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불같은 강속구' 스킬을 얻었습니다.
1화. ‘불같은 강속구’ 스킬을 얻었습니다.
벼락. 그리고 죽음.
분명 나는 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눈앞은 캄캄했고 온몸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팔다리를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도 느껴지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벼락에 맞으면서 팔다리가 다 타버렸나? 팔다리 자체가 몸뚱아리에 붙어 있기는 한 건가? 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답답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것인지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 눈앞에 두터운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뚫기 힘든 칠흑의 보자기로 나를 꽁꽁 싸매 놓은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아, 맞다. 공을 던지려고 와인드업하는 순간 벼락을 맞았지....... 그렇게도 죽을 수 있다니......허무하네......그런데 이게 죽음이라는 건가? 이 다음은 뭐지? 계속 이런 상태라면, 죽음이라는 건 너무 답답한데......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감이 마음 속으로부터 솟아올랐다.
젠장, 1군 무대에서 공 한번 못 던지고 죽다니...... 고등학교 때 불같은 강속구를 던져보기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젠장 젠장 젠장! 억울해서 죽지도 못하겠다!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삐잉--”
억울함으로 가득찬 머릿 속을 뚫고 어디선가 날카로운 신호음이 들려왔다. 소리는 외부에서 들리는 것인지 머리속에서 울리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삥- 삥- 스킬 요청 접수 완료. 스킬명 ‘불같은 강속구’”
이상한 기계음이 웅웅대며 들려왔다. 나는, “거기 누구 있어요? 이봐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삐잉~ 삐잉~ 삐잉~ 삐~~~~~~~~!”
이상한 신호음이 내 귀를 찢어버리기라도 하듯 갑자기 커졌다.
“······으, 으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듯한 소리에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눈을 떴다. 아니, 눈이 떠졌다.
숨이 턱 막히고 괴상한 신호음의 잔향이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차츰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고 주변 풍경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컥~!”
나는 한숨을 토해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흙먼지와 비릿한 피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불이 그을린 듯 뜨거웠고, 코끝에는 누군가의 타들어간 살 냄새가 매캐하게 맴돌았다. 내 눈앞에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우와와와~!”
흰 피부에 새하얀 머리, 뾰족한 귀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망치와 도끼를 들고 어딘가를 향해 돌진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에, 엘프? 그래, 분명 엘프였다. 만화나 게임에서 보던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귀에는 낯선 말들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제3 전열 붕괴! 드워프 마법진 지원 요망!”
“엘프 강습대, 우측 방어 유지! 전열 무너지면 끝이다!”
“마왕군, 전방에서 진입! 전군 사수하라!”
뭐?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여기는 어디고, 저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더 이상 야구장이 아니었다. 전쟁터였다. 엘프들의 새하얀 머리칼이 피로 붉게 젖은 채 휘날렸고, 가냘픈 팔로 내리친 커다란 강철 망치는 흉측하게 생긴 무엇인가를 산산이 부숴댔다. 그럴 때마다 검붉은 액체가 여기저기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하하하! 더 와봐! 다 찍어 눌러줄 테니까!!”
우아한 겉모습과 달리 엘프들의 외침은 전혀 우아하지 않았다. 고음의 절규와 욕설이 섞인 그 소리는 마치 미쳐버린 전사의 포효 같았다.
뭐야? 무슨 엘프들이 저리 무지막지해? 활이나 마법같은 원거리 딜 전문가들이 엘프 아니었어??
나는 공포와 황당함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멀뚱대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엘프들의 좌측을 향해 흉측하게 생긴 맹수들이 강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엘프 형제님들, 조심하시오!”
어디선가 걸걸하면서도 정중한 어투의 말소리가 들렸다.
“제 육각성 결계 발동! 진혼영창 제13절 개방!”
드워프? 드워프들인가?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무어라 외치며 맹수들로 향했다. 그들의 키는 나의 절반 정도였는데, 몸집은 마치 작은 통나무처럼 단단해 보였다. 두꺼운 가죽 로브 사이로 보이는 팔뚝의 근육은 우직하게 부풀어 있었다.
맞네, 드워프!
“족쇄!”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책을 들고 있던 드워프들이 빈 손을 앞으로 주욱 뻗었다. 순간 작은 체구들 속에서 무엇인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더니 주위의 공기를 진동시켰고, 공중에는 뭔지 모를 글자들이 둥근 모양으로 정밀하게 새겨졌다.
