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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지몽(胡蝶之夢)(2)

DUMMY


"철광산으로 보내주마."


다음 날.

235는 적혈 노파에게 마침 그를 건넛산에 있는 철광산으로 보내주겠단 제안을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오냐. 네게 생성시켜준 금영근은 철광맥이 많은 곳에서 최대의 효용을 발휘하니, 철법결을 수행하기에 최고일 것이다. 다녀오너라."


적혈 노파는 눈에 띄게 좋아하는 235에게 여러 영약과 간단한 호신법기, 그리고 자신이 제련한 혈시(血屍)들까지 딸려서 함께 보냈으며, 원율과 함께 동부의 바깥에서 친히그를 배웅해주기까지 했다.


원율은 235를 꼭 안아주었고, 그가 철광산 쪽으로 혈시들과 함께 건너가는 것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왜지...'


이상했다.

원율이 느끼기에, 그의 의동생인 '원립'은 어째서인지 오늘과 어제의 분위기가 달랐다.


어쩌면 원율이 원립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괜히 스승의 탈사에 대한 것을 말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원립을 배웅하던 원율의 어깨가, 적혈 노파의 억센 손아귀에 잡혔다.


"율... 네 동생에게 말했구나. 내가 널 탈사할 것이란 것을...?"

"예...?"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원율은 화들짝 놀라 적혈 노파를 바라보며 한 발 물러서려 했으나, 적혈 노파의 억센 손에 잡혀 오히려 적혈 노파의 얼굴 앞으로 끌려와야 했다.


"어찌 알았는지 궁금하더냐...? 그래. 나도 궁금하구나. 네 동생이 어떤 기연을 얻은 것인지, 네게 무언가 말해주는 건 없더냐?"

"...스승님,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큭큭큭..."


원율의 반응에, 적혈 노파는 소름끼치게 웃으며 원율을 내팽개쳤다.


"앙증맞은 것 같으니. 감히 이 적혈에게 너희의 잔꾀가 통할 것 같으냐?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네 동생은 내가 잘 봐줄 것이니. 그리고 혹여나... 허튼짓하지 말라고 전하거라."


적혈 노파는 당황하는 원율의 눈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네 동생에게 딸려 보내준 법기는 물론이고, 단약은 전부 본노의 열신(裂神)을 불어넣은 것들이다. 내 본명 혈충은 아니지만, 어쨌든 본노가 명령하면 즉시 자폭할 수 있는 것들인 터... 네 동생에게 전하거라. 허튼짓하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네 동생에게 딸려보낸 혈시들의 눈과 귀는 모두 본노와 연결되어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혈시들을 부려 못 하게 할 것이니, 네 아우에게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란 말이다. 이해했느냐?"

"...예."


원율은 적혈 노파의 눈치를 보며,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를 눈치챘다.


'원립 이 녀석...'


어젯밤, 자신에게 탈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원립이 적혈 노파에게서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적혈 노파가 알아채고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터였다.


원립의 의형제로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원립을 향한 걱정이 앞섰다.


'무사해야 할텐데...'


적혈 노파는 빈말을 하는 게 아닐 터였다.

노파의 혈시들이 항상 그를 감시하고 있는만큼, 원립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그는 큰 낭패를 볼 것이 분명했다.


원율로서는 그저 원립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기에, 그는 서글픈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적혈 노파는 그런 원율을 밀쳐낸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타닥, 타다다닥...


적혈 노파의 방 중앙에서는 뭔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뼛조각이었는데, 적혈 노파는 무언가의 뼛조각을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불타서 쪼개진 뼛조각의 모양들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3계 괘우(卦牛)의 뼛조각을 태워 점을 쳤는데, 이번 대법(大法)에서 주의할 점이 원립 그 꼬맹이가 만드는 법기 하나 뿐이라..."


이번 대법은 그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기회였다.


탈사(奪舍)!


수선자가 다른 수선자의 몸으로 혼백을 옮기는 무시무시한 행위!


한 번 몸을 옮기기만 한다면 육신에 입은 어떤 치명상도 쉬이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으며, 늙은 외모는 젊은 외모가 되고.

빼앗은 몸의 자질에 따라서 더욱 더 높은 경지를 노릴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어떤 경우엔 탈사한 대상과의 궁합에 따라 수명 증가까지 노려볼 수 있다 하니...

그야말로 수많은 수선자들이 갈망하는 것이 바로 탈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탈사지법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좋은 수법임에도 불구하고, 탈사지법이 흔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장점이 있는 만큼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이 탈사지법이었다.

부작용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탈사지법의 부작용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가장 첫째로, 우선 새로 빼앗은 몸과 영혼간의 괴리였다.

예를 들어 성별이 여성인 이가 남성의 몸을 빼앗는다면 몸과 영혼의 괴리가 커서 점차 광증이 치솟거나 심마(心魔)가 찾아와 경지를 올릴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심한 경우, 공법 자체가 반서를 일으켜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두 번째는 탈사를 많이 하다 보면 점차 영혼이 깎여나가며 탈사하는 대상에게 오히려 혼백 자체를 헌납하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세 번째는 탈사한 대상의 원념이었다. 몸을 빼앗긴 비통함과 원통함은 제대로 해소시켜주지 않는 한 저주로 남아서 영원히 당사자를 따라다녔고, 이는 경지를 올릴 때에 심각한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외에도 탈사지법 자체가 흔하지 않고 귀하다거나, 과정 자체가 번거롭고 어렵다거나, 탈사하는 순간에는 취약해진다는 둥 이런저런 장애들이 꽤 있었기에, 탈사지법은 탐내는 이들이 몇몇 있긴 해도 수선계 전체에 흔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혈 노파는 위의 부작용들을 대부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얻은 공법에는 저러한 부작용들을 대부분 혈제(血祭)와 식육(食肉), 학살을 통해 크게 완화시키거나 무효화시킬 수 있는 비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신경쓰는 부작용이 둘 있었다.


'원율 녀석의 원념! 그리고 탈사할 때 취약해져서 어떤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었거늘...'


우선 원율의 원념은 원율과 협상하며, 원율의 동생 원립을 죽이지 않고 제대로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것과 평촌 마을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가만히 놔두겠다는 계약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가능했다.


그리고, 탈사하는 시기에 몸이 취약해지는 것 역시 근방의 정도 문파인 철기문을 궤멸시킴으로써 해결했다.


그랬기에 더 이상의 위험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적혈 노파는 이전에 기연이 있어 얻은 괘우(卦牛)라는 요수의 뼈로 점괘를 쳐 보았으나, 결과는 꽤나 성가신 것이었다.


'원율의 동생놈인 원립... 그 녀석이 갑자기 [탈사 순간 법기로 나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라는 점괘라니...'


그녀는 눈을 흘기며 점괘의 결과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몇 번이나 같은 결과였다.


