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남자 서종태 (1945년 10월, 경상북도 대구 경북중학교)
연길에서건 장춘에서건 여기 대구에서건 10대 중반 소년들의 낙은 똑같다. 쉬는 시간에 그늘에 앉아 동무들과 얘기하거나, 있는 애는 군것질을 하거나, 그리고 그걸 물만 마셔야 하는 애들에게 자랑하거나.
동석은 쉬는 시간마다 몰려들어 이것저것 묻는 급우들에게 지친 모양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놈들이 왜 이렇게 질문이 많을까?
원무는 동석의 그 이야기들을 죄다 독점하고 싶었는지 먼저 그를 데리고 나무 그늘로 데려갔다.
“쏘련 야들이 그렇게 잔인하드나?”
“말도 마. 남편과 자식 앞에서 부인 범하고 사람 때리는 거 말리면 대가리에 총으로 쏴 버리는 놈들이 무슨 해방자냐? 차라리 쪽바리가 낫지.”
“윽...”
“꼴에 공산당이라고 평등하게 죽이더라. 조선인, 쪽빠리, 장궤(짱깨)... 만주만 그러나? 신의주, 평양, 북조선도 그러는 거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아버지가 어떻게 재산 챙겨오셨는지 참 기적이다 기적.”
“...”
“지금 우리 같은 조선인들 로스케 피해서 거기서 다 도망오고 있다고. 거긴 더 이상 사람 살 곳이 못된다.”
“뭐 우짰든 여기 잘 왔다마는 하나 꼭 알아야될 게 있다.”
“뭔데?”
“이 학교도 무법천지다 아이가. 패거리 몰고다니며 돈 뺏고 먹을 거 뺏는 야들이 몇 명 있어.”
“누구인데?”
“좀 있어. 특히나 갸들 중에 제일 조심해야 하는 치들이 둘 있다. 우리보다도 어린 놈들인데.”
“야야, 다들 병신 아녀? 그걸 왜 겁먹어? 이름이 뭐야?”
표원무는 선생보다 그 어린 꼬마들이 무서운 모양이다.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유 누가 듣겄다. 우리가 뭐 겁먹었나?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노. 쨌든 걔네 성은 전하고 노인데...”
그때 멀리서 가랑가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눈에 들어도 어린 놈이 목소리에 힘 주고 다니는.
“아 신참이고?”
동석과 원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역시 같은 교복에, 키가 좀 더 작은 아이들 두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신참을 보고 신이 난 모양이었다.
“염병할...”
표원무는 벌써부터 겁에 질렸다. 윤동석은 그걸 이해 못했다.
이 전형두와 노태성이란 노마 둘이 뭐가 그리 잘났기에, 무슨 지도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치고 있는지 말이다.
“...”
“니가 윤동석이가?”
“니?”
동석의 반문에 형두는 ‘오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그렇게 반응하는 놈은 처음인 듯 했다.
“어쭈, 야 원무. 신참 교육 제대로 안하노?”
“아니, 형두야. 그건 좀...”
“야, 우리가 누군지 못 들었노?”
“모른다.”
“하하 참.”
“형두, 좀 봐주면 안되겠노? 오늘 막 오줌 가리기 시작해서 모른다카지 않나? 낄낄.”
옆에서 노태성이 거들어줬다.
“아따 조용히 하그레이 노태성이. 야. 윤동석이. 우리 세계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주먹이 법인거 모르노? 만주에서만 살다 오니까 여기 법을 모르는구나?”
“히히히.”
“...”
“전학 온 기념으로 내 친히 교육 좀 해주겠어. 나 따라와라.”
밑져야 본전이다. 동석은 말없이 창고 방향으로 향하는 둘을 따라갔다.
다들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원무는 셋을 슬그머니 쳐다보다 자리를 내뺐다.
그리고 역시 누군가가 그 광경을 멀리서 쳐다보고 있었다.
몇 분 뒤.
생각보다 이 꼬마들의 주먹 맛이 너무 매웠다. 교사에게도 맞아보고 친구들과 싸워본 적도 있었지만 웬만해서는 그걸 피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맷값이 더 비싼 듯 했다.
윤동석은 힘없이 창고 바닥에 널부러졌다.
“으으...”
“아따, 맷집 하나는 억쑤로 세구만 그래.”
전형두는 다시 한번 윤동석을 발로 밟았다.
“으윽...”
“야 이제 내 말 좀 알아듣겠노?”
“...”
윤동석은 전형두를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네 말이 도저히 이해 안가는데?”
“뭐?”
전형두는 또다시 어이가 없어졌다. 감히 자신들에게 반문을 하다가 이제는 또 애써 부정을 한다?
