수 있게 해주도록 하지. 그래, 저 건넛산에 철광산이나, 아니면 근처에 있는 철기문(鐵器門)을 멸문시키고 그곳에서 수행하게 해 주면 너도 만족하겠지?"
"네, 스승님. 꼭 부탁드립니다."
"대신 잘 기억해야 할 게다. 녀석이 철광맥으로 떠나든 철기문으로 떠나든 너희는 언제나 내 손바닥 안이다."
벌컥!
말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235의 방문이 열렸다.
"어, 아, 안녕하십니까..."
235는 허둥대다가, 원립의 기억속에 있는대로 눈 앞에 있는 노파에게 고개를 숙였다.
적혈 노파.
연기기보다 더 높은 경지라는, 축기기 수선자라고 했다.
그리고 축기기 중에서도 굉장히 경지가 높아, 축기기 다음 경지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 같았다.
"쯧쯧, 여전히 비루한 자질이로군. 철법결은 잘 수행 중이더냐? 손을 내밀어 봐라. 네 수행을 파악할 겸 이전에 넣은 혼기(魂器)는 무슨 법기인지 슬슬 용도가 나왔을 테니 알아봐야겠다."
"예, 예에 스승, 스승님."
235는 적혈 노파를 크게 두려워했던 원립의 기억에 몸이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팔을 내밀었다.
흑적색의 장포를 입은 적혈 노파는 험상궂은 얼굴로 235의 손을 잡아채, 서늘한 기운을 235의 몸 안으로 흘려보냈다.
얼마 후, 적혈 노파의 얼굴에 조금 놀랐다는 눈빛이 깃들었다.
"오호라, 나름 열심히 수행했는가보군? 이 정도면 연기기 1성에 온전히 진입할 수도 있겠구나. 우선 철법결의 고유법술을 한 번 펼쳐보어라."
적혈 노파는 품에서 작은 금속 조각을 꺼내더니 235에게 건넸다.
'철법결 고유법술...'
원율이 이전에 귀화술이라는 도깨비불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보여줬듯.
익힌 수선공법에 따라, 그러한 고유한 법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이전까진 원립은 법력이 너무 옅어 철법결을 익히고도 고유법술을 사용할 순 없었으나, 이제는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235는 원립의 기억 속에서 고유법술을 펼치는 수인(手印)을 맺고, 고유법술이란 것을 사용해 보았다.
"철금조(鐵金操)."
철법결의 고유법술, 철금조라는 법술을 사용하자 235의 몸 속에서 뭔가가 그의 손으로 몰려와 맺혔다.
'알파에너지가... 손에 맺혔어?'
235는 신기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고, 적혈 노파는 쇳조각을 235의 손에 올려놓았다.
"주물러 보아라."
"예... 헉!"
235는 신기한 현상에 눈을 부릅떴다.
노파가 준 쇳조각이, 마치 찰흙처럼 물러진 것이었다.
"영기가 깃들지 않은 평범한 금속이라면 철금조를 통해 손쉽게 주무를 수 있을 게다. 네 수행이 높아지면 손대지 않고도 쇳조각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해질테고. 공법이 극성에 달하면 그때부터는 영기가 깃든 영철이나 영금도 주무를 수 있게 되어, 제대로 법기 제작이나 법기, 법보 등을 수리하는 데에 유용하겠지."
적혈 노파는 원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다, 원율. 네 말대로 네 동생은 그럭저럭 자질이 보이긴 하는 것 같구나. 키워두면 법기 수리용으로 썩 쓸모가 있어보이니, 약조대로 네 동생이 경지를 높이기 쉽게 철광산이든 철기문이든 가까운 곳의 금영기가 풍부한 영지로 보내주마. 되었느냐?"
"...예, 감사드립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턴 순순히 협조해야 할 것이야. 그리고... 어디보자. 흐으음!"
츠아아앗!
적혈 노파가 손에 힘을 주자, 그녀의 손이 시커멓게 변하는 듯 했다.