그 결과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원립이 원율에게서 곧 원율이 탈사당해 죽는단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적혈 노파를 제지해보려 한다는 소리였다.


때문에 그녀는 방금 전 원율을 윽박지르며 원립에게 '얌전히 있으라'라고 전하게 시켰다.


그리고 본래는 원립을 법기와 제련 재료가 풍부한 철기문으로 보내서, 그녀가 멸문시킨 철기문의 재산을 관리하게 해 보려고 했다.

그녀가 부여한 인공 영근으로 수행 중이었기에 큰 기대를 안 했었으나, 근 며칠간 꽤나 수행에 진보가 있는 것 같아 내린 결심이었다.

하지만, 점괘의 결과를 본 순간 그녀는 원립을 철광산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건넛산의 철광산은 법기 재료같은 것은 구할 수도 없는 평범한 철광맥이었으니까.


법기를 만들어보려고 해도 뭘 할 수도 없으리라.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녀는 눈과 귀가 이어진 혈시들을 보내 원립을 감시하게 시켰다.


'아마 녀석이 법기로 나를 해한단 점괘는 철기문에 숨겨진 법기를 찾아내기라도 한다는 거겠지. 끌끌... 하나 점괘를 보고 철기문과는 관계없는 곳으로 보내뒀으니, 나를 해하게 할 인과는 전부 끊어두었다. 운명은 나를 선택하고 있다. 이 적혈이야말로 승리자인 것이다!'


그녀가 얻은 괘우의 뼈는 점괘술에 있어서 최상급의 재료였다.

본래라면 원영기 노괴들조차 구하기 어려워하는 상고시대 요수의 뼈였으니까.


그녀는 지금껏 이 재료를 통해 높은 경지의 수선자에게 괘우의 뼈를 바치고 살아남거나, 그녀가 직접 점복술을 펼쳐서 정해진 운명을 바꿔 살아남을 수 있었었다.


'다만 이젠 괘우의 뼈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아마 점복술을 서너번 정도 더 펼치면 끝일 터였다.


'이번 탈사대법에는 더 이상 남은 화가 없다. 나머지 뼈는 아껴두고, 이제는 오롯이 원율 녀석의 몸을 점차 내 혼이 들어가기 쉽게 개조하는 단계만이 남았다.'


적혈 노파는 히죽 웃으며 미래를 상상했다.


'이번 탈사를 통해, 내 몸에 축적된 마공(魔功)의 부작용에서 벗어나고, 결단기로 승급하는 것이다. 결단기...!'


그녀의 눈엔 결단기라는 경지를 향한 강력한 갈망이 응집되어있었다.


"반드시 이번 생애에 성단(成丹)할 것이다...! 반드시...!"


* * *


다음 날.


원율은 원립을 찾아갔다.


"...원립. 뭘 하는 거야."


원율이 적혈 노파의 눈빛에서 짐작한대로, 원립은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기다란 쇠막대기였다.


"아, 형 왔어?"

"뭘 하는 거야 원립."

"아 그냥 뭐... 갑자기 형이랑 있다가 떨어지니까 심심하기도 해서, 철법결 수행도 할 겸..."

"뭘 하는 거냐고, 원립!"


원율은 호통을 쳤다.


원율은 성난 얼굴로 원립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이걸로... 스승님을 어쩌려는 거야!?"

"......"

"너..."


원율은 원립의 눈에 담긴 살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비록, 법기도 뭣도 아닌 그냥 커다란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원립의 눈에 담겨있는 것은 분명한 살기였고, 원율은 잘은 몰랐으나 원립이 이걸로 적혈 노파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만둬라, 원립."


원율은 적혈 노파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적혈 노파는 법기조차 아닌 이런 쇠막대기 따위로 죽을 인간이 아니었다.

어떨 땐 차라리 인간이 아니라 요괴 같아보이기도 했다.


그의 스승은 이런 쇠막대기 따위로 죽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은 적혈 노파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시도' 그 자체였다.


"위험하다. 스승님은 네가 그분을 시해하려 시도를 했단 것만으로... 네게 상상하기도 힘든 벌을 내리실 거다..."


원율은 원립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그만둬다오, 원립. 나는 그냥 네가 멀쩡히 살아갔으면 좋겠어..."

"...형."


그리고, 원립은 작은 목소리로 원율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 나는, 이런 발악이라도 해 볼래. 만약 형이 죽는다면, 내가 이런 발악이라도 하지 않고 그냥 죽어버린다면... 나는 버틸 수 없을 거 같아."


원율은 입술을 악물었다.


"...이... 개새끼가!!!"


퍼억!


원율은 원립을 때렸다.


퍼억, 퍼억, 퍼억!


"누가, 누가, 누가...! 너한테 이딴 짓 하라고 부탁이라도 했단 말이냐! 버러지 새끼가 고아랍시고 다리밑에 버려져 있던 게 측은해서 좀 주워서 키워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이상한 짓을 해서 내 목숨까지 위협하려 해! 이 버러지 놈. 네가 뭘 아느냐! 스승님께선 이미 나를 위해 예비 육신을 마련하셨단 말이다! 나는 스승님께 이 육신을 빼앗기고 예비 육신으로 들어가 스승님의 진짜 제자가 될 수 있어! 그런데 네놈이 이따위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면 스승님은 나를 그냥 죽여버리실 거란 말이다! 하지 말라면 그냥 하지 말아라! 이 버러지 놈아!"


그러나, 그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반항 하나 하지 않는 원립을 보며, 원율은 눈치챘다.


'아...제길.'


알아챘다.

원율이 원립의 눈에서 살기를 읽는 것이 가능했듯이.

원립 역시 원율의 눈에서 거짓을 눈치챈 것이었다.


"...제발... 어리석은 짓 좀 하지 말아라... 네 주위에 있는 혈시들... 전부 스승님의 눈과 귀란 말이다."


원율은 원립의 귀에 작게 속삭였으나, 돌아온 대답은 원율의 가슴을 더욱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알아 형. 그러니까... 계속하는 거야. 스승님께서 느끼시기에, 아무런 위협도 안 되는 멍청한 행동 같아 보이니까 그냥 내비두시는 거란 거. 다 알고 있어."

"...머저리 같은 새끼..."


원율은 원립을 더 설득할 기분도 들지 않아 그를 팍 밀쳐낸 후 산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원립이 건넛산 철광산으로 가고 난 후 첫째 날이 지났다.


* * *


둘째 날.


원율은 원립을 다시 찾아갔다.


이날은 쇠막대기 주변에 뭔가 지지대 같아 보이는 것이 더 완성되어 있었다.


원율은 그 답답함과 어리석음에, 화가 치밀어 올라 원립에게 달려들어 원립을 두들겨 팼다.


원립은 저항없이 원율에게 두들겨 맞고만 있었다.


