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취헌 살인사건 1화
새벽 두 시 무렵, 리조트 전체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대리석 바닥 위로 은은한 조명만이 빛을 흘리고 있었고, 직원들의 발걸음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적막은 한 직원의 날 선 비명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경매 준비를 위해 홀을 점검하던 직원이, 커튼 뒤쪽 구석에서 한 여자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여... 여기 사람 좀!”
급히 달려온 동료들이 불빛을 비추자, 붉게 번진 카펫 위로 쓰러진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몸은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목선에는 미세한 상처 자국이 선명했다.
곧이어 호출을 받은 관리자와 경비가 몰려들었고, 그 순간 경매장은 단숨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고가의 유물이 전시될 화려한 무대는, 이제 한 구의 시신을 중심으로 봉쇄된 범죄 현장이었다.
시신의 신원은 곧 확인되었다.
하연지였다.
리조트 직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전날 저녁까지도 홀 주변을 오가며 준비를 지켜보고 있었고,
유난히 눈에 띄는 미소를 짓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은 그 어떤 우연도 용납하지 않는 차가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몇 개의 출품용 상자가 어지럽게 밀려나 있었고, 커튼 천에는 잡아당긴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몰래 들어와 은밀히 무언가를 주고받으려 했던 흔적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만남이었을까.
잠시 후, 경찰과 구급대가 리조트로 들이닥쳤다.
경매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장소 전체가 통째로 봉쇄되었다.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빛나는 홀.
수억 원대의 물품들이 줄지어 반짝이는 공간.
그러나 그 화려함은 하얀 천으로 덮인 시신 앞에서 모두 빛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경매는 예정된 장소에서 더 이상 진행될 수 없게 되었다.
운영진은 급히 대체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 살인 사건이, 화려한 경매의 막을 올리기도 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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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처마 끝을 스칠 때마다, 얇은 종이문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닷소리가 리조트의 유리 벽을 얇게 두드리고, 파도선은 일정한 박자를 그었다.
한옥식 리조트 비취헌은 바다를 정면으로 품고 있었다.
소금기 어린 공기는 로비의 식물 잎에 얇은 막을 남겼고, 매끈한 바닥은 낮은 조도의 하얀 빛을 고르게 반사했다.
강준혁은 체크인 데스크 앞에서 잠깐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파도는 쓰러지고 일어나는 동작을 일정하게 되풀이했다.
강준혁은 그때마다 왼손 장갑을 오른손으로 만지작 거렸다.
왼손엔 장갑, 오른손은 맨손. 그로 인해 생긴 습관이었다.
“성함과 신분증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강준혁 입니다. 신분증은 여기 있습니다.”
위조된 신분증, 임시로 빌린 고급 시계, 군더더기 없는 단색 넥타이, 어깨선이 너무 완벽하지 않도록 일부러 한 치수 낮춘 재킷. 모난 데 없이 평범하도록 조율된 위장.
직원이 키카드와 얇은 안내 책자를 건넸다. 표지를 넘기자 리조트 지도가 인쇄돼 있었다. 준혁의 시선이 바다 쪽 별관 1층 옥련 홀에서 멈췄다. 의뢰인의 말이 거기서 다시 떠올랐다.
[누나가 마지막으로 검수를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연락이 끊겼어요.]
직원이 가만히 있던 강준혁을 보고 추가적인 안내를 해주었다.
“엘리베이터는 저쪽입니다. 오늘 행사는 2층 유현실에서···”
“고맙습니다.”
준혁이 책자를 접어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유현실”로 향하는 동선을 살짝 꺾어서 옥련홀로 향했다.
별관으로 넘어오는 회랑은 바닷바람을 더 가까이 끌어들였다.
목재 난간의 결은 소금기를 머금어 반 톤 어두워졌고,
유리 난간은 반점 하나 없이 닦여 있었다.
복도는 길고 고요했다.
안내 표지판 [옥련 홀] 이 걸린 문 앞에서 그는 잠시 멈췄다.
문고리와 플레이트, 경첩과 프레임.
그는 왼손을 들었다.
가죽 장갑 위, 검지 손가락 위에 따라 난 얇은 지퍼.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짧은 소리와 함께 손끝이 드러났다.