이윽고, 적혈 노파는 시커멓게 변한 손을 그대로 235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허억!"
적혈 노파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았던 235는 식겁했으나, 기이하게도 노파의 손은 235의 몸을 뚫지 않고 그대로 '투과'하였다.
그와 동시에 235는 적혈 노파의 손이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왔단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득 E-B3에서 느꼈던, 자기 자신의 몸에 '덧씌워진' 무언가에, 노파의 손이 직접적으로 닿았단 걸 인지했다.
'이, 이건...!'
그리고, 노파는 그대로 235에게 '덧씌워진' 무언가를 잡아채더니, 그 무언가의 중앙에 있던 신비로운 거울을 검은 손으로 대뜸 움켜쥐었다.
"허억...!"
은하 제국의 검출장치나, 다른 이들, 혹은 AI는 아예 인식하지도 못했던 물건을 노파는 이렇게 쉽게 인지하고 잡아챌 수 있단 사실에 235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노파는 235의 가슴에 손을 넣은 채로 신비로운 거울을 만져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 아직도 딱히 변화는 안 보이는군. 그냥 진짜로 만들다가 만 혼기인가? 형태만 잡고 진안이나 기능은 안 새겨넣은 게로군. 흐음, 회수할까..."
적혈 노파는 235의 안쪽에 꽂힌 거울을 움켜쥐고, 그대로 뽑아내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때, 노파는 문득 원율 쪽을 한번 흘긋 보더니 씨익 웃었다.
"흐흐,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율. 내가 이 녀석에게 억지로 불어넣은 혼기를 뽑으면 녀석은 혼이 찢어져서 백치가 되어버릴 수 있는데, 뽑는 게 좋겠느냐, 뽑지 않는 게 좋겠느냐."
"...스승님..."
"큭큭,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원망치 말거라. 나는 당분간 더 이상의 실험을 하지 않겠다, 그리고 녀석을 금영기가 가득찬 곳으로 보내주겠다. 이 약속만 했을 뿐이지 원립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단 약조는 하지 않지 않았느냐?"
"...원립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아주십시오."
"흐음,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성능도 없는 혼기라고는 해도, 내가 제대로 된 귀도(鬼道) 수사로 전환에 성공하면 법술이나 신통을 부여해서 유용하게 쓸 수도 있는데? 거울 법기는 좋은 법술이나 신통을 넣기에 아주 좋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 물건을 내가 회수하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게지? 내가 내 물건을 회수하지 않으면 내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
"...제자가... 제자가 더욱. 더더욱 스승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큭큭큭큭큭..."
적혈 노파는 그 말에 235의 가슴에서 손을 뽑았다.
235는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서 신비로운 거울을 뽑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억해라, 원율. 네 몸과 마음은. 오직 나의 것이다."
할짝-
적혈 노파는 원율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할짝 핥았고, 원율은 눈을 꾹 감고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몇 번이나 베풀었단 걸 잊지 말아라. 내가 주는 것을 다 받아들여야..."
그때였다.
꽈과광!
동부 전체가 흔들렸고, 적혈 노파는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좋았는데 다 망치는군. 어떤 개잡놈들이지?"
크웨엑, 크웨에에엑!
그때, 그들이 있는 석실로 무언가가 뛰어왔다.
235는 그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시, 시체? 아냐, 저건...'
원립의 기억에도 있었다.
저것은 '강시'라는 것으로, 적혈 노파가 부리는 그녀의 하수인들이었다.
크웨엑, 크웨에에엑!
강시는 적혈 노파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질렀고, 무언가 강시와 통하는 게 있었는지 적혈 노파는 깔깔 웃었다.
"낄낄낄낄, 오냐 마침 잘 됐군. 너희 둘 모두 따라 나와라. 안 그래도 근시일 내에 손봐주려 했던 철기문 놈들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 멸문시키러 찾아갈 필요도 없겠군. 오늘 싸그리 잡아 멸문시켜주마!"