한참을 원립을 두들겨 패던 원율은, 끝끝내 원립의 입에서 '포기하겠다'란 소리가 나오지 않자, 결국 돌아가 버렸다.


* * *


셋째 날.


이날은 원립이 철광석 대신 구리 광석과 자철석(磁鐵石)을 잔뜩 구해서 모아놓고 있는 걸 보았다.


혈시들은 적혈 노파가 원립을 호위할 겸 기본적인 잡다한 일들을 도와주려 보낸 것이기에, 날랜 혈시들을 타고 도성으로 가 자철석을 약탈해왔다는 것 같았다.


왜 자철석을 갑자기 이렇게 뭉텅이로 구해왔는지는 둘째치고, 이딴 자철석 쪼가리 따위론 절대 적혈 노파를 이길 리 없다는 걸 알았기에, 원율은 속이 탈듯이 답답해질 뿐이었다.


결국 원율은 원립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제발 스승님의 기휘를 범하지 말라고.


적혈 노파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엉엉 울면서 빌 뿐이었다.


원립은 조금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으나, 끝끝내 원율이 아무리 빌어도 '포기하겠다'란 소리는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원율은 소득없이 돌아와야 했다.


* * *


넷째 날.


원율은 원립이 혈시들을 시켜 무언가 공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혹여라 영기를 모아 술법으로 바꾸는 진법을 만들려는 것인가 싶어 봤으나, 그냥 건물을 하나 짓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어, 그날은 그냥 적혈 노파의 동부로 돌아갔다.


* * *


다섯째 날.


원율은 원립을 찾아가 혈시들의 눈을 피해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립아. 말해다오. 네 태도를 보아하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구나. 정 그렇다면 나도 조금 보태주려 하마. 네 계획이 뭐냐. 너는 무슨 계획을 가지고서 스승님을 어찌 해보려는 것이더냐. 진실을 말해다오."


그 말에, 원립은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원율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진심어린 태도에, 원율은 조금 더 신뢰가 가는 것 같았다.


"잘 생각했어, 형. 내 계획을 말해줄게. 여기 말로는 뭐라고 하지...? 아, 그래 투석기. 혹시 투석기라고 뭔지 알아?"

"...투석기가... 뭐냐."


투석기.

돌을 던지는 기구라는 뜻이었다.

단어의 뜻만 봐도 불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원율은 꾹 참고 원립에게 질문했다.


"공성(攻城)에 대해선 알지? 성벽을 무너뜨릴 때 쓰는 돌 던지는 기구야. 그러니까... 물매! 물매를 생각하면 돼!"

"...물매...?"

"그래, 물매. 난 물매를 만들 거야. 쇠막대기로 된 물매! 이 쇠막대기를 물매 비슷한 걸 통해서 적혈 노파에게 날려보낼 거야. 어때, 괜찮지?"

"......"


원율은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매라니!


돌을 빙글빙글 돌려서 던지는 기구에 대해선 대충 알았다.

새를 사냥할 때 쓰거나, 심심할 때 돌팔매질을 할 때에 쓰는 것이었으니까.


작은 가죽이나 천조각만 조금만 있으면 만들 수 있었으니, 원율도 어렸을 적 원립과 함께 물매를 만들어서 놀거라 작은 새를 사냥해 끼니를 채운 적 있었다.


그리고, 원립의 생각은 저 쇠막대를 물매 비슷한 걸 만들어서 스승님께 날린단 소리 같았다.


아마, 투석기란 기구가 돌을 던져 성벽을 무너뜨릴 때 쓴다니 쇳덩이를 던지면 좀 더 셀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나 얕았다!


"......"


원율은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 되어, 말없이 적혈 노파의 동부로 돌아왔다.


* * *


여섯째 날.


-립아. 말해다오. 네 태도를 보아하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구나. 정 그렇다면 나도 조금 보태주려 하마. 네 계획이 뭐냐. 너는 무슨 계획을 가지고서 스승님을 어찌 해보려는 것이더냐. 진실을 말해다오.


원율은, 스승인 적혈 노파가 작은 벌레 한 마리를 들고 그 벌레의 입에서 자신이 어제 말했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보며... 아연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낄낄낄... 이 녀석. 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더구나. 왜, 네 동생 놈이 만드는 것이 허황된 것이 아니면 한 번 이 나를 어찌 해 보려 했더냐? 이 적혈을? 태원대륙 모든 축기기 수사들의 정점에 서있는 이 적혈을? 외단(外丹)을 통해 한없이 결단기에 가까운 이 적혈을?"

"......"

"푸하하, 그래. 물매, 물매라. 투석기라! 어쨌든 뭐 네녀석을 통해 네 동생의 귀여운 계획을 들었으니 되었다. 아마 철기문에 보냈으면 철기문의 자폭 법기를 날려댔을 테니 확실히 위험할 수 있었겠군."


적혈 노파는 원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동생의 귀여운 계획은 흥미가 없다. 하지만 나는 네 태도가 심히 거슬리는구나, 율아."

"...죄송...합니다. 스승님."

"네 동생이 무슨 발악을 하든. 조금 불쾌하긴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물매 같은 것으로 사실상의 결단기 수사와 다를 바 없는 이 적혈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이 내가 더 신경쓰는 것은, 아직도 네 마음에 역심(逆心)이 남았다는 것이야..."


그녀가 원율의 머리채를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원율, 원율아... 네놈이 이렇게 역심을 품고 있다면, 내가 어찌 네 몸을 탈사한 후에 네 동생을 좋은 마음으로만 봐 주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원율은 눈물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오열했다.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제 아우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그는 완전히 죽은 눈으로 변하며 적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빌었다.

원율의 눈을 본 적혈은 낄낄 웃었다.


"원율. 내 혈시들의 눈을 피한다 하여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잊지 마라. 내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다. 너희는 내 손아귀에 있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자가,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그래, 옳지. 옳지. 착하구나 원율."


적혈은 원율의 턱을 붙잡으며 웃었다.

적혈의 주름진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이제야... 마음이 제대로 붕괴되었군. 이제 슬슬 원념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죄송, 죄송합니다... 제자가, 제자가..."

"계속 빌어라, 계속 빌어라 원율. 내 기분이 좋아질수록 네 아우를 내버려둘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그날.

원율은 적혈 노파의 발을 핥으며 하루 종일 적혈 노파에게 애원하였다.


제발 동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 * *


일곱째 날, 이레.

칠주야(七晝夜)가 지났다.


원율은 다시 원립을 찾아갔다.


원립은 오늘 마을에서 수차(水車)를 가져와서 근처 개울에다 설치하고, 수차를 구리선으로 자신이 지은 건물과 연결하고 있었다.


뜬끔없이 수차나 짓고 있는 그 모습에, 원율은 서러움과 분노, 고통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그 자리에 쓰러져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나마 그 날은 원립이 원율을 위로하느라 더 이상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 * *


열다섯째 날.