피부가 차가운 금속을 스치는 순간,
왼손 검지가 공기와 마주했다.
그는 꺼낸 왼손 검지를 옥련 홀 문의 손잡이에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금속 표면의 냉기가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오래된 진동처럼 감각 너머의 무언가가 파문처럼 번졌다.
익숙한 감정.
무언가가 남아 있는 자리.
의도를 숨긴 채 안간힘을 다해 억누른, 조심스러운 생각이 감정처럼 떠올랐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제발, 안에 아무도 없기를...]
그 감정에는 두려움과 절박함, 그리고 간절한 의지가 뒤섞여 있었다.
소리 없는 긴장이 손끝을 타고 퍼졌다.
조금 더 다가가 케이스 뒤편으로 돌아섰다.
하판 고정장치, 나사 홈의 방향, 구멍 둘레의 마모 상태를 눈으로 훑었다.
세로 방향으로 들어간 얇은 바이트 자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규 점검이라기엔 각도가 조금 이상했다.
“여긴 출입 제한 구역입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떨어졌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의 남자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강준혁과 케이스 사이를 천천히 훑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회랑을 돌다 보니··· 길을 잘못 든 모양입니다.”
준혁이 침착하게 답하며 약간 비켜섰다.
남자는 문을 완전히 닫으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내부 정리 중이라, 협조 부탁드립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어조는 무언의 압력처럼 단단했다.
정성현.
이 리조트의 보안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사전에 하연우가 알려준 주요 인물 중 한명이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케이스 하판 쪽에 머물렀다.
나사 머리, 고정 장치, 그리고 장갑 낀 준혁의 왼손 끝.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눈동자만 짧게 움직였다.
곧이어 그는 문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의미 없는 동작 같지만, 분명한 퇴실 권유였다.
준혁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케이스 옆의 선반 위를 흘깃 보았다.
정전기 방지용 천.
모서리엔 매끈하지 않은 접착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급히 떼었다 붙이면 생기는 흔적.
“폐를 끼쳤습니다.”
“별말씀을...”
정성현은 끝까지 얼굴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말수도 억지로 줄인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던 사람처럼.
표정이 고요한 사람은, 말 대신 상황을 압도하는 법을 안다.
라운지로 돌아오는 길, 긴 유리 벽에 바다가 길게 비쳐 있었다.
바깥의 풍경과 안쪽의 조명이 겹칠 때, 사람의 시선은 그 사이에 멈춘다.
이 리조트는 그 틈을 안내와 공지로 채우며, 손님들의 눈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쪽을 택했다.
낮은 볼륨의 음악, 얇은 유리잔, 철저한 직원 교육.
조용하지만 빈틈은 없었다.
“새 얼굴이군요.”
한 남자의 목소리가 적당한 거리에서 흘러들었다.
라운지 중앙 테이블 옆, 긴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반백의 머리를 매끈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의 백인 남자.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회중안경이, 그의 표정을 흐릿하게 감췄다.
“마르셀 바넹이라고 합니다.”
“강준혁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마르셀은 잔의 표면을 손끝으로 굴리듯 문지르며, 유리 너머의 바다를 잠시 바라보았다.
“여기, 처음이신가 봅니다.”
질문이라기보단,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강준혁은 얇게 웃으며 맞받았다.
“처음이라··· 확실히 낯선 구석이 많네요.”
“낯설다는 건, 좋은 징조입니다.”
마르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잔을 들었다.
“익숙한 장소에선, 익숙한 일만 일어나죠. 기억에도 남지 않고요. 하지만 낯선 곳은··· 모든게 기억에 남죠.”
“한국말이 상당히 능숙하시네요.”
강준혁이 말을 이어받았다.
“하하.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산지도 10년이 넘어서요.”
마르셀이 웃었다. 그 웃음엔 여유와 계산이 섞여 있었다.
“그럼 이곳도 익숙하시겠네요.”
강준혁의 말에 마르셀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는 처음이네요. 대부분의 리조트는 조금만 유명해져도 번잡해지기 마련인데···”
마르셀이 피식 웃었다.
둘 사이로 짧은 정적이 스며들었다. 음악은 일정한 템포로 흐르고, 바깥 바다는 햇빛 아래 조용히 일렁였다.