“캬아아악!!”
엘프들을 향해 돌진하던 여러 마리의 맹수들이 벽에 부딪힌 듯 움찔거리더니 곧 불타올랐다. 그리고 딛고 있던 땅이 싱크홀이 무너지듯 아래로 꺼져 버렸다.
“길을 터시오!”
내 뒤쪽으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맹수들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갔다. 햇빛이 갑옷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제5 기사단, 지검(指劍: 검을 적에게 겨눔), 쇄도(殺到: 빠르고 격렬하게 돌진)!”
짧고 굵은 구호와 함께 갑옷의 물결이 맹수들을 향해 파도처럼 몰아쳤다. 곧이어 칼끝이 맹수들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크오오오오!”
함몰된 땅속에서 맹수들의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칼부림. 마법. 괴성. 고함.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꿈인가? 꿈 속에 있는 건가? 그래 꿈이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1군 마운드에 오를 리가 없잖아? 분명 모든 건 꿈일 거야. 벼락맞아 죽은 것도, 이 이상한 상황도 모두 꿈이야.’
꿈이라는 생각이 드니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꿈이라는 자각에 공포심이 서서히 옅어 갔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현실감은 대단하네.’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감탄하며, 여기저기 시선을 돌리며 주변에 벌어지는 일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고, 엘프, 드워프, 인간들이 한데 어울려 마물들에 맞서고 있었다.
여기저기 무엇인가가 터지고 땅이 흔들리고 연기가 매케하게 피어올랐다. 날카로운 발굽 소리, 금속이 울리는 소리, 비명, 살점 찢기는 소리에 내몸이 전율했다.
‘4D 영화관이 따로 없구만.’
뭐 하나 놓칠세라 열심히 고개를 돌리며 구경을 하고 있던 순간, 팔만 한 송곳니를 드러낸 거대한 괴물이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 대단하다. 아주 세밀해. 내가 했던 게임에서도 이 정도로 묘사된 괴물은 보지 못했는데.’
“크오오오오~!”
이글거리는 노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괴물이 고개를 쳐들고 입을 크게 벌리고는 나를 한입에 먹어 치우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이야~ 아주 아주 실감 나, 대단해~.’
“비켜! 이 자식아!”
귀청을 찢는 듯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퍽’ 소리와 함께 괴물의 머리가 내 앞으로 튀어 올랐다.
눈앞에 금발의 미소녀 엘프가 서 있었다. 하늘하늘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강철 검을 어깨에 매고 있었다.
끈적한 괴물의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 쓴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엘프를 바라봤다.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뭘 멀뚱거리며 서 있는 거야,어?”
생김새와는 다르게 말이 상당히 거칠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사람 살렸으면 좀 고마워하라고. 그리고 멍청한 그 복장과 손에 든 건 또 뭐야?”
엘프가 피범벅이 된 유니폼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꿈 속 인물치고는 상당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꼴을 한번 내려다 보았다. 상반신이 괴물의 피에 흠뻑 젖었고 오른손에는 야구공이 들려 있었다.
‘어라? 이게 왜 내 손에?’
내 오른손이 야구공을 꼭 쥐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니 공에 대한 감각이 전해졌다. 손가락 끝으로 오돌톨한 실밥의 감촉도 느껴졌다.
“이, 이건......”
말을 하려 입을 벌리자 내 입안으로 흘러들어온 괴물의 피맛이 비릿하고 찝찔했다. 퉤~하고 나는 피를 뱉었다.
엘프 옆으로 키가 작고 울퉁불퉁한 체구의 드워프가 나타났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귀공께서는 어느 차원의 분이시온지 여쭙고자 하옵니다. 혹 소생과 엘프 낭자가 무례를 범하였다면 사죄의 뜻을 먼저 전하옵니다.”
드워프의 입에서 걸걸한 목소리와 고풍스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이거 정말 재미있는 꿈이네! 컨셉 한번 죽인다! 엘프가 힘캐고, 드워프가 마법사라니, 하하하!”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고 숨이 넘어갈 듯 크게 웃었다.
“이 자식, 뭐가 웃겨!”