보름.


십사주야가 지났다.


어느덧, 원율은 원립이 혈시들을 이용해 지은 건물과 그가 만들었다는 '쇠물매'를 바라보았다.


원립이 지은 건물 아래쪽에서는 수차가 개울물에 따라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건물 위쪽으론 커다란 바람개비들 수 개가 곳곳에서 오는 바람을 모아 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원립의 부탁에 따라 혈시들이 커다란 물레 같은 것을 끊임없이 돌리고 있었다.


또 한 곳에선 혈시들이 나무를 떼서 어딘가에 장작을 넣고 있었다.


"...저건 또 뭘 하는 거냐."

"물을 끓여서 증기로 만들고 있어."

"...물을 끓여? 물을 끓인다고?"


화가 치솟았다.


자신은 이제 보름 후에 죽는다.


그런데, 의동생이라는 녀석은 혈시들을 시켜서 물이나 끓이고 있단다.


요리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도대체가... 스승님께 반항하겠답시고 쓸데없는 짓은 계속 일으키면서. 그렇다고 결과물은 뭔가 있어보이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법술을 연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물매를 만드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 아직까지도 이딴 건물을 지어놓고 물이나 끓인다는 거냐."


원율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알아챘는지, 원립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이건..."

"됐다! 닥쳐라! 너, 철법결은 얼마나 수행했느냐. 내가 지난번에 도인해준 이후로, 제대로 수행하긴 하는 거냐! 하루도 네가 제대로 가만히 앉아서 공법을 수련하는 걸 본 적도 없어! 이깟, 이깟!!!"


콰아앙!


원율은 귀화술을 써 원립이 가져온 수차를 불태워버리고, 그가 만든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깟 개 같은 것들이나 만들면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어! 대체, 대체... 뭘 하는 거냔 말이야. 원립! 나는... 시간이, 시간이 없다고..."


원율은 진심으로 답답함과 분노가 섞인 소리를 내지르며 그의 어깨를 잡고 오열했다.


"너랑 같이 보낼... 시간조자 부족한데, 왜 너는 아무 의미없는, 아무 쓰잘데기없는 장난감들이나 만들면서... 이러고 있단 거냐..."


이 순간에도, 원립은 그를 신경쓰지 않고 불타는 수차와 건물을 경악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원율은, 진심으로 원립을 강하게 밀쳐버리고 동부로 돌아갔다.


"...됐다. 넌 이제 내 형제가 아니야. 꺼져."


심란했다.


그 심란한 마음을 안고서 동부에 도착하자, 적혈 노파가 낄낄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냐? 낄낄낄... 바람개비랑 수차 좀 만들었다고 왜 네가 더 화를 내는 게냐? 나는 그런 것쯤은 얼마나 만들든 상관 없다만?"

"......"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의 스승은 더 이상 원립을 위험하게 느낀다거나 불쾌해하진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죽더라도... 원립을 죽이시진 않겠지.'


안도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이 욱씬거렸다.


원율은 방으로 돌아가, 침소에 쓰러져 작은 목소리로 오열했다.


"...미안...하다... 원립. 미안해..."


이제는 내일부터 원립을 찾아갈 면목조차 없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 됐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원립이 그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원율은 눈물을 흘리며, 곧 몸을 빼앗겨 죽는다는 공포와 절망, 그리고 의동생인 원립과의 관계를 제 손으로 깨버렸단 슬픔에 혼절하듯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 * *


스무 날이 지났다.


보름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원율이 찾아가지도, 원립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원율은 이제는 열흘 남은 자신의 수명을 인지하며, 하루하루 영혼이 매말라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이제 그는 어느 정도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스승님이 원립을 죽이지만 않으면... 그걸로 된 거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스승님. 제자 원립이 찾아봽습니다."


원립이, 동부를 찾아왔다.


원립은 적혈 노파를 찾아가 간단하게 문안을 드린 후 원율에게 찾아왔다.


"...형."

"...원립...이냐."


원율은, 원립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매몰차게, 원립이 고생해서 만든 것을 불태워 버렸는데 무슨 면목으로 그를 바라보겠는가.


심지어 원립이 만든 것은 나름 원율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모조리 제 손으로 불태워버리고, 의절까지 하면서 떠나가버렸는데, 무슨 면목으로 원립을 쳐다본단 말인가...


'날 타박하러 온 건가. 그래, 밉겠지. 미워해라. 날 잔뜩 미워하고, 차라리 신경쓰지 말고 떠나버려라. 스승님은 너라면 떠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으실 테니...'


하지만 원립에게서 들려온 말은 원율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왕만두, 먹으러 가자."

"......"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원율은, 결국 원립의 손에 잡혀 나와 평촌으로 내려갔다.


* * *


"...미안하다. 네가 만든 것을 그리해서."


장 씨 아저씨네 집에서 왕만두를 함께 먹으며, 원율은 원립에게 사과하였다.


그러나 원립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됐어 형. 어차피 수리하는데 얼마 안 걸렸어. 철법결 이거, 금속을 다루는 데엔 정말 편리하더라고. 목재 부분은 혈시들에게 부탁하니까 다 알아서 만들어 줬고."

"......"

"스승님이 혈시랑 감각을 공유한다는 것도 알아. 문안드리러 갔는데, 바람개비랑 수차를 뭘 그리 만드냐며 비웃으셨으니까. 아마 스승님이 다 윤허하신 일이겠지. 발악이나 해 보라면서. 그러니까 형...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


원립은 왕만두를 허겁지겁 흡입하며 원율을 안심시켰다.

동생의 위로를 들으며, 원율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 어물거리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눈물이 나왔다.


동생보다도, 어려진 것 같았다.


"...원립. 난 사실..."


그리고, 원립은 왕만두를 다 먹고 일어나 원율을 잡아끌었다.


"됐어, 형. 당과나 먹으러 가자."


원립은 원율과 함께 마을의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온갖 당과와 음식을 먹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온갖 요리를 맛보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 * *


스물 한 번째 날.


원율은 적혈 노파에게 '아흐레 뒤 대법을 거행하겠다'란 말을 들었다.


더욱 더 우울해지려던 찰나, 오늘도 원립이 동부로 와 원율을 불러냈다.


그날은 두 사람이 함께 냇가로 내려갔다.


"형, 물수제비나 해 볼래?"

"하, 물수제비나 하자고 부른 거냐?"


원율은 원립의 천진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지만, 일단 같이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냇가에서 물수제비를 던졌다.


퐁, 퐁, 퐁, 퐁!


원율의 물수제비는 네 번을 튕겼고, 원립은 처음에는 그리 잘하지 못했으나 몇 번 연습하자 일곱 번까지 수면을 튕겼다.


"이 놈이, 제법 물수제비를 잘 하는구나!"


