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 본문을 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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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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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5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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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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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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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비 베칸다

DUMMY

뜨겁다.

몸에서 이는 빛 때문 만은 아닌 것 같다.

통증에 비례한 열이거나, 그럴듯한 반격 한 번 못해본 수치심 때문이거나.


그래도 눈은 감지 않았다.

본문은, 눈을 감은 자에게 분량을 주지 않으니까.


(죽지마.)

마지막 발버둥에 반응하듯, 은은한 목소리가 파문처럼 번졌다.


이건, 당신의 목소리인가요?

고맙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봐 주셔서.


작은 상처라면 당신의 권능을 기대했겠지만, 심장이 꿰뚫려서야···

아케디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몸에서 이는 빛과 열은.

죽기 전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환상이라 치부했다.

그게 더 이해하기 쉬웠다. 죽음은 간단하고, 기적은 어렵다.


그런데 빛은 계속 쏟아졌다.

실처럼 갈라진 빛은 속과 겉을 꿰맸다. 빛이 지나간 자리마다 살이 붙는다.

숲이 잠깐 고요해졌다.

그웬의 발끝이 멈추고, 복면을 쓴 자들과 병사들마저 검끝을 내려놓았다.


모두가 처음 보는 광경.

흙바닥 위로 툭, 땀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케디아···?”


반즈 단장이 숨을 들이키며 작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아케디아의 귀에는 그 작은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예? 저를 부르셨습니까?”


입가를 타고 흐르던 핏줄기는 여전했지만, 목소리는 죽어가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반즈의 시선이 빠르게 옮겨 갔다.

손등에 핏줄을 세우는 그웬 공작이 보여서다.


“아케디아! 굴러! 옆으로!!”


단장의 외침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쾅-


방금 전까지 아케디아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그웬의 검이 박혀 있다.

한 박자만 늦었어도 그는 다시 관통당했을 것이다.


아케디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의 팔과 가슴에 있을 구멍에서 혹여 통증이 새어나올까 긴장했다.


“어라?”


움직임을 조금씩 키워도, 고통은 일지 않는다.

갑옷 틈새에 굳은 피가 들러붙어 상처를 확인 할 수는 없지만, 손끝에 닿는 건 뜨거운 잔열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갑옷 위를 두드려본다.


‘엥?’


설마 이 큰 상처가 나은 것인가?

당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케디아의 눈가가 서서히 젖어들었다.


다행이다.

마지막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찝찝했었다.


그렇게 아케디아는 당신에게서,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받았다.


반면, 앞에 있던 그웬의 눈은 충혈되어 있다.

눈가에 선 핏발이 마치 그를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다만 묻는 말에 대답하는 버릇은 시종 시절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솔직하게.

그리고 덤덤하게.


“모르겠습니다.”


목표를 잃고, 땅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 든 그웬은, 아케디아를 노려보았다.


“마법인것이냐? 누구의 짓이냐.”

“여기에 마법사도 있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케디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의 먼 뒤에서 마법사가 등장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다.

마법은 아케디아에게 신기루 같은 거였다.


“나와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아니면, 네놈이 마검사라도 된다는 말이냐!”

“예? 제가··· 마검사요?!”


그 말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법을 쓰는 검사.

다시 태어나 다른 책에서 누군가로 등장할 기회가 온다면, 꼭 마검사가 되어보고는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 했다.


(재밌겠는데?)

당신의 말끝이 올라갔다.


호기심인지, 흥미인지 가늠할 새도 없었다.

잉크가 튀자, 종이가 마르는 느낌이 아케디아에게 전해졌다.


새로운 문장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순간, 아케디아의 동공에 짙은 열기가 스며들었다.

그 기운은 곧장 그의 전신으로 번져 흘러, 마침내 손에 쥔 검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아케디아의 검은.

새빨간 불길을 머금고 활활 타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붉은 꽃 봉우리가 피어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불길이 솟구치자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곧 이해했다.

이것 또한, 당신의 권능임을.


“···뜨겁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아케디아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웬은 당황했다.

베칸다 왕국에는 마검사라 불리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눈앞의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의 가문에서도 마검사를 길러내기 위해 마법을 가르쳤지만, 마법과 검의 재능을 함께 타고난 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네놈! 감히 정체를 숨기고 있었구나! 누구의 사주를 받은 자냐! 어느 왕국의 첩자이며, 또 어느 가문의 족속이더냐!”


당황한 그웬은 머릿속의 의심을 여과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아케디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질문 중 아케디아가 해당되는건 없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자 그웬이 다시 검을 내질렀다.

교본 같은 찌르기였다.


아케디아는 다가오는 그웬의 검끝을 보며, 무작정 검을 들어 허공을 그었다. 자신에게 닿으려면 아직 서너 걸음은 남아 있었는데 말이다.

그웬은 비웃듯 입꼬리를 떨었다.


‘그럼 그렇지!’


닿을 거리가 아닌데도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아케디아를 보며 안심했다.

그는 분명, 마검사가 아니라 그냥 마법사 일게 분명했다.


화르륵-


검이 지나간 빈 공간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 광경에 그웬의 표정은 조금씩 굳었다.


콰광-


불기둥이 그웬을 직격했다. 그는 검을 들어 급하게 막아보았지만, 검게 그을린 외투와 끝이 구브러진 머리칼에서는 탄내가 진동했다.

예상만큼 강력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맨몸으로 받아낼 정도도 아니었다.


‘진짜, 마검사란 말인가.’


그웬은 부정해보려 했지만 떨리는 손끝은 숨기지 못했다. 애써 태연한척 해보려 해도 방금전 아케디아의 일격에 몸과 마음, 둘다 타격을 입었다.