“야, 임마는 만주에서 오래 살았다고 갱상도 말도 제대로 못알아먹노? 발로 안되면 손으로 해줄까?”
“아야 형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몰아붙이는 거 아이가?”
“마. 간만에 주먹 연습 좀 해야제.”
“하하, 참나.”
그때였다.
“야 이 문둥이 자슥들아!”
이 어린 깡패 둘에게는 훼방꾼의 목소리이자, 피해자에게는 구원의 목소리다. 이 셋이 저 멀리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을 때 한 눈에 봐도 떡대가 거대한 교복 차림의 소년이 서 있었다. 확실히 그들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그들보다 힘이 세보였다.
“니들 뭐하노?”
“이 도야지(돼지) 새끼는 또 누구여?”
“뭐어?”
이 떡대는 조용이 다가갔다. 그런데 뭔가 풍기는 그 기에 형두와 태성은 눌려버린 듯 했다. 어차피 찰나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에 그들은 아무것도 대응을 못했다.
퍼어억!
이 구원자는 순식간의 주먹으로 전형두의 얼굴을 뭉개버렸다. 부숴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정확하고도 상상도 못하는 강도에 전형두는 소리 조차 못 내고 거적대기에 널부러졌다.
노태성은 얼어붙은 채 서 있기만 했다.
“으윽...”
형두는 난생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그의 입이 부러진 코와 부서진 이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찝찔해졌다.
“다시 지껄여봐라. 도야지?”
“저 저는, 아무 짓 안했심더...”
노태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주먹은 태성의 복부를 날려버렸다. 방관자 역시 ‘윽’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변명말라. 아무짓 안해도 동조하면 같은 한패가 아니고 뭐꼬?”
“죄송합니더...”
노태성은 역시 전형두처럼 쓰러진 채 중얼거리기만 했다. 진정으로 사죄의 의미인지 아니면 강자에게 굴종하는 약자의 반사적인 애원인지 모른다.
소년은 동석을 일으켜세웠다.
“일어나 동석이.”
이 구원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자 동석의 눈이 커졌다.
“내 이름을 어떻게...?”
“내가 왜 모르겠노. 니 이번에 돌아오신 윤시중씨 아들인거 다 안다. 동네에 다 소문 났는데. 니는 나 모르나?”
동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수줍은 소년은 개학하기 전까지 바깥에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
“...”
“하유 참. 난 니 옆옆집 사는 서갑성씨 아들이다. 우리 같은 동네 산 지 한달이나 지났는데 참...”
“서, 서종태...?”
“그래.”
서종태였다. 해방되기 전부터 이미 대구의 학생 사회에서 유명한 그 주먹. 해방이 되고 쪽바리 학생들이 쫒겨나면서 더더욱 황제가 된 그 서종태. 그를 범접할 학생은 아무도 없다.
지역 유지 서갑성씨의 차남. 왜군에게 강제로 징집당한 그의 장남이 작년에 태평양에서 라바울인지 어딘지에서 미군 뇌격기 폭격에 살점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나서는 그가 장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그 서종태.
머리 좋고 주먹도 센, 그리고 무슨 지역의 유명한 어른들과도 같이 뭘, 이상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한 그 공포의 서종태이다.
전형두는 얼굴 색을 싹 바꾸었다. 그리고 이 서종태의 다리를 붙잡았다.
“어휴 죄송합니더 형님. 형님인줄 모르고 제가 감히!”
그러나 승리한 남자, 승리밖에 없는 이 대구 소년 서종태는 피라미 형두의 팔을 뿌리치고 걷어찰 뿐이었다. 힘없이 전형두는 나가떨어졌다.
“놔라, 놔! 뭘 잘했다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서 오야붕 행세하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니네가 김두한이가?”
노태성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고, 사태의 주동자 전형두는 쥐새끼 앞의 쥐며느리마냥 손만 싹싹 빌고 있다.
“잘못했심더!”
“잘못했으면 빨리 꺼지라!”
그렇게 황새 따라잡으려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 두 마리가 황급히 날아가버렸다.
서종태는 동석을 쳐다봤다.
“나 따라와.”
그렇게 가장 힘센 남자가 가장 약한 남자를 데리고 우물가로 갔다. 학생들은 그를 모두 알아봤다. 알아서 피해줬다.
그리고 이것은 강력한 메시지였다. 종태가 데리고 다니는 동석을 건드리는 자. 반드시 피를 볼 것이라는 것.
서종태가 우물에서 물을 길러 동석에게 건네고 이 소년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 좀 낫나?”
동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침 너네 학교 안 들렀으면 우짤 뻔했노. 너 열 일곱 살이라 들었는데 맞제?”
