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 본문을 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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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단도
작품등록일 :
2025.09.05 01:31
최근연재일 :
2025.09.1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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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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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를 드시겠습니까

DUMMY

오래된 책이 열렸다.

먼지가 흩날리며, 빛바랜 활자가 옅은 숨을 들이킨다.


잠에서 깨어난 활자들이 몸을 조립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언제나 같았다.


성의 연회장, 잔을 나르는 이름 없는 시종.


그의 입술은 늘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포도주를 드시겠습니까.”


그뿐이었다.

왕자는 아버지의 미덕을 찬양하며 잔을 들어 올리고, 귀족들은 은수저로 접시를 두드리며 웃음으로 화답한다.


하지만 그곳에, 그는 투명하게 서 있었다.

배경처럼 말이다.


쓰여 있는 대로만 움직이고, 쓰여 있는 대사만 내뱉는 꼭두각시.


그는 책 속 조연이었다.


왕자의 생일.

그날 밤 연회는 언제나처럼 화려했다.

은촛대의 불꽃이 흔들리고, 실크 테이블보는 파도처럼 주름졌다.

그는 할 일을 했다. 잔을 채우고, 고개를 숙이고, 발을 세 걸음 옮기고, 다시 숙였다.


오차는 없었다.

아니, 그의 삶에는 원래 오차가 없다.


잔을 채우며 그는 생각했다.

내가 사라지면, 누가 기억할까.


그런데.


쿵-


가슴이 움찔했다.

심장이 없을 그의 몸이, 알 수 없는 감각에 반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쿵-


없는 심장이, 다시 한 번 뛰었다.

하지만, 그는 예정대로 다음 문장에 등장해야 한다. 낯선 감각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누군가 흘린 고기조각을 밟고 그가 비틀거렸다.

와인이 그의 손등을 적신다.


쨍그랑-!


들고 있던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자, 그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조아린다.

원래라면 여기서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고, 모욕을 듣고, 조용히 퇴장한다.

그렇게 쓰여 있다.


“어이, 시종! 네 눈은 장식이냐?”


그웬 공작이 혀를 찼다.


저 사람은 악역이다.

이야기의 중반까지 독자들의 미간을 찡그리게 만드는 비중있는 조연.

부럽기 그지 없다. 수십 페이지는 살아 있을 테니까.


그는 무릎을 꿇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또 한 번.


쿵-


이번에는 저릿한 통증이 몸속을 스쳤다.


이 방 어디에서 난 것 같지 않은, 낯선 감정.

책을 붙잡은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기척.

페이지를 넘기다 멈춘 손끝의 긴장.


그 낯선 감정이 그의 무릎을 붙잡았다.

(꿇지 마.) 라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쓰여 있지 않은 높이로, 쓰여 있지 않은 눈빛으로.


연회장이 정지한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는 숟가락을 들고 멈췄고, 누군가는 웃음을 되삼켰다.


그웬 공작의 손이 그의 뺨을 올려쳤다.

턱이 돌아가자, 입안에서 쇠맛이 번졌다.

원래라면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울상을 지으며 끌려나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본문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를 작게 만들도록.


그때, 또 다른 물결이 스며들었다.


안타까움.

짧고, 따뜻하고, 숨이 섞인 탄식.


(아···) 하고 누군가가 아주 작게 내뱉는 소리.

그 탄식은 그의 고통을 가져갔다.


그는 천천히 손등으로 피를 훔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본문에 없는 말을 했다.


“···손대지 마시오.”


공기가 얼어붙었다.

촛불 하나가 ‘툭’ 하고 꺼질 뻔했지만 겨우 살아났다.

왕자의 눈동자는 번뜩였고, 공주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의 가슴은 빠르게.

그리고 점점 더 일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그의 오차가 아님을.

누군가의 감정이 나를 움직이는 걸까?


그는 책의 바깥을 향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날 보고 있는 건가요?’


본문과는 달랐음에도 페이지는 넘겨졌다.


“경비!”


그웬 공작이 손을 내저었다.


“이 무례한 놈을 끌어내라!”


철갑이 부딪히는 소리가 홀 끝에서부터 밀려왔다.

창을 든 병사 둘이 그에게 다가왔다.

늦었지만 그들의 창끝에 쓰러져야 했다.


이제라도 퇴장할 시간이 된 것이다.


(에이, 너무하네.)

누군가 손톱을 물어뜯는 듯했다.


분노.

그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다.

그 열감은 기여코 그의 팔로 스며들었다.


병사의 창끝이 그에게 내리꽂혔다.


챙-!


그는 옆 테이블의 은쟁반을 들어 창을 비껴쳤다. 금속이 금속을 때리는 마찰음이 홀을 가르며 울렸다.

병사가 놀란 듯 한 걸음 물러났다.


두려움.

안타까움.

분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들어왔다.

아마도 두려움은 그의 발을 가볍게 하는 모양이다.


그는 옆으로 비껴서며 창자루를 툭 쳐냈다.

또 다른 병사가 창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몸을 낮춰 피했다.

창끝이 머리 위를 스쳤고, 잘려나간 머리털 몇 올이 공중에서 빙글 돌다 촛불에 닿아 타들어갔다.


머리털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다.


퍽!


그는 병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걷어차인 병사가 무릎을 꿇자, 창은 바닥을 뒹굴었다.


홀 안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처음으로 3페이지를 넘겨, 본문 속에 등장한 그는.

너무 행복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욕심이 생겼다.

조금만 더 등장해보기로.


그는 일부러 한 발 비틀거렸다.

은쟁반을 놓치며 어깨로 기둥을 박았다.

피가 다시 배어 나오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홀 전체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하게 말했다.