235는 원율과 함께 적혈 노파를 따라 동부 바깥으로 나섰다.
동부 바깥.
그곳에서, 235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대체...!'
수많은 남성, 여성들이 얇아 보이는 검 한 자루에 올라타고 수인을 맺으며 법술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특별한 장치도 없는 저런 검에, 어떻게 사람이 타 있을 수 있는거지?'
235는 이해되지 않는 기현상에 그들을 올려다보았고, 그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소리쳤다.
"대마두, 적혈 노괴는 들어라! 우리 정도맹의 철기문은 더 이상 네년의 더럽고 추악한 마도 행위를 좌시할 수 없도다! 멀쩡한 인간들을 잡아 실험체로 쓰고, 인간 단약을 만들고, 민간인을 학살한 대마두 적혈 노괴는 오늘 정도맹의 정의에 따라 즉참하겠다!"
"낄낄낄낄,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게냐. 정신이 나간 게야? 내가 진법을 펼치고 있는 내 동부에 쳐들어와서 감히 나를 죽이겠다고? 너희 따위가?"
"흥, 네년이야말로 정신이 나간 것이더냐? 더 이상 결단기에 오를 가능성조차 없는 네년 따위가 뭘 믿고 우리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냐! 우리 철기문은 네년을 처리하기 위해, 장문인과 장로들 모두가 모여 축기기 다섯이서 네년을 치러 왔단 것이다!"
결단기에 오를 가능성조차 없는 네년 따위가.
그 문장을 들은 순간, 적혈 노파가 정색을 했다.
"...내가, 결단기에 오르지 못한다고?"
"흥, 꼴에 속이 긁힌 것이냐? 다시 말해주지. 네년은 마공의 부작용으로, 결단기에 오를 가능성이 없어졌지 않느냐! 크하하하!"
"......"
적혈 노파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의 동부를 포위한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원율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황급히 235를 끌어와 그녀에게서 떨어지게 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원래는, 적당한 시기에 장문인인 네놈 정도만 죽여버리고, 철기문의 현판을 부순 다음 잔당들은 내쫓아버리려 했다만... 너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어."
쿠구구구구!
적혈 노파가 수인을 맺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동부 깊숙한 곳에서 불길한 귀기와 핏빛의 영기가 몰려오며 그녀에게 연결되었다.
"철기문의 모든 잔당들에게 어떤 자비도 주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너희 모두 싹 다 죽여버린 후 내 혈시(血屍)로 제련될 것이다...!"
쿠구구구구!
적혈 노파의 머리 위로 어마어마한 검붉은 영력이 모여들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형상을 만들었다.
"적마귀염(赤魔鬼炎)!"
검붉은 불꽃의 등장에, 그녀의 동부 앞에 모여든 수사들이 긴장하는 듯 했으나, 이내 수장으로 보이는 이는 그녀를 비웃으며 소리쳤다.
"흥, 되도 않는 월계(越界) 신통술을 익혀서 그걸로 우리를 어찌 해보겠단 거냐? 웃기지도 않는군! 네년의 법력이 받쳐줄지는 둘째쳐도, 그게 펼쳐질동안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으냐!"
"어리석은 놈들. 이곳은 내 동부거늘, 당연히 수호진법이 없겠느냐? 조금만 기다려라. 적마귀염이 완성만 되면, 모조리 불살라..."
콰과과광!
그러나 다음 순간, 철기문의 수사들이 날려보낸 부적에 의해, 적혈 노파의 동부를 뒤덮고 있던 투명한 무언가가 깨져나갔다.
"멸진부(滅陣附)!?"
적혈 노파는 흠칫 놀라 그들을 노려보았고, 철기문 수사들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어리석긴! 당연히 남의 동부를 쳐들어가는 것인데 이 정도 진법에 대한 대응법도 없이 왔을 성 싶느냐! 받아라!"
그와 동시에, 깨진 적혈 노파의 진법 틈새로 다섯 축기기 수사와 그들이 끌고 온 연기기 수사로 보이는 이들이 일제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염열계 신통을 모조리 퍼부어라!"