엘프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며 검을 내리쳤다. 나는 웃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꾸에에엑!”
푸슉~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내 옆으로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마물 하나가 내게 달려드는 것을 엘프가 그 거대한 검으로 내리찍은 것이었다.
“정신 안 차리냐, 띨빡아!”
엘프가 나를 노려보며 검을 비틀어 댔다. 검에 찍힌 마물은 버둥거리다 움직임을 멈췄다.
“자매님, 아무래도 공자께서는 광인의 기가 침범하여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듯하여이다.”
드워프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놈들이 감히 나를 미친놈 취급하네?’
엘프와 드워프에게 바보 취급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그들에게 한 마디 따끔하게 일러주고 싶었다. 네들은 꿈 속의 인물들이라고.
“쾅~!”
내가 그들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순간, 어디선가 크나큰 굉음이 들려왔다.
“이, 이 사악한 기운은! 마왕이다! 마왕이 나타났구려!”
말을 마친 드워프가 몸을 돌려 앞쪽 숲을 향했다. 숲을 벗어난 언덕 위로 붉은 기운이 불타듯 뿜어져 나왔다. 마치 하늘이 불타듯 붉게 물들었다. 곧이어 땅이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붉은 하늘을 등지고 한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것은 사내라 부를 수 있는 형상이 아니었다. 키는 세 사람을 포개 놓은 것처럼 컸고, 어깨는 산등성이처럼 넓었다. 갑옷처럼 뒤덮인 검붉은 피부는 용암이 굳은 바위같이 거칠었고 곳곳에서 연기와 열기가 새어 나왔다.
얼굴은 뼈와 검은 살이 뒤엉켜 뒤틀려 있었다. 두 눈은 붉게 타오르며 꺼지지 않는 화염처럼 빛났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지옥의 열기가 얼굴 주위에 일렁거렸다.
양팔에는 짧고 거대한 도끼 두 자루가 매달려 있었고, 등에는 검은 깃털과 쇠골로 얽힌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날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위압을 내뿜는 장식처럼 보였다.
그가 발을 딛는 자리마다 불꽃이 일어나며 땅은 움푹 꺼졌다.
“전군은 들어라! 마왕이 강림했다! 전력을 다해 진군하라!”
“와~!”
공중으로 진격 소리가 퍼지더니 여기저기 흩어져 마물들과 싸우고 있던 엘프, 드워프, 인간들이 마왕을 향해 돌격했다. 곁에 있던 미소녀 엘프와 마법사 엘프도 곧장 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미물들은 파멸로.”
낮고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마왕의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베르제... 노크람... 자스티르... 쿠라엘 아모르 제 아르카나...(혼돈과 파멸의 문을 여노라.)”
마왕의 거대한 육신에 음침한 기운이 응축되더니, 말끝이 이어질수록 대기가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곧 대지에 금이 가고 주변의 모든 색이 빛을 잃었다.
“하스 라 케룬...테즈아 그라니트!(태초의 어둠이여, 피와 저주로 나를 도우라)”
마왕이 마지막 음절을 토해내는 순간, 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암흑의 폭발파가 울부짖으며 전장을 휩쓸었다.
피잉~~~ 큥!
처음에는 순간의 침묵이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소리도 움직임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거대한 음파와 마력의 충격이 눈에 보일 정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쿠콰콰쾅!
울퉁불퉁한 대지가 하늘로 솟구치면서 수 많은 엘프와 드워프들도 함께 찢겨 나갔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으그그극!”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나를 덮쳤다. 나는 잔뜩 웅크린 채 충격파에 밀려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무, 무슨 꿈이 이렇게 힘들어!”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다른 사람들처럼 하늘 높이 날려 올라가 사지가 찢길 게 분명했다.
“젠장, 한 번 죽었다고 두 번은 못 죽겠냐? 어차피 꿈인데?”
포기하고 충격파에 날려가려는 찰나, 미소녀 엘프가 풍압에 날려 내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커다란 검을 지면을 향해 내리 꽂았다.
쿵!
“나를 잡아!”
지면에 깊게 박힌 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은 엘프가 내게 외쳤다. 나는 얼떨결에 엘프의 가느다란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 와중에도 손에 쥔 공은 놓치지 않았다.
“공자, 미안하외다!”
