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1945년 8월 31일, 경상북도 달성)
“어제 아침, 오전 2시 41분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령부에 독일군 최고 사령부 대표 알프레드 요들 장군과 카를 되니츠 원수가 독일국의 최고 책임자로서 유럽에 있는 독일의 육해공 모든 군대가 연합군 유럽 원정군 및 소련 최고 사령부에 무조건 항복을 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전쟁은 오늘 밤 0시를 기점으로 5월 8일 화요일에 정식으로 종료됩니다.”
윈스턴 처칠, 제2차세계대전 종전 연설 中 (1945년 5월 8일)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그대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음에도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은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함과 같음은 본디 짐의 뜻은 아니었노라.”
히로히토, 옥음방송 中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끝났다. 일본과 독일이 꿈꾸었던 파시즘 제국은 한낱 일장춘몽이었을뿐.
베를린의 여성들은 승리감과 복수심에 가득 찬 소련군 병사들에게 겁탈당했다. 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 포메른의 수백만명은 이제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 연합군이 정해준 ‘독일의 정당한 영토’로 버려지고 있다. 히틀러가 그렇게 눈에 핏줄을 세운 채, 수백만을 가스실로 보내고 수천만 명을 고기 파편으로 만들던 그 광기에 박수 치던 대가는 그렇게 값비싸게 치렀다.
황국신민들은 B-29의 네이팜 세례에 숯덩이가 되었다. 숯덩이는 형체라도 남지, 두 방의 원자폭탄은 그들의 흔적마저 빗자루처럼 지워버렸다. ‘천황 폐하 만세’하면서 궁성에 요배하던 대가는 그렇게 값비싸게 치렀다.
그렇게 조선인들은 35년 만에 황국신민이라는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한반도에만 조선인들이 사는 게 아니었다. 일본은 물론이요, 만주, 가라후토(사할린)까지 ‘대일본제국’이라는 이 기묘한 노예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급작스럽게 변해버린 세상에 갑자기 내던져졌다.
노예로 삼았을 때는 그렇게 같은 황국신민이라 강조했건만 일왕이 라디오로 옥음을 방송하자마자 일본 정부는 그 황국 신민들을 그냥 내팽개쳤다. 어차피 동등하게 대우할 생각도 없었지만 이제 조선인들은 더 이상 일본과 무관한 외국인들 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해방군이라 온 소련군은 조선인들에게는 결코 해방군이 아니었다. 전승국 병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량한 꼴로 온 그들은 자신들보다도 더 잘살아 보이는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건드렸다. 민사 작전이란 그들에게는 사치였고 생각도 해본적이 없는 단어다.
그렇게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은 서서히, 스스로의 힘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남은 이들도 있었지만 특히 38선 이남에 연고를 둔 이들은 이제 무법지대로 변해가는 만주에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누군가는 내려오는데 실패하고, 또 누군가는 성공했다. 운이 가장 좋은 이는 돈을 챙겨서 내려오고 운이 약간 좋은 이는 몸뚱이라도 내려왔고, 운이 나쁘면 내려오기는커녕 안동(오늘날 중국 요령성 단동)의 어느 벌판에서 몽둥이에 머리가 찌그러져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운이 가장 좋은 이 중 하나가 바로 윤시중씨다. 고향 달성을 떠나 신경(장춘)에서 본래 옷감 장사를 하던 그는 8월 8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날 옷감을 사러 온 후지모토씨가 이틀 전 히로시마에 무언가 엄청나게 센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전달했을 때 그는 상황이 뭔가 심상찮음을 깨달았다.
그는 만주국의 돈을 금으로 바꾸고 집 마당에 파묻기 시작했다. 아내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 했지만 그는 무시했다. 윤씨의 감은 옳았다. 나가사키에 일명 원자폭탄이 또다시 떨어진 그 날, 붉은 군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젠체하던 관동군은 순식간에 격파됐다. 신경은 이제 다가오는 신의 심판에 공포에 떨었다.