어느덧, 원율은 원립과 물수제비를 하며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계속 돌을 던졌다.


두 사람은 한참을 냇가에서 놀다, 이번에는 숲속으로 들어가 숨박꼭질을 했다.


원립은 열여섯. 원율은 열여덟으로, 둘 모두 어엿한 성인이었지만... 재밌었다.


원율은 그날 하루 모든 근심을 잊고 원립과 함께 냇가, 숲속, 민가를 돌아다니며 실컷 놀았다.


숨박꼭질은 물론이고 씨름, 닭싸움, 제기차기는 물론이오, 연까지 만들어 연싸움도 붙어보았다.


이날 하루는 모든 근심이 없어졌다.


* * *


스물 두 번째 날.


원율은 원립의 수행을 봐 주었다.


매일같이 적혈 노파의 옆에서 온갖 영약과 영물로 보조받고, 적혈노파가 직접 추궁과혈과 격체전공까지 아낌없이 해 주는만큼 원율은 어느덧 연기기 6성의 경지였다.

그러나 기이했다.


원립 역시 벌써 연기기 5성인 거였다.


"너 이놈... 도대체가... 매일같이 선경(仙境)에라도 다녀오는 게냐?"


생각외로 원립은 철법결을 열심히 수련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철광맥이 정말 효과가 좋았거나.


"선경은 천지영기의 농도가 우리 세상의 수백배라던데, 정말 선경에라도 다녀온 것 같군..."


하지만 정말로 이 수련 속도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기에, 원율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원율의 말에 원립은 어색하게 웃으며 원율의 눈을 피했다.


'녀석...'


아마 열심히 수행한 것이 들켜 부끄러운 것일 터였다.


'노력하는구나.'


그가 알기로, 적혈 노파가 원율과 원립에게 먹인 영근 각성 영약은 다른 것이었다.


원율은 적혈 노파가 꼭 찾던 귀한 영체(靈體)인지라 귀한 영약을 먹여 영근을 각성시킨 것이었으나, 원립이 먹은 것은 말 그대로 실험용 영약이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의 영근은 차이가 있었다.

원율의 영근은 제대로 된 선천 영근을 가진 수선자에 비견되는 반면, 원립의 영근은 단일영근임에도 불구하고 수련 속도는 잡영근과 같다고 했다.


단일영근과 잡영근의 단점만 합쳐놓은 것이 원립의 영근이라고 했는데, 대량의 희생을 요하는 흉악한 마공을 익히지 않는 이상 그런 영근의 격차는 뛰어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영근끼리의 격차가 얼마만큼 있는지는 아직 잘 몰랐으나...

그런 소리를 들었던 만큼, 원율은 원립이 피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


부디 내가 죽은 후에도...

이렇게 열심히 수련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길...


원율은 원립을 칭찬해주며, 원립에게 법력을 다루는 법.

혹은 철법결의 법술 등에 대해 더욱 더 상세히 봐 주었다.


그들은 그날 하루 수선과 법술에 대해 하루 종일 토의하며 보냈다.


* * *


스물 세 번째 날.


"이제 칠주야 후다."


원율은 적혈 노파에게 그 말을 들은 후 울적해졌다.

하지만 이날도 원립이 다시 원율을 찾아왔다.


원율은 그날 적혈 노파의 허락을 받아, 혈시들과 함께 평촌 인근에 있는 성부로 나들이를 갈 수 있었다.


혈시들은 몸에 붕대를 감고, 커다란 가마를 이끌며 원율, 원립을 태우고 성부 내를 돌았다.


원율은 평생 몇 번밖에 와본적 없던 성주부의 화려함에 혀를 내둘렀다.


적혈 노파의 혈시들을 알아본 성주부 사람들은 노파의 혈시가 들쳐맨 가마를 보며 엎드려 절을 올렸다.


"허, 참... 이런 취급도 다 받아보는군."


고아였을 당시엔 성주부에 사는 사람들은 쳐다보기도 힘들었는데, 죽기 직전이 되니 모두가 우러러보는 몽이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원립을 보니, '순혈 인간들이 나에게 절을 하고 있어!'라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순혈 인간이란 건 또 뭐냐...'


이해할 순 없었지만 원립이 좋아하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이 놈, 은근 사람들이 조아리는 걸 좋아하는군.'


그가 보기에, 원립은 꽤나 권력을 가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스승님께 말해서, 원립을 성주가 되게 해 줄까.'


아마 그의 부탁이라면 분명 들어줄 터였다.


여하튼.

원립과 원율은 그날 하루 성주부를 돌아보며, 여러 고관대작의 대접을 받기도 했고, 이름난 무림고수들의 대접을 받아보기도 했다.


또한 성주부의 화려함과 시끌벅적함을 만끽하고, 성주부의 맛난 음식과 진귀한 물건들을 사들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샀다기보단 적혈 노파의 악명을 아는 고관대작들이 그들을 따라다니며 대신 사 준 것이긴 했지만...


원율과 원립은 그날 성주부에서 '폭죽'이란 것을 사서 동부로 돌아갔다.


불꽃놀이란 걸 해보자고 약속하면서.


* * *


스물 네 번째 날.


원립은 원율을 평촌에 있는 서당으로 데리고 가, 마을 아이들과 청년들을 모이게 해 한바탕 여러 놀이를 즐겼다.


둘이서는 하기 힘들던 여럿이서 할 수 있는 놀이.

혹은 장기나 바둑 등 고급진 놀이를 즐겨보았다.

마지막에는 청년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 사냥을 해 보기도 했다.


원립은 귀화술로 멧돼지를 잡아보려 했으나, 생각보다 날래서 멧돼지를 잡을 순 없었다.


마을 청년들 역시 농사만 짓던 이들이라, 사냥은 제대로 못 하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그렇게 사냥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과정이 재밌었기에, 원율도 즐거웠다.


* * *


스물 다섯번째 날.


이날은 원립이 그냥 원율과 하염없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원율은 맑은 공기과 햇살을 받는 걸 특히 즐겼는데, 뛰어난 경치를 보는 것도 즐겼다.


그날은 평촌 주변 산과 들을 오르내리며, 인근에서 경치가 멋지다고 소문난 곳을 찾아 유람했다.


"형, 술이란 걸 한 번 좀 먹어볼래?"

"오냐. 줘 봐."


원율은 원립이 가져온 술을 받아들고, 서로 마셨다.


경치가 좋으니, 맛있었다.


원율은 이전에 부잣집에서 준 술을 조금 마셔본 적이 있었기에 처음은 아니었지만 원립은 처음 먹는 술이었기에 순식간에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지만 원율은 흐트러진 원립의 모습을 보는 게 퍽 재밌었다.


두 사람은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대작을 하며, 자연의 풍광을 즐겼다.


인사불성이 된 원립을 데리고 동부로 돌아가며, 원율은 이상한 감정이 드는 걸 느꼈다.


