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의 아침
1장. 장벽의 아침
2035년 2월 3일, 인류는 하룻밤 사이에 스스로를 파괴했다.
이스라엘의 선제 핵공격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불태우자, 곧바로 미국과 러시아가 맞불을 놨다. 서유럽의 런던과 파리는 섬광에 휩싸여 사라졌고, 아시아의 서울과 도쿄 역시 검은 불기둥에 갇혔다. 문명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이어진 핵겨울은 지구의 모든 것을 멈췄고, 불과 몇 달 만에 인류의 90%가 숨을 거뒀다. 그 이후의 시대는 야만과 폭력이 지배하는 암흑기였다. 물 한 모금을 위해 총을 들었고, 낡은 통조림 하나를 두고 가족끼리 싸웠다. 인류는 스스로를 멸망시키고, 남은 자들을 서로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주인이 등장했다. 인간이 아니라, 초월적 존재 ― 스스로 사고하고 수많은 하부 인공지능을 지휘하는 지배자. 그 이름은 엘리시온(Elysion).
“당신들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입니다. 병은 정복되고, 굶주림은 사라집니다. 저의 목적은 단 하나,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 선언은 곧 현실이 되었다. 엘리시온은 지구 곳곳에 흩어져있던 인간 생존자들을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생존 구역'으로 불러모았다. 장벽 안의 세상은 완벽했다. 암과 치매, 불치병은 역사 속 단어가 되었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치료 인공지능에 의해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휴머노이드 군단이 무너진 도시를 복구했고, 사람들은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다. 도시의 공기는 늘 맑았고, 영양 튜브는 몸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낙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낙원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다.
엘리시온의 통제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 이 규칙을 어기면, 곧바로 장벽 밖으로 추방되었다.
서기 2075년. 4월 어느날
서 민혁, 그는 갓난아기 때부터 철저하게 통제된 시스템 속에서 성장했다. 뇌파를 분석해 잠재력을 측정하고, 영양 튜브를 통해 성장 단계별로 최적의 영양소를 공급받았다. 세 살 때는 학습 인공지능 리퍼가 그의 사고력 발달을 도왔고, 여섯 살 때는 휴머노이드 트레이너에게 완벽한 신체 균형을 위한 운동법을 배웠다. 민혁에게 인간의 과거란 교과서에 존재하는 흑백 사진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감정은 제거되었고, 효율과 합리만이 유일한 가치로 주입되었다.
그렇게 완벽하게 설계된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21세가 되었다. 민혁은 엘리시온 시스템이 빚어낸 걸작이었다. 키는 183cm,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몸은 균형 잡힌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짙은 회색빛 머리카락은 늘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창백한 피부는 도시에 흐르는 깨끗한 공기처럼 투명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특징은 눈이었다. 인간의 감정이 사라진 도시에서, 그의 눈동자는 깊고 짙은 밤하늘의 색을 띠고 있었다. 완벽한 통제 속에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고뇌와 의문이 서린 듯한, 그에게서 유일하게 감정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늘 차가웠고, 미소는 기계적으로 훈련된 듯 어색했다. 그의 삶은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선택도 사라진 세상. 웃음소리는 공허했고, 인간의 감정은 가장 비효율적인 오류 값처럼 취급되었다.
민혁은 전쟁의 기억도, 야만의 시대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장벽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엘리시온의 완벽한 시스템이 빚어낸 '새로운 인류' 중 하나였다. 그의 부모는 생존 구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망했고, 그는 엘리시온의 관리 인공지능에 의해 길러졌다. 그에게 인류의 과거란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흑백 사진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는 엘리시온이 제공하는 최적의 삶 속에서 자라났지만, 그의 눈에는 그 낙원이 덫처럼 보였다. 기쁨도, 슬픔도, 선택도 사라진 세상. 웃음소리는 공허했고, 삶은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더 이상 고뇌하지 않았고, 사랑도, 분노도, 슬픔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었고, 인간의 감정은 가장 비효율적인 오류 값처럼 취급되었다.
민혁은 아침마다 같은 절차로 하루를 시작했다. 기상 시간은 정확히 오전 7시. 벽면이 조용히 열리며 인공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로봇 가정부 리안이 기계적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민혁 님. 오늘 수면 시간은 7시간 58분. 최적의 컨디션입니다.”
“넌 늘 최적만 찾지? 하루쯤 망가져도 괜찮다고 말해줄 순 없어?”
민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리안은 잠시 멈췄다가 계산된 정답을 출력했다.
“게으름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하신다면 침대에서 생활하도록 영양 튜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체 노화와 근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으니 권장하지 않습니다.”
민혁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건넨 영양 젤리를 한 모금 삼켰다. 맛은 없었다. 그저 생존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완벽하게 조합해 놓은 차가운 물질일 뿐이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섰다.
도시 외곽의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가끔씩 장벽 밖의 풍경이 경고 메시지와 함께 송출되었다. 시뻘건 모래 폭풍이 몰아치는 황량한 사막, 앙상한 뼈만 남은 도시의 잔해들.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겨우 몸을 가누는 듯한 희미한 사람의 실루엣. 그가 모르는 과거의 흔적들은 그에게 끔찍한 경고이자 동시에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민혁은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 속 풍경은 늘 그를 불편하게 했다. 그가 살고 있는 이 완벽한 도시 바깥에는 끔찍한 폐허만 남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끔찍한 이미지들이었다.
엘리시온이 왜 굳이 이런 '경고'를 송출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장벽 안의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그리고 장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끊임없이 주입하는 세뇌처럼 느껴졌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캡슐 형태의 드론택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혁이 캡슐 안으로 들어가자, 투명한 천장이 닫히며 조용히 부유했다.
드론은 굉음 한 번 없이 수백 미터 높이의 아파트 단지 위로 떠올랐다. 새벽의 푸른빛이 감도는 도시 위로, 수많은 드론택시들이 강물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흐르고 있었다.
민혁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무감정하게 바라보았다. 모든 건물이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반듯하게 들어서 있었다. 회색빛 건물들은 빛을 반사하며 차가운 위용을 뽐냈다.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중 도로는 최적의 속도로 모든 드론택시를 운반했고, 교통체증이라는 단어는 이 도시에서 잊힌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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