그때, 누군가 라운지 쪽 문을 열며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마르셀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 반가운 얼굴이 오네요.”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자, 따라오시죠. 다른 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걸 거절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강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라운지를 지나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마르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일정했고, 방향은 단호했다. 마치 처음부터 누구를 만나게 해줄 생각이었던 것처럼.
코너를 돌자, 탁 트인 응접 공간이 나타났다.
네 명 남짓한 사람들이 편하게 둘러앉아 있었고, 눈길이 일제히 그들에게 향했다.
마르셀이 한쪽 손을 들었다.
“여기, 방금 막 도착하신 강준혁 씨입니다.”
그의 소개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가볍게 잔을 들어 인사했다.
강준혁도 얇은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빠르게 훑었다.
이 공간의 공기는, 라운지보다도 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긴 소파 끝, 잿빛 셔츠에 네이비 재킷을 걸친 중년 남성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는 낮고 깔끔했지만, 안쪽에서 단단하게 다져진 울림이 있었다.
“서태영입니다. 이곳 비취헌을 운영하고 있죠.”
강준혁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유리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문서린이에요.”
짧게 인사한 여인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강준혁은 순간 시선이 멈췄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얼굴··· 곧장 생각이 나진 않았다.
“처음 오셨죠? 햇빛이 강한 시간이라, 지금 풍경이 꽤 인상적일 거예요.”
짧은 침묵이 흐르고, 한쪽 구석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말은 없었지만, 눈길은 확실히 강준혁을 따라 움직였다.
“저 분은 한기범씨.”
마르셀이 덧붙였다.
“현장 보안을 총괄하고 계십니다.”
한기범은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말도, 표정도 없었지만, 그 눈빛은 마치 입장 심사를 끝낸 듯한 느낌을 줬다.
강준혁은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그를 훑었다. 눈빛의 결, 서 있는 자세, 말 없는 침묵의 길이까지.
그때, 옆자리에서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단정하게 묶은 흑갈색 머리, 우아하게 올라간 콧대, 연한 진주빛 스카프가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강준혁은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고, 곧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은퇴한 여배우 문서린. 한때, 대한민국을 뒤흔든 배우였다.
TV나 영화에 관심이 없던 강준혁마저도 이름을 알고 있던···
이른 나이에 은퇴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앉은 자세에서도 남들과는 다른 기세가 느껴졌다.
“소개는 이쯤이면 충분하죠? 어차피, 경매는 짧지 않으니까요.”
문서린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이곳은 방마다 구조가 조금씩 달라요. 같은 동선은 하나도 없죠.”
한쪽에 서 있던 서태영이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통 리조트는 편의성을 우선하지만··· 여긴 그 반대입니다.”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일부러 길을 조금 멀게 만들었고, 창마다 보이는 풍경도 다르게 설계했죠.
익숙한 공간보다, 낯선 느낌이 기억에 오래 남거든요.”
말투는 담담했지만, 공간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한옥 구조를 기반으로 하되, 각 구역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게 이번 경매와도 이어지고요.”
강준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언가 의도된 배치라는 건 분명했다.
“기본 정보는 책자에 정리돼 있으며, 원하실 경우 직원이 동행하여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경매는 저녁에 시작되니, 그 전까지는 허용된 공간 내에서 자유롭게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마르셀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끝이 테이블 위 책자를 가볍게 쓸었다.
“그럼, 저는 먼저 조금 돌아보겠습니다. 이런 데선 혼자 보는 게 더 재밌거든요.”
그는 준혁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넨 뒤, 천천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강준혁은 잠시 정면을 응시하다,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문서린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작은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혼자 보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 은근 많아요.”
그녀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괜히 사람 많으면, 공간이 작아 보이거든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강준혁의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들어왔다.
낮은 테이블 너머, 리조트 운영자 서태영이 누군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는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
테이블 위엔 봉투 몇 장이 겹겹이 놓여 있었고, 안쪽으론 얇은 서류 뭉치가 비죽 솟아 있었다.
강준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정면 유리창 너머, 햇살에 비친 정원이 유난히 낯설게 보였다.
사람들의 대화가 잦아들자, 강준혁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한기범의 시선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특별한 제지는 없었다.