아케디아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검을 내려다봤다.

다가오는 그웬이 무서워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불기둥이 뿜어진 것이다.


‘내가 한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했다.

아케디아는 그웬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허공에 검을 그렀다.


화르륵-


두 번째 불기둥이 땅을 쓸며 뻗어갔다. 뒤늦게 아케디아의 손이 통증으로 저릿해 왔다.


‘세번은 힘들겠는데···’


다가오는 화염을 보며, 이번에 그웬은 바닥을 구르며 피해냈다.


“와!”


자신이 뿜어낸 화염에 대한 감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구르는 방향이며 멈추는 타이밍.

재빠르게 일어서는 동작.

하나같이 군더더기가 없었다.


탄성은 그웬에 대한 찬사였다.


하지만 흙투성이가 된 그웬의 귀엔 그 소리가 조롱으로 들렸을 것이다.


“··· 내가 그리 우습더냐?”


그웬의 흰자에 굵은 핏발이 더욱 선명히 돋아났다.

넷째 왕자는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피어오른던 흙먼지는 어느덧 가까워져 있었다.

땅의 울림이나 말발굽의 소리로 미루어 봤을 때, 최소 열 이상이었다.


속전속결을 바랬지만, 뜻밖의 변수에 그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제길···! 오늘은 여기까지. 후퇴하라!”


그의 외침에 복면을 쓴 괴한들은 검을 거두고 일제히 숲 속으로 흩어졌다.

정체가 드러난 그웬 역시 숲 속으로 몸을 옮기며, 잠시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다음번엔 반드시 정체를 밝혀주마.’


그웬의 떨리는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습격자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반즈 단장은 거친 숨을 토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땀이 이마를 타고 떨어졌다.


“아케디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직 불타는 검을 쥐고 있는 아케디아를 보며 반즈가 물었다.


“저, 그··· 그게···”


이걸 어떻게 설명하나.

그리고 이 불은 대체 어떻게 끄지?


“시, 신! 신께서 도우셨습니다···”


아케디아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버벅였다.

저 말을, 누가 믿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이야기는 돌아가서 듣지.”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반즈가 정리하자, 긴장이 풀린 아케디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이 곳에서 가장 혼란스러운건 자신일터다.

좀처럼 두근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 숲길 저편의 흙먼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아케디아는 의문을 가졌다.

이런 전개는 본문에 없었기 때문이다.


말 열마리를 묶은 한대의 마차.

그것 뿐이었다.

그곳엔 단 한명의 마부가 있었다.


반즈는 그들에게 시간의 제약을 가했을 뿐, 실상은 속임수와 다를바 없었다.

아마 아케디아가 그웬 공작을 붙들어 놓지 못했다면, 쓰여진 데로 왕자는 죽었을 것이다.


결국 본문은 다시 쓰여졌다.


소란이 잦아들자, 왕자가 마차에서 나왔다. 먼지 속에서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병사 셋이 다쳤지만, 죽은 이는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왕자는 반즈를 보며 묻는다.

잠시였지만 반즈의 귓속말을 들은 왕자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왕자의 시선이 아케디아에게 머물렀다. 연회장에서 처음 이름을 주던 날과는 다른 시선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군.”


처음 습격을 당해 떨던 왕자는 없었다. 아케디아의 생각보다 왕자는 단단한 모양이다.

왕자가 손짓하자 아케디아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케디아였지?”

“예, 맞습니다.”

“오늘 일은 후에 보상하도록 하지.”

“아, 아닙니다. 저는 할 일을 했을 뿐.”


왕자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아케디아가 생각하던 넷째 왕자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저 이름없이 사라지고 마는 힘없고 나약한 왕자라 생각했다.


그를 너무 빨리 단정했는지도 모른다.


왕자가 마차로 들어가려다, 고개를 돌려 묻는다.


“아케디아, 내 이름은 아느냐?”


자신의 이름을 아느냐 묻는다.

들은 적 없었다.


“모릅니다.”


아케디아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왕자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나는”


(??)

두근대는 당신의 박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종이의 여백이 채워질 모양이다.


“마츠비다. 마츠비 베칸다.”


없었기에 알 리 없던 왕자의 이름이 생겨났다.

이 자리에서 사라졌어야 할 그의 운명이 흐트러졌기에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심장박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그도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마츠비 베칸다.


아케디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살아남은 기쁨보다, 이름을 준 은인에게 아주 작은 보답을 해낸 듯한 안도감이 먼저 왔다.


이제 다음 페이지는 조금 더 느리게 넘겨질 것이다.


“출발!”


정적을 깨는 반즈 단장의 외침에 일행은 다시 분주해졌다.

다친 병사 셋은 간단히 붕대로 지혈했고, 마차를 끌던 말도 충분히 안정을 되찾았다.


반즈가 아케디아 곁으로 다가와 낮게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예?···”


여정이 끝난 후 묻겠다던 반즈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 모양이다.


“포도주를 따르던 시종···입니다···.”

“그게 다인가? 유력 가문의 숨겨진 서자라든가, 뭐 그런 건 아니고?”

“예?···”


반즈가 코밑을 문질렀다.


“끄응, 일단은 알겠네.”


유력 가문의 숨겨진 서자?

주인공에게나 있을 법한 설정이다.


아케디아가 아는 한, 그런건 없었다.

말 그대로 이름없는 시종이었을 뿐.


수레바퀴가 울퉁한 바닥을 넘어갈 때마다, 숲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케디아는 어느새 식어버린 자신의 검을 쓸었다.

더는 뜨겁지 않았지만, 손바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아케디아는 흐릿해진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저는 오늘도 살아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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