충격파에 날리던 드워프가 내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순간 나는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조금만 버텨 주시오, 낭자, 공자! 소생이 미안하오!”
폭풍같은 충격파가 지나갔다. 사정없이 나부끼던 우리는 깃대에서 풀린 깃발처럼 널부러졌다. 나는 엘프의 허리를 안은 채로 축 늘어졌다.
“이 자식, 저리 안 비켜!?”
엘프가 발차기로 나를 자신의 몸에서 떨궈냈다. 나는 뒤쪽으로 떼굴거리며 굴렀다.
“큰일이군. 모든 결계진과 연합군의 진형이 무너졌다오. 이리도 허망하게 망가져 버리다니......”
드워프가 무릎을 꿇은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했다.
주변에 살아 있는 엘프, 드워프, 기사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충격파로 찢긴 대지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시신들 뿐이었다.
쿵, 쿵, 쿵, 쿵
어마어마한 살기를 뿜으며 마왕이 다가서고 있었다.
“도, 도망쳐!”
엘프가 외쳤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힘이 다했는지 검을 쥔 채 일어서지 못했고, 드워프도 무릎을 꿇은 상태로 작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너로구나, 미물이여.”
어느새 우리 앞으로 다가선 마왕이 불타는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낯선 차원의 인간이여.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왔는가. 하긴 별 상관은 없지. 하찮은 미물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이 세상은 마왕 발그람의 것이니. 크크크.”
음침한 목소리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엘프와 드워프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하...... 어이가 없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왕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뼈와 검은 살이 뒤엉킨 얼굴이 화염에 일렁였다.
“무엇이 우스운가, 낯선 차원의 인간이여.”
“꿈 속 인간이 실실 쪼개는 것도 어이가 없고, 꿈 속에서 아픈 것도 어이가 없다. 하물며 꿈 속 인간한테 하찮다고 놀림을 받다니!”
“낯선 차원의 인간이여. 너의 말뜻은 모르겠으나, 너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니, 내가 손수 지워주마.”
“개같은 소리 집어 치우고.”
마왕이 한 쪽 손을 나에게 향하고 뭐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네르 엘 나루샤...토르 나리쉐 엘 자라임.(존재는 사라지리라...혼은 찢기고 바람 속으로 흩어지리니 이름없는 자여 영겁 속에 묻히리라)”
나를 향한 마왕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개소리 작작하라고 했지!”
어차피 꿈인데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와인드업을 했다. 왼 발을 뒤로 빼며 두 팔을 하늘로 향했다. 등 근육이 마치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반동으로 왼 다리를 들고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동시에 몸을 비틀고 오른 팔을 큰 원을 그리며 하늘을 쏟아내듯 앞으로 휘둘렀다. 발바닥부터 다리, 허리, 상체, 어깨, 팔의 힘을 온전히 공에 보내려고 집중했다.
삐잉- 스킬 ‘불같은 강속구’ 발동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은데, 나는 오른 어깨를 자연스럽게 마왕을 향해 사선으로 내려그었다. 정배 형의 미트가 마왕의 얼굴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손끝이 뜨거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뜨거움이었다. 162킬로미터를 던졌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불길을 일으키며 날아간 공이 마왕의 이마를 강타했다.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마왕의 머리가 날아갔다.
이윽고 마왕의 몸이 무너져 내렸고 잠시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미동이 없었다.
정적.
사방이 고요했다. 모든 소리가 멎었다. 너무나도 고요해 내 심장 뛰는 소리만 들릴 지경이었다.
어디선가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마왕이······ 죽었다······?”
드워프가 얼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 영웅이다. 귀, 귀공께서는 영웅이시외다! 신이시여, 이분은 대체······!”
엘프는 놀란 얼굴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드워프는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올렸다.
“귀인의 신묘한 무공에 감읍하옵니다. 성채로 모시옵고자 하오니 부디 거절하지 마옵소서.”
짧은 기도를 마친 드워프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야, 너 진짜 뭐냐?”
엘프 역시 넋빠진 얼굴로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생긴 건 구린데, 스킬은 엄청나잖아?”
나는 멍하니 내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때 나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금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아직 몰랐다. 나의 스킬도, 나의 미래도, 이 세계도. 그리고 계속 온힘을 다해 공을 던져야 하는 나의 운명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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