응접실을 벗어나 복도로 들어서자, 바닥에 깔린 얇은 러그가 발소리를 삼켰다.
복도는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양옆으론 미닫이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한옥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한 공간. 개방된 통로 안에서도 방마다 다른 마감재와 조도가 흘렀다.
강준혁은 오른쪽 끝 방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나는 동안, 벽의 질감이 조금씩 달라졌고, 창이 놓인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강준혁은 오른쪽 끝 방 앞에 멈춰 섰다.
문에 손을 얹고 살짝 밀자,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방은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정갈했고, 비어 있었다.
하지만 강준혁은 그런 비어 있음 속에서 불균형을 감지했다.
너무 말끔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시선은 천천히 움직이며 벽과 바닥, 가구와 조명의 위치를 훑었다.
표면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익숙한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어딘가엔 그 흔적이 남는다. 늘 그랬다.]
강준혁은 숙련된 탐정이었다.
현장을 보는 눈이 있었다.
단서란 건 존재보다는 불균형에서 드러나는 법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방 한쪽 구석, 낡은 나무 장이 놓인 벽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장 자체는 오래된 듯했지만, 벽과의 간격이 미묘하게 들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장 옆의 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빛이 닿지 않는 각도에서, 나무 패널의 이음새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미세하게 떠 있는 단차.
그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눌러보았다.
패널이 밀렸다.
[딸깍]
안쪽에서 걸리는 듯한 저항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누군가가 한 번쯤은 열어본 것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열진 않았던 모양이다.
틈 사이로 어둠이 밀려왔다.
강준혁은 자세를 낮췄다.
그 안엔 낡은 천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겉보기에 오래된 물건 같았지만, 표면엔 먼지가 거의 없었다.
정리된 공간, 감춰진 위치, 그리고 이물감 없는 가방의 상태.
강준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가방을 꺼냈다.
내용물을 확인하진 않았다. 이 공간에서 시간을 더 끌 필요는 없었다.
가방을 품에 안은 채,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문 닫히는 소리를 줄이기 위해, 다시 패널을 밀어 되돌려 놓았다.
걸쇠가 정확히 맞물리는 걸 확인한 뒤, 미닫이문도 천천히 닫았다.
복도엔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응접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러그는 발자국을 삼켰고, 조명은 은은했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강준혁은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강준혁은 가방의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묵은 먼지 냄새와 함께 낡은 천의 냄새가 번졌다.
안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다.
봉투 하나, 오래된 흑백 사진, 그리고 작은 수첩.
봉투는 무표정한 겉면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사진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정면에서 찍힌 것은 아니었다. 빛이 부족한 실내, 유리잔 몇 개와 테이블, 그 너머 흐릿한 실루엣 하나.
선명하진 않았지만, 자세나 실루엣만으로도 이 공간 어딘가와 닮아 있었다.
강준혁은 사진을 옆에 두고 수첩을 펼쳤다.
페이지마다 단정한 필체와, 그 사이에 뒤섞인 빠르게 흘려 쓴 메모들이 교차했다.
불필요한 감정은 최대한 배제된 문장들. 대신 관찰, 기록, 반복되는 의심.
첫 장에는 날짜도, 이름도 없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복도 조명은 늘 꺼져 있다.
전력 문제인가? 습관인가?
이상하다.]
다음 페이지엔 이렇게 이어졌다.
[2번 방 문틀. 오른쪽이 더 좁다.
왼쪽보다 3.2cm.
의도적인 설계?
내부 구조 다시 확인 필요.]
그 아래, 연필로 지운 흔적 옆에 새로 덧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복제된 동선 없음.
동선 통제 의도?
이 공간, 누군가 너무 잘 안다.]
그는 몇 장을 더 넘겼다. 페이지마다 메모는 계속되었다.
강준혁은 수첩을 덮었다.
당장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이 수첩을 쓴 사람은 단순한 방문자가 아니다.
이 공간 어딘가를 지속적으로 관찰했고, 기록했고, 의심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이 공간을 경계했다.
의식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비취헌에서의 첫날.
슬슬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강준혁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금세 숨이 고르고 깊어졌다.
- 작가의말
해당 에피소드는 다 써 놓고, 올리기 전에 한번 보면서 수정하면서 올리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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