* * *


스물 여섯번째 날.


원립은 이날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잔뜩 해보자며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날은 미친듯이 재밌었다.


와장창!


두 사람은 평촌으로 내려가 어린아이처럼 장독대를 몰래 깨고, 벌레들을 아낙들에게 던지며 놀래키고, 외양간에 불을 질러보았다.

...물론 외양간에 불을 지른 건 너무하다 싶어, 중간에 꺼 버렸다.


여하튼 원율은 도깨비불로 사람들을 놀래키거나, 법술들을 사용해서 평촌 사람들을 실컷 골려주었다.


이날만큼은 순수하게 재밌었던 일이 너무 많았기에, 나흘 뒤에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는 장 씨 아저씨의 약초주를 훔쳐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약초주를 함께 마시며 이전에 성주부에서 사온 폭죽을 터트렸다.


퍼엉, 퍼엉, 퍼엉!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에, 원립과 원율은 모두 넋을 잃었다.


그들은 그날, 이전에 사온 폭죽을 모조리 소진할 때까지 계속해서 폭죽을 터트렸다.

낮시간동안 두 형제를 욕하던 마을 사람들도, 폭죽을 터트릴 때에는 뒷산에 함께 올라와 떡과 전병을 함께 나누며 즐겁게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 * *


스물 일곱째 날.


이날은 원립이 찾아오지 않았다.


원율은 의아해서 자신이 철광산 쪽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그는 원립이 쇠막대가 담긴 지지대 같은 것을 평촌 뒷산.

두 사람이 불꽃놀이를 감상했던 곳으로 옮기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따위 쇠물매로 적혈 노파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냐며 꾸짖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얼마간 원립을 바라보다, 적혈 노파를 찾아가 원립의 행동에 용서를 빌었을 뿐이었다.


적혈 노파는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은 원율의 삶을 고려해준 것일지.

이전처럼 윽박지르지 않고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되었다. 걱정하지 마라. 비록 무례한 짓이지만, 내 용서해 주마. 이후에 네 아우는 내 직전제자가 되어 수많은 범인들의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그래 뭔가 원하는 것은 없느냐?"

"...스승님, 사실..."


원율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그녀에게 부탁했다.


"제 아우가, 뭇사람들에게 떠받들여지는 걸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후에, 꼭 제자로 거두시지 않더라도 아우가 성주가 될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으실지요..."

"하하하, 뭐 그런 걸 그렇게 조심스레 부탁하느냐! 걱정 마라, 수선자가 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네 동생은 내 책임지고 성주로 만들어주마."

"...감사합니다."

"또 원하는 게 있느냐?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장소라든가... 만약 원하면, 이 일대에서 네가 원하는 곳에서 네가 눈 감을 수 있게 해 주마. 네가 보고 싶어하는 경치에서 탈사를 진행해주겠단 소리다. 그런 걸 원하는 게 있으면 재깍재깍 말하거라."


그는 그렇게, 그날 하루 원립이 발악하는 것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하루를 보냈다.


* * *


스물 여덟째 날.


원립이 특이한 것을 부탁했다.


"...평촌 마을 사람들을, 다 내쫓아 달라고...?"

"응, 형. 뒷산에 쇠물매를 설치했는데, 동네 꼬마아이들이 자꾸 다가와서 만지려고 하더라고. 혈시들한테 처리해달라 하면 애들을 죽일 것 같아서... 아예 이럴 거면 몇 주야 동안 마을 사람들을 전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쫓았으면 좋겠어."


멀쩡히 살던 마을 사람들을 갑작스레 마을 바깥으로 내쫓아 달라니! 그것도 고작 어린애들 몇이 귀찮게 한다고!


"형, 제발... 부탁이야."


그러나 원율은 원립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봐라."


스승인 적혈 노파도, 이젠 원립이 뭘 하든 신경도 안 쓰고 오히려 용서해 주겠다고 약조까지 해 주었다.

마지막 날이 되어가니 원율이 역심을 드러낼까 신경쓰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 정도 부탁은 적혈 노파도 들어줄 성 싶었다.


"그리고 형. 혹시... 스승님이 형을 탈사하는 장소. 어디인지 알 수 있어?"

"...몰라. 다만 스승님이 내가 원하는 곳에서 대법을 해 주겠다 했어. 이 인근에 한정해서..."

"그럼 형. 혹시 평촌에서 해달라고 하면..."


원율은 얘기하다 말고 뭔가를 깨달았다.


"...너... 뒷산에서..."

"...쉿."

"......"


잠시 원립을 쳐다보던 원율은, 이제는 화조차 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아니, 화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푸하하..."


그래.

마지막까지 저렇게 발악해보는 게 원립이었다.


저게 그의 동생인 것이었다.


"예쁜 것..."


원율은 그런 동생을 못 본다 생각하자, 가슴이 울렁거려 원립을 안아주었다.


그날 하루.

원율은 적혈 노파에게 찾아가, 혹여라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노파에게 원립이 부탁한 것을 부탁했다.


"흥!"


적혈 노파 역시 원율에게 붙여둔 혈충으로 인해 원립이 무슨 속셈인지 알아챈 듯 했으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듯 선선히 허락해 줬다.


"오냐. 오늘 혈시들을 빌려주마. 이놈들을 데리고 가서 놈들을 협박해서 쫓아내든지 뭐, 해 봐라. 그게 네 동생의 마음이 풀리고 네 마음도 풀리면 됐다. 마음에 드느냐?"

"...예 스승님. 제자, 마음에 듭니다."


원율은 그렇게, 그날 적혈 노파의 혈시들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 평촌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마을에서 쫓아내버렸다.


평촌은 산골짜기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평지에 있어 나름 탁 트여 보이는 곳이었다.


원율은 원립이 무슨 생각인지 대충 이해하며 혀를 찼다.


"아이고, 나리, 여기를 쫓겨나면 저흰 어디로 가서 뭘 먹고 살란 말입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닷새. 딱 닷새만 나가 있어라! 스승님께서 중히 하실 것이 있으시다! 아니면 다 죽고 싶느냐!? 죽기 싫으면 다 나가란 말이다!"


원율은 마을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그들의 원망과 비명 속에서 그들을 모두 내쫓았다.


마지막으로, 장 씨 아저씨가 마을을 나서며 원율에게 왕만두와 채소만두, 찐빵 등을 건넸다.


"...원율."


장 씨 아저씨.

거지였던 원율과 원립에게 가끔 남은 만두소를 선심쓰듯 건네거나, 만두를 주던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원율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는 듯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만두를 주며 한 마디를 던졌다.


"강녕해라."

"...강녕하십시오."


장 씨 아저씨는, 원립, 원율에게 있어 반쯤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장 씨 아저씨에게 허리를 숙여 그를 배웅했다.