불과 2주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일본인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양이 앞의 쥐였다. 노서아인(러시아인)들은 그들을 가지고 놀았다. 심심하면 남편 앞에서 아내를 강간하고, 반항하면 때려죽였다.
그러나 윤시중은 알았다. 일본인 다음은 조선인과 중국인 차례라는 걸.
“아이고 나으리, 가진 건 이것밖에 없습니다요.”
“О чём ты говоришь? Давай быстрее. Давай! Давай!”
서로 말을 못알아들었지만 윤씨는 감으로 알았다. 저 갈색 군복의 로스케가 가리키는게 자기 손목 시계라는 걸. 바로 주지 않았다면 아내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그날 저녁, 그렇게 땅에다 묻어놓은 금반지들을 챙기고 달구지에 처자식을 태워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윤시중은 뇌물로 해결하며 내려왔다. 압록강을 넘고, 박천에 하루 묵고, 청천강을 넘어 평양을 거치고, 다시 사리원, 평산, 금천을 거쳐 38선을 마침내 넘고.
다시 개성에서 경성으로, 수원, 대전으로.
이제 딱 9월로 넘어가려는 전날, 그는 달구지를 끌고 온 채 고향 달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거의 20년 전 이 곳을 떠나왔을 때와 크게 다른게 없었다. 벼는 익어가고 이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농부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모든게 다 잘 된 것이다. 떠날 때는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쨌거나 재산을 거의 대부분 챙긴 채 금의환향한 셈이다.
“새야새야 비엉새야 이시밭에 비엉새야~”
“...”
“올새비단 도꾸새야 나무화초 삐들케야~금치옷을 털치입고 니 어디가 자고 왔노~동쪽서쪽 뻗은 가지 제자지기 자고 왔소.”
아내 최정자는 남편의 흥겨운 노래를 잠자코 듣고 있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명을 자을 때 부르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바깥 사람이 부르기에는 별로 적절하지는 않지만 남편이 어렸을 때 들은 걸 부르겠다는데 무슨 상관인가. 그녀 역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나쁘지는 않다.
“하이고 동석이 아부지. 고향 돌아오니까 그리 신나셨소.”
“하모. 언젠가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야 하는게 사람 아이가? 안 그러노 동석아?”
가쿠란 차림의 윤동석은 말없이 아버지를 쳐다봤다. 시중의 이 조용한 아들은 올해 우리 나이로 17살이다.
부모에게서 자식이 태어나건만 그들이 서로 느끼는 감정을 완전히 공유할 수는 없다. 윤시중과 최정자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윤동석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쫒겨나 생판 이름만 들어본 이 촌구석으로 들어온 셈이다.
“...”
“야는 여기 처음 오지 않소?”
어머니는 말없이 부모를 쳐다보는 아들의 그 감정을 알고 있다.
“뿌리야 뿌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 고향이지 돈 벌러 간 곳이 고향이여? 조선 사람이면 조선으로 돌아와야지.”
“장춘에서 참 잘 살았는데...”
“허어 여보. 계속 머물렀으면 쏘련 놈들에게 다 뺏겼다 아이가. 금괴 안 들킨게 다행이지.”
“그건 그렇지요.”
“할 일이 많아. 집도 사야겄고. 돈벌이 될만한 것도 알아봐야겄고.”
“동석아 걱정 말그레이. 이제 여기가 네 새로운 고향이란다.”
최정자는 동석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이곳이 윤동석의 새로운 터전이자 천국을 만들어나갈 장소이다.
- 작가의말
'새야새야 비엉새는'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 오산리 말뫼 일대의 민요(1994년 문화방송 채록 버전)이다.
https://museum.seoul.go.kr/sekm/front/archive/searchView.do?locale=&recordId=26704&search=%EB%8B%AC%EC%84%B1%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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