"저 마두가 재생할 수 있는 핏물조차 남기지 못하게 해라!"
"축기기 후기 마두라도, 고작 축기기일 뿐이다! 결단기 따윈 절대 노릴 수 없게된 늙은이에 불과하니 목을 노려라! 목이 떨어지면 죽는..."
하지만 직후.
235의 눈이 커졌다.
'도, 도대체 일개 인간이 어찌 저런...'
9등신민인 그가 모든 것을 알진 못했지만, 그래도 홀리카에선 여러 정보를 접할 수 있었기에 그도 아는 것은 있었다.
은하제국의 그 어떤 초상능력자도.
저따위 재생력은, 절대로 가질 수 없었다.
촤르르르륵!
적혈 노파의 몸은, 그 모든 공격을 맞으면서도 끝없이 재생하고 있었다.
"장문인, 노괴가 죽지 않습니다!"
"도, 도대체 저게 뭐야!"
"왜 죽지 않는 거냐!"
"저건 차라리... 결단기 수사의 재생력이 아닙니까!?"
"잠깐... 뭔가 이상하다. 일단 후퇴한다. 저 노괴놈, 뭔가를 숨기고..."
"어딜 도망치느냐."
화르르르륵!
그리고, 축기기 수선자들의 공격 포화 속에서.
마침내 적혈 노파가 신통이라는 것을 완성한 듯 했다.
"적마귀염!"
화르르르!
검붉은 불길이, 붉은 마귀의 형상으로 변하며 수사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뭣, 어떻게 이렇게 빨리... 네, 네년. 네년, 적혈...! 네년 설마....!"
화르르르르!
그 어떤 축기기 수선자도 붉은 마귀 형상의 마화(魔火)를 막아내지 못했다.
수많은 연기기 수선자, 축기기 수선자들이 그대로 불타버려, 숯덩이가 되어 떨어졌다.
"외단(外丹)...! 네년, 기연을 얻었구나. 외단을 얻은 게야...!"
"낄낄... 이제 알았느냐. 그래, 외단을 통해 완전한 결단기는 아니지만... 결단기 수사의 생명력만큼은 확실히 얻어냈다!"
"이, 이년...! 내가, 내가 이리 쉽게 죽어줄 것 같으냐!"
마지막으로 남은 철기문의 장문인은 비검을 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문인이 일정 범위 바깥으로 벗어나자 적혈 노파의 적마귀염 역시 더 이상 그를 쫓아가지 못했다.
"하하, 범위는 십 장 정도인가? 하긴, 아무리 외단이라고 해도 월계 신통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룰 수론..."
하지만 다음 순간, 장문인의 눈에서 희망이 사라졌다.
적혈 노파 역시 비검 법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철기문의 장문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그녀가 진법 안에서 나오면 합공해서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주변에는 혼자뿐이었다.
"어리석은 놈. 죽어라!"
화르르르르!
장문인은 비검을 타고 그를 쫓아오는 적혈 노파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 적마귀염을 휘두르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불타기 시작했다.
"청(靑) 마(魔) 귀(鬼) 화(火)!"
다음 순간, 적혈 노파의 적마귀염이 푸르게 바뀌더니, 그대로 장문인에게 내리꽂혔다.
꾸과과광!
오싹, 오싹!
철기문의 장문인이라는 수선자가 죽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적혈 노파의 공격에, 장문인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고, 산의 일부가 그대로 깎여나갔다.
235는 많은 정보를 아는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장비의 도움 없이, 맨몸으로 저 규모의 초상능력을 펼칠 수 있는 초상능력자는... 은하제국 어디에도 없어.'
"...원율 형. 축기기 수선자라는 사람들은... 다 저렇게 강한 걸까?"