마음이, 이상했다.


* * *


스물 아홉째 날.


하루 남았다.


원율은 원립과 함께 동부를 내려왔다.


둘은 말없이 썰렁해진 평촌을 돌아다녔다.


그들이 지난 열흘동안 돌아다닌 평촌 곳곳을 돌아다니며 추억을 회상했다.


"...형. 괜찮아?"

"응."


원율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제 죽음은 받아들였다.


"넌 괜찮아?"

"...아니."


하지만 원립은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원율은 그런 원립을 한참 바라보며, 주변을 걸어다녔다.


어느덧.

두 사람은 이전에 물수제비를 하던 냇가에 도착했다.


"원립."

"응."

"에잇!"


원율은, 굳은 표정을 한 원립을 냇가로 밀었다.

원립은 냇가로 풍덩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흐악, 흐아아악, 흐아아악!"

"푸하하, 이놈아 헤엄치면 되잖아! 에잇!"


원율은 함께 냇가로 뛰어들어가, 원립과 함께 물장구를 쳤다.


첨벙, 첨벙, 첨벙!


원율은 음기를 조종하는 법술로 음한 물줄기를 조작해 원립에게 물대포를 쏴댔고, 금 속성 법술. 그곳도 철조술 하나밖에 못 익힌 원립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원율의 물대포에 맞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헤엄에 익숙해진 원립은 물대포에 맞으면서도 원율에게 물을 어떻게든 흩뿌려댔고, 원립과 한참동안 물장구를 즐긴 원율은 실컷 웃었다.


어느덧 한참을 물장구를 치다보니 저녁이 다가왔다.


"으, 춥다."


원율은 원립과 함께 덜덜 떨면서 물에서 나왔고, 원립은 원율에게 부탁했다.


"혀, 형. 추운데 뭐 없어?"

"마을에서 술을 가져오긴 했는데, 먹을거냐? 술 마시면 따뜻해지긴 하거든."


원율은 원립과 함께 술을 마시며 몸을 데웠다.


"으... 그래도 춥네."

"마을로 가자. 장씨 아저씨네에서 뭐 좀 먹자."


원율은 어제 장 씨 아저씨가 준 만두와 찐빵을 가지고 장 씨 아저씨의 만두가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만두가게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만두와 찐빵을 데웠다.


원율과 원립은 아궁이 앞에서 몸을 말렸다.


"...형. 근데 형 오늘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데?"

"가슴이 좀 나랑 다른 것 같아. 물장구치면서 봤는데 좀..."

"당연히 다르지. 난 여자잖아?"


원율은 원립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푸하하 웃으며 대답해줬다.

원립은 그 말에 눈을 껌뻑이다, 머리를 긁었다.


"어... 형. 그런데..."


그리고 이어진 원립의 말에, 원율은 박장대소를 했다.


"여자가 뭐야. 정확히...?"

"푸하하하하, 원립! 술 마시더니 바보가 된 거냐?"

"아니, 형. 그렇잖아..."


원립은 취기가 돌았는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E 시리즈는 전부 무성으로 태어나서 딱히 생식기관이 없고... 그냥 광산에서 일하기 적합하게 남자 체형으로 만들어져서 일단 서로들 남자라곤 생각하지만... 정작 여자란 게 뭔지도 몰라서 알 수가 없는 걸."

"뭔 개소리냐, 원립! 오늘은 특히 웃기는구나!"

"그리고 애초에, 남자끼리 형이라고 부르는 건데 형이 여자면 왜 계속 우리끼리 호형호제한 건데? 헉, 설마 혹시 얼마 전까지는 남자였는데 적혈 노파가..."

"푸하하하, 무슨 소리냐. 애초에 스승님이 날 선택한 게 같은 여자라서 그런 건데. 그리고 형이라고 먼저 부른 건 너지, 내가 부르라 시켰냐? 하도 형형 거리길래 그러려니 하고 살아온 거지."

"하지만... 마을 여자란 존재들을 보면 남자들이랑 차림새가 틀리던데, 형은 왜 남자들처럼 하고 다니는 건데?"

"거지라서 옷이 남자 옷밖에 없었잖아."

"그럼 왜 스승님 제자가 된 지금은?"

"하도 남자 옷 입고 다니다보니까 익숙해져서 입고 다니는 거지. 뭐... 안 그래도 내일은 스승님이 여자 옷 입힌다더라. 이제 내 몸이 스승님 몸이니까! 봐라, 내일 내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는다!"

"신기하겠다..."


원립은 술에 취한 채, 신기한 눈으로 원율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 만두 다 됐다. 먹자 형."

"......"


원율은 눈치없이 왕만두를 꺼내먹는 원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 안 드냐?"

"응? 무슨 생각?"

"...됐다. 멍청한 새끼... 다 젖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마을에 둘 뿐인데도 눈치를 못 채니."

"내가 눈치를 못 챈다니 무슨 소리야. 우리는 30년... 아니 16년... 아니 두 세상 합쳐서 46년이나 함께했는데, 내가 형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거 같아?"

"......"


타닥, 타닥, 타닥...


원율은 원립과 함께 만두와 찐빵을 집어먹으며 아궁이를 바라보았다.


불길이, 뜨거워 보였다.


술에 너무 취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불은 따뜻했다.


원율은, 아직도 다 안 마른 옷을 벗고 원립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뭔지, 궁금해?"

"......"


원율은 그날.

원립에게 마지막으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 * *


한 달.


한 달이 지났다.


"기가 차는구나. 애꿎은 순음(純陰)의 정기를 그놈 때문에 해치다니... 허 참."


적혈 노파는 원율에게 붉은 궁장을 입힌 후, 새하얀 화장을 해 주고 그녀와 함께 평촌으로 내려갔다.


"내가 순음지기를 필요로 한 공법을 익힌 것이었으면 네 동생 원립은 이미 찢겨죽었다. 본노가 익힌 것이 그런 잡다한 것에 구애받지 않는 마공임에 감사하거라."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해야지. 어찌 그동안 남장을 하고 다녔느냐. 어여삐 꾸미니 이리 예쁜 것을..."


적혈 노파는 만족스럽다는 듯 원율의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그녀의 얼굴을 돌려보며 음충맞게 웃었다.


"정말 예쁘구나.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

"......"


어느덧.

평촌 중앙 공터에 도착한 적혈 노파는 근처로 혈시들을 배치하고, 붉은 깃발들을 꺼내들었다.


척, 척, 척, 척!


우우웅!


붉은 깃발들은 주변으로 날아가며 펄럭이더니, 이내 붉은 빛을 내뿜었다.

깃발들의 빛은 이내 서로 연결되며, 적혈 노파와 원율을 감싸는 붉은 진법으로 변했다.


"드디어... 반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구나. 드디어...! 이 긴 세월을 지나 성단(成丹)의 희망을 볼 수 있어...!"