“···살고 싶습니다.”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안타까움일까?


(에고, 짠해라···)

그 감정이 상처를 봉합하자, 머리에서 흐르던 피가 멎는다.


이어 두려움이 곧장 뒤따르자, 속도가 다시 살아났다.


감정이 느껴진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분노도, 한 스푼 더.


그는 바닥의 와인잔 조각을 일부러 밟았다. 발바닥이 따끔하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그를 위한 묘사 한문장이 생겨났다.


잔을 나르던 시종은 바닥에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에 발이 베였다. 피가 배어나오자 그는 곧장 주저앉아, 살려 달라며 울부짖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요. 뭐든 다 하겠습니다. 끄어억···”


대사의 분량도 충분했고, 불쌍함 또한 만족스러웠다.


조금 더 짙은 분노가 전해졌다.


(저 귀족놈!)


책 너머 누군가의 분노로 생긴 열기는 그의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그는 계획을 변경했다.

한 페이지라도 더 나오려면 반전을 주는 수 밖에.


그는 쓰러진 병사의 창을 들어 올려 반원을 그렸다.

그대로 둘째 병사의 손목을 때리자, 그의 창도 떨어졌다.


그는 그 창자루를 발끝으로 밀어 올려 손에 쥐었다.

처음 쥐어본 창은 무겁기만 하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뒷걸음쳤다.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멈췄고, 공주는 손끝을 떨었다.


그는 창끝을 내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원래보단 낮고, 지문보단 선명하게.


“포도주를 드시겠습니까.”


익숙한 대사가 이 곳에 울려퍼지자, 기분좋은 떨림이 느껴진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그 말은 지금 상황에 맞지 않았음을.

어쩌겠나.

이름없는 조연인 그가 할 수 있는 대사라곤 뻔했다.


그 순간, 천장이 덜컥하고 흔들렸다.

감정의 연결줄이 끊기며, 무릎이 흔들렸다.

온몸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실수로 뱉은 그의 대사에 화가난 걸까.


가지 마.

그는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고 애원했다.

한 줄만 더. 다음 장까지만.


그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다.


어느날 다시 천장에서 빛이 스며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주연조차 알지 못하는걸, 조연 따위인 그가 알 리 없었다.


이윽고 페이지가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미소였다.

크지 않은, 그러나 분명한 미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갈 때 생기는 파문이 그의 안으로 흘러들었다.


주변이 완전히 밝아지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첫장만은 아니길.


“그만.”


왕자가 말했다. 말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히 그의 음성이다.


“그 시종을 이리로.”


병사 하나가 다가오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 발로 걷겠습니다.”


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대리석 위에 번진 와인과 그의 피가 얽혀 걸음마다 진득하게 묻어났다.


왕자의 앞에 멈춰서자, 왕자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마주한 왕자의 시선이다.

한번도 그는 나를 등장인물로 취급하지 않았으니.


“이름이 무엇이냐.”


왕자가 물었다.


그는 대답할 이름이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이름을 준 적이 없었다.

대신, 바깥에서 작은 떨림이 밀려왔다.


호기심일까.

(이름 정도는 있겠지?)

여러 감정이 얇은 실처럼 교차했다.


“아직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가 여기까지 등장할 것을, 그를 빚어낸 조물주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순간, 왕자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지어주지.”

“예?”

“아케디아. 넌 오늘부터 아케디아다.”


그렇게 그는 이름을 얻었다.

더 이상 이름 없는 조연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이름 있는 조연이다.


아케디아는 그 자리에 서서 왕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날뛰는 고동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대사를 해야 한다.


“왕자님의 큰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케디아가 큰 소리로 왕자를 향해 허리를 굽히자, 차가운 시선으로 아케디아를 바라보던 홀 안의 사람들도 이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단, 그웬 공작만은 탐탁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다.


왕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케디아에게 말했다.


“넌, 오늘부터 나의 근위 기사다.”

“예? 기, 기사말입니까?”

“난 두번 말하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왕자의 말에 뜨끔했다. 이 왕자는 겉으로는 사람좋은 척을 하나,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부류다.


“몸을 바쳐 왕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아케디아의 말이 흡족했는지 그는 자신의 검집을 매만지며 눈짓했다.


아!

대충 알고는 있었다.

기사가 되려면 여기서는 한쪽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걸.


왕자는 무릎 꿇은 아케디아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홀 안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린 순간, 왕자의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검 끝이 아케디아의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그대, 아케디아. 오늘부터 그대의 이름은 왕국의 영광으로 빛나리라.”


곧이어 왕자는 다시 검을 들어 왼쪽 어깨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대를 베칸다 왕국의 정식 기사로 임명하노라.”


아케디아는 갑옷 없이 기사가 되었다.


홀 안의 사람들은 왕자와 아케디아를 보며 박수를 쳤다.

처음 받아보는 스포트라이트.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온 몸에 전율이 돋았다.


그때, 한가지 사실이 뇌리에 떠오른다.


···저 왕자, 이름은 있던가?

이름이 있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


베칸다 왕국의 이름없는 왕자···


손발이 떨렸다.

희망이 아닌 실망으로 말이다.


이름도 생겼고, 기사도 되었다.

하지만 저 왕자는 곧 죽는다.


그 페이지에서 나도 함께 지워지는 것인가?


끼익-


다시 천장이 어두워지며, 책이 닫힌다.


하지만 아케디아는 그 순간 웃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을 꿈꿔 왔기에.


아케디아는 어두워지는 천장을 보며 결심했다.


한 문장이라도 더.

한 페이지라도 더.


그렇게 본문을 벗어나볼 것이라고.


그러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때로는 비참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무모할 만큼 용감하게.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본문에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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