"...방금 봤잖아. 스승님은 단순한 축기기 수사가 아니야. 외단이라는 것을 통해서... 사실상 축기기 경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지셨고, 적마귀염이라는 특수한 마화(魔火)를 통해서 축기기 너머, 결단기급의 공격을 한두 번 펼칠 수 있으셔. 범위는 좁긴 하지만..."
그들이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적혈 노파가 그들에게 날아와서 말했다.
"철기문의 본진이 비었을 테니, 멸문시키고 오겠다. 내가 돌아올 동안 시체들을 정리해 놓거라. 속까지 숯으로 만들진 않았으니 혈시로 제련할 수 있을 게야. 낄낄낄!"
말을 마친 적혈 노파는 그대로 비검을 타고서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고, 그 모습을 보던 원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체들이나 치우자."
"...응."
235는 쓴웃음을 지으며, 원율과 함께 주변의 시체들을 정리했다.
E-B3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그는 여전히 시체를 처리하는 청소부 역할이었다.
* * *
어느덧 주변을 정리하다보니 저녁이 되었다.
아직도 적혈 노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235는 그의 형인 원율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눈빛을 알고 있었다.
그가 파울로에게 '폐기 처분'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의 눈빛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슬픔.
그로 인해 눈빛이 죽어버린 것이었다.
235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적혈 노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터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형. 궁금한 게 있어."
"뭔데?"
"형은... 곧 죽는 거야?"
"...!"
원율의 동공이 흔들렸다.
235는 서글픈 눈으로 원율에게 말했다.
"형. 속일 필요 없어. 알고 있어. 형이랑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이 세계에서 16년.
E-B3에서 30년.
합치면 46년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반백년에 근접한 시간동안의 기억이 235의 머릿속에 있었다.
234.
원율의 버릇과 행동에 대한 모든 것이 235의 눈에 훤히 보였다.
"무슨 일이야. 말해줘."
"...알면, 어쩔 건데 원립."
원율은 쓴웃음을 지으며 235를 바라보았고, 235는 밤바람을 맞으며 잔잔하게 웃었다.
"형. 최근에 어떤 꿈을 꿨어."
"무슨 꿈인데."
"나와 형은 어떤 먼 나라에 있는 광산에서 광맥을 채굴하는 노예였어."
"푸흡, 젠장... 꿈에서도 노예냐."
"그런데, 꿈 속에서 광산 천장이 무너지면서, 형이 그대로 깔려 죽더라고."
235는 씁쓸하게, 허망하게 죽어버린 234에 대해 말했다.
"꿈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어. 형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 전날에 파티..아니 잔치라도 할 걸. 형이랑 좀 더 홀리카...아니 이런저런 유흥이라도 하면서 좀 더 재밌게 보낼걸. 그런 생각을 했어..."
"......"
"꿈에서 깨니까 알겠더라고. 만약 형이 곧 죽게 된다면... 그 전에, 형이랑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
원율은 235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죽게 되는 이유가 누구 때문이라면, 혹시 그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
"왜?"
"그 누군가는, 네가 복수하려고 하면 널 손쉽게 죽여버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원율은 쓴웃음을 지으며 235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겠어. 복수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알려줘. 누구에게 죽기라도 하는 거야?"
"...립아. 수선계에는, 탈사(奪舍)라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
그렇게, 원율의 입에서 비참한 운명에 대한 사실이 흘러나왔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갔다.
* * *
깜빡-
235는 캡슐에서 일어났다.
지난밤.
그는 거울 너머 세계에서 원율에게 '탈사'란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잠들었었다.
탈사.
어떤 수선자가 자신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나, 몸에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혹은 외모를 바꾸고 싶을 때.
다른 수선자의 몸을 빼앗는 행위를 말했다.
영혼.
그 세상에는 영혼이라는 게 있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도 있을지 몰랐다.
원율은 235가 느꼈던, 그의 몸에 '덧씌워진' 어떤 에너지를 '혼백'이라고 불렀으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도 영혼이니, 혼백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가 원율에게서 들은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들의 스승인 적혈 노파는 일전 마공을 수련하다 입은 부작용으로 더 이상 경지를 올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했다.