적혈 노파는 감격스러운 듯 원율의 몸을 더듬거렸다.


"그래. 마지막으로... 원하는 건 없느냐? 들어줄 수 없는 걸 빼고 다 들어주마."

"...제 아우, 원립이... 쇠물매를 날리겠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오냐, 오냐. 그깟 물매 따위 백 번 천 번이든 날려도 용서해주마. 또 없느냐?"

"이... 진법은 수호진법인 것입니까?"

"그렇지. 결단기 수사의 일격조차 한 번에 한해서 막을 수 있다."

"진법을 해제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안 된다. 탈사하는 순간엔 매우 취약해지니까."

"...그렇다면 제 아우가, 마지막으로 후련하게 쇠물매를 날려도 그냥 그 자리에서 피하지 않아주실 순 있으십니까?"

"오냐. 진법이 있는데 그 정도 쇠물매 정도야 피하지 않아주마. 또 있느냐?"

"...이외의 아우에 대한 약조들을... 지켜주십시오."

"오냐, 지켜주마. 자 그럼 진짜로 더 원하는 것은 없느냐?"

"약조들을 지켜주신다면... 더 여한은 없습니다."

"여한은 없겠지! 순음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어제 실컷 즐겼으니까. 흥,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놈은 제놈과 정을 나눈 여자가 마지막인데 산 위에서 저짓거리나 하겠다니."


적혈 노파는, 원율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뒷산에서 쇠물매를 잡고 기회를 노려보겠다는 원립을 향해 혀를 찼다.


"뭐 됐다. 저걸 해서 네 마음이 편해질 수 있으면 아랑곳 않으마. 그럼 이제..."


우우우우웅!


진법 안쪽에서, 시뻘건 피안개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적혈 노파를 중심으로 붉은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꿈틀, 꿈틀...


"탈사지법을 시행하도록 하겠다."


적혈 노파의 동공이 사라졌고, 그녀의 눈이 오로지 검게 변했다.


적혈 노파의 입에서 기이한 벌레 같은 것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붉은, 새우와 구더기를 합친 것 같은 역겨운 벌레!


[입을 벌려라...]


그 벌레의 아가리에서 적혈 노파의 목소리가 울렸다.

원율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벌렸다.


[내 본명혈충을 받아들이면 탈사지법이 시행될 것이다. 아프지 않게 끝내줄 터이니... 모든 여한을 내려놓고 성불하거라.]


우우우우웅-


적혈노파의 신식(神識)이 모조리 그 붉은 벌레에게 빨려들어갔다.

적혈 노파의 완벽한 통제 하에 있던 혈시와 법기들이 잠시 무용지물이 되었으나, 이내 그것들은 적혈노파가 설정해둔대로 자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율적으로 판단해, 적혈 노파에게 위험하다 생각되는 것들은 자연히 배제할 터였다.


그녀가 펼친 수호진법 역시 적이 나타나면 마화(魔火)를 그녀 대신 불러내서 적을 불사를 터였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적혈 노파는 마지막으로 점괘에 나온 위협.

원립을 바라보았다.


원립의 근처에 있던 혈시를 통해, 지금이라도 죽이려면 언제든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위협이 될 건 아무것도 없군.'


여전히 원립이 애를 써 만든 쇠물매에선 천지영기라곤 한 방울도 느껴지지 않았다.

요기나 마기도 마찬가지로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은은한 뇌기(雷氣) 일부였으나...

천지영기가 깃들지 않은 순수한 천뢰지기였다.


정순한 천뢰지기야 파사현정의 효과가 일부 있긴 하지만 딱 그 정도.


천지영기로 증폭되지 않는다면 그닥 큰 효과는 없었다.


'신기하긴 하군. 천지영기 없이 천뢰지기를 저렇게 응축할 수 있는 겐가? 뭐 자철석으로 비슷한 걸 하던 녀석들도 간혹 보긴 했다만...'


역시 위협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마침내, 원립에 대한 경각심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됐다. 신경쓰지 말자.'


우우우웅!


탈사를 시행하며 바깥에 있는 외물들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기 전.

그녀는 마지막 경각심을 발휘하여, 원립이 수상한 짓을 하지 못하게 혈시를 시켜 원립의 양 팔을 단단히 잡아놓도록 했다.


그녀가 탈사를 진행할 동안, 혈시는 원립이 수상한 짓을 하지 못하게끔 양 팔을 계속 고정하고 있을 터였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더 이상 신경쓸 것은 없었다.


마침내 적혈 노파는 모든 혈시를 통제하던 신식을 모조리 회수한 후, 탈사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 * *


적혈 노파의 혈시는 원립.

E-235의 양 팔을 단단히 붙잡고, 그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 팔을 잡고 있었을 뿐.

손가락은 아무런 제지를 해 두지 않았다.


그 덕에 235가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원판 위쪽.

그 원판에 달린 붉은 색의 단추를 향해, 235의 손가락이 향하는 건 하나도 막을 수 없었다.


또한 적혈 노파의 혈시가, 그녀의 신식이 회수되기 전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은 235가 '수상한 짓을 하면 죽이라'는 것이었기에, 235가 단추 하나를 손가락으로 문지른다고 해서 그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혈시들에겐 어느 정도 자율의지가 남아있었고, 그들의 자율의지로 판단하기에.

단추를 조금 만지는 건 '수상한 짓'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235는 자신이 하려던 바를 완수할 수 있었다.


딸칵-


235의 손가락이 레일건의 발사 버튼을 눌렀다.


은하 제국 기준.


다윗과 골리앗이 돌팔매질을 하던 시절과 비슷한 시절에 만들어진 간단한 쇠물매에 천뢰지기가 주입되며, 쇠기둥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절대... 죽게하지 않아."


시뮬레이션은 홀리카에서 실컷 돌려봤다.


무수한 시뮬레이션에서, 적혈 노파는 항상 자신의 몸보다도 새로운 몸이 될 원율의 몸을 보호했다.


그러다가 결국 죽었다.

원율을 남겨두고!


수천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 적혈 노파가 돌발행동을 벌일 확률은 고작 2.1퍼센트.

97.9퍼센트의 확률로 성공하는 계획이었다.


머나먼 옛적에 만들어진 원시시대의 무기.

레일건이 빛을 토하며 평촌 중앙을 향하기 시작하였고, 235는 어제 원율이 보여주었던 [새로운 세계]를 떠올리며 눈빛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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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호접지몽(胡蝶之夢)(3) +12 26.02.12 407 37 23쪽
» 호접지몽(胡蝶之夢)(2) +17 26.02.02 511 42 51쪽
3 호접지몽(胡蝶之夢) +16 26.01.23 573 44 39쪽
2 신비로운 거울 +14 26.01.22 608 43 24쪽
1 프롤로그. E-235 +20 26.01.14 1,008 5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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