“네.”
“아야. 무슨 ‘네’가 뭐꼬. 비슷한 나이인데. 난 열 여덟인데 그냥 편히 말해. 내와 같이 있을 때는 편히 있어도 된다. 아무도 우릴 못 건드릴 테니까.”
“...”
“만주 어디서 왔노?”
“신경, 아니 장춘.”
이제 신경은 일본 제국주의의 그 착취적 언어의 산물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지금껏 신경에서 살아온 동석에게는 장춘이란 지명이 익숙하지 않다.
“참 멀리서도 왔데이. 여 대구에서 거기까지 2천리도 넘지 않는가?”
“그렇지. 여기까지 오는데 2주는 족히 걸렸어.”
“참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졌을 줄이야. 왜놈들도 물러가고 이제 새 세상이 왔는데 조선 땅은 남북으로 갈렸다니 참...”
“...”
마치 어른처럼 얘기하고 있건만 윤동석과 서종태 본인들 입장에서는 남북조선과 만주, 내지(일본) 이렇게 넷으로 갈린 셈이다. 조선 민족 입장에서는 잘못된 관념이 세뇌된 결과라. 그렇지만 유소년기를 온전히 그 황국 신민적 세계관에서 살아온 이들이 그 물을 온전히 빼내기에는 한달 만으로는 모자르다.
“참, 너는 모르제.”
종태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죽은 형에게 자랑스러운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이것을 단순히 힘 과시로만 쓰는게 아니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하기에 자랑스러운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이래뵈도 내가 이 대구 중학생들 사이에서는 힘 좀 쓴다. 머리와 주먹 좀 많이 썼제.”
굳이 말 안해도 동석은 그걸 느꼈다. 선생의 사죄에 꼬마 둘에 백기사까지 오늘은 참으로 인생에서 변화무쌍한 날이다.
“같이 따르는 애들이 많다. 니는 내 눈에 띄인걸 다행으로 알아라이.”
“그런데 왜 나를 도왔어?”
종태는 피식 웃었다.
“난 그 어린 놈들이 다른 동네에서 왔다고 엄한 사람 괴롭히는거 제일 싫어한다. 도와줘도 모자를 판에 안 그러노?”
“...”
“그리고 그렇게 맞는데도 네가 의연하게 견디는 거 보고 뭔가 남다르다는 걸 깨달았지. 내가 널 도와주고 너도 날 도와주면 우리 함께 이 동네를 평정할 수 있어.”
동석은 수줍게 웃었다.
“내가? 어떻게?”
“우리 나와바리 들어와서 내 시키는 대로 하면 돼.”
“...”
“주먹만 쓰는 데가 아니야. 우리가 명색이 인텔리겐차인데 머리도 키워야 하지 않겠노?”
“...”
인텔리겐차란 말은 대충 뭔지 알겠다. 재수없는 노어라서 문제일 뿐.
“공부도 하고 주먹도 쓰고 다 그런데야. 만주에 있을 때 공부 안했어? ‘고타 강령 비판’이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그런 거 들어봤어?”
고타라니? 조선은 물론이요, 일본이나 만주에서도 처음 듣는 단어다. 러시아어인가? 유물론은 대충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는데...”
“그럴 줄 알았어. 왜놈들 땅에서 제대로 공부했을 리가. 네는 공부도 많이 필요하다.”
서종태는 주먹을 내보였다.
“공부 뿐만 아니라 이것도...”
“...”
“어때, 우리와 함께 하겠노?”
“...해야지.”
종태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필요한 인재가 자신의 집단에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공부도 가르쳐야겠고, 운동도 가르쳐야겠고.
자고로 그가 존경하는 이 중 하나인 몽양 선생도 지와 무를 같이 겸비하고 있지 않은가? 이 대구에서도 그런 사람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
그렇게 서종태와 윤동석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 작가의말
1. 라바울: 파푸아뉴기니의 도시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기지가 있었다. 2차세계대전 중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지 중 하나이다.
2. 고타 강령 비판: 1875년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오늘날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이 당시 작센코르부르크고타 공국의 수도 고타(Gotha, 오늘날 튀링겐주 고타)에서 정당 강령으로 채택한 일명 고타 강령(Gothaer Programm)을 카를 마르크스가 주석을 달면서 평가한 문서. 해당 문서는 마르크스의 혁명 전략 조직론을 상세하게 제시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하는 과도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노동자 계급 정당에 대한 논의를 담은 마르크스의 마지막 주요 저서 중 하나이다.
3.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908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저술한 공산주의 철학 서적.
4. 몽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시기 주요 정치인이었던 여운형(1886~1947)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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