때문에 적혈 노파는 원율의 몸을 빼앗아, 마공의 부작용을 초기화해버리고 그 이상의 경지를 노리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적혈 노파는 지금껏 계속 원율의 몸을 자신과 동화시키고, 자신의 마공이 들어가기 좋게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마 한두달 후라면 개조 작업이 끝날 것이고, 곧 원율의 몸을 빼앗을 것이란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일에는 원율의 협조가 어느 정도 필요했기에, 적혈 노파는 원율을 부리기 위해서 원율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
235, 즉 원립을 인질로 잡아두고 있는 것이었다.
"한두달..."
재밌는 우연이었다.
235 역시, 한두달 후라면 폐기된다.
그나마 적혈 노파라면 축기기 수사 개인일 뿐이라서 희망이 보이지만, 235를 가두는 건 그의 유전자에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하게 하는 은하제국 전체의 명령이었기에, 그는 절대로 희망이 없단 것이었다.
'한두달 후에, 내가 이 세상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려나.'
반대편 세상에서 '원립'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반대편 세상으로 건너갈 수 없이 여기에서 죽어버리고 끝인 것일까.
모른다.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역시 살고 싶었다.
계속 살아가면서, 신비로운 거울 너머 세계로 건너가 원율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누리고, 왕만두를 먹으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살 수 없었다.
칵, 칵, 칵!
그는 철광에서 바위들을 옮기고, 곡괭이질로 무너진 통로를 청소하고, 시체들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러던 도중, 철법결의 고유법술 '철금조'를 시험해보기도 했다.
광맥의 광석들은 영기가 깃든 것인지 변형되지 않았지만, 그가 가져온 곡괭이의 끝부분같은 곳은 철금조에 그대로 찰흙처럼 물러져 휘어졌다.
'이런 능력으로, 도망치거나 살거나 할 순 없겠지.'
235는 쓴웃음을 지었다.
철을 조금 변형시키는 능력으로 은하제국의 감시를 피해 도망친다?
생존한다?
절대 불가능했다.
이 정도 수준의 초상능력자들은 널리고 널렸고, 당장 파울로만 해도 인간보다 악력이 좋기 때문에 이 정도는 순수 악력으로 해낼 것이었다.
235는 그날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돌아와, 캡슐에 누구며 고민했다.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과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홀리카에 접속하며, 235는 두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형만은, 살리겠어."
그는 절대로 살아갈 희망이 없다.
하지만, 그의 형은.
원율은!
적혈 노파만 처리한다면, 살 가능성이 있다!
적혈 노파의 초상능력은 은하제국의 그 어떤 초상능력자보다 강했다.
하지만, 초상능력 하나가 조금 강한 것일 뿐이었다.
인간은 원래 초상능력따위 없다.
그저 지성으로, 도구만으로 은하 전체를 제패한 은하제국이 된 것이었다.
9등신민인 235는, 진짜 인간은 아니었으나...
인간의 문물을 사용할 순 있었다.
"검색창."
띠링!
235는 홀리카 내부 인터넷에 접속해, 수만년 전 은하제국의 모성(母星)에서 사용되었던 원시시대의 무기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다윗과 골리앗과 비슷한 시절에 만들어진, 원리는 간단하지만 위력은 뛰어난 로우 테크놀로지(Low Technology).
현 은하제국 기준으로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아, 그와 같은 9등 신민들에게까지 자세한 원리와 구조, 제작방법이 공개되어있는 신석기 수준의 무기.
레일건(Rail Gun).
'형을 구한다.'
일격에 산을 깎아내고, 끝없이 재생하는 괴물이지만.
전함 노심이나 강화장갑도 변변히 없는 초상능력자 하나 따위.
은하제국의 지성을 티끌만큼이라도 빌릴 수 있는 그에게 있어, 원시시대의 골동품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초상능력자일 뿐이었다.
235는 레일건 제작을 위한 정보들을 내려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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