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늙은이 3
<수상한 늙은이 3>
"인류를 구하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밑져야 본전이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줘야 이 재미도 계속된다. 늙은이의 눈이 빛난다.
"음, 역시 쪼잔하구만.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대가부터 챙기려 하는 것을 보니 말야. 그러나, 조오흔 질문이야"
늙은이는 페트병을 기울여 남은 물을 꿀꺽였다.
"물론, 그냥 시키겠다는 게 아냐. 자네 같은 인간에겐 당연히 보수가 있어야겠지"
늙은이는 헛기침으로 위엄을 세우고 말을 이었다.
"좋아. 확실히 얘기하지. 성공하면 그 세상에서 얻은 모든 능력과 재화를 다 주지"
- 그 세상에서 얻은 모든 능력과 재화라고? 거기가 어디지? 게임 속인가? 아니, 이계를 말하는 건가?
늙은이의 말이 요사하게 이어졌다.
"이 기회가 자네의 더러운 운명을 벗어나는 단 하나의 길일 거야. 어허, 인간사 모사재인(謀事在人)이고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싫으면 말게"
길에서 떠드는 것치곤 리얼한 내용이고 묘한 자신감이다. 이상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판타지 소설처럼 이 늙은이가 자신을 게임 속으로 끌고 들어갈지도 모른다.
물론 2024 년인 지금은 가상 현실 게임이 개발도 안 된 상태지만 말이다. 확실하게 질문해야 한다.
"어딘지 모르지만, 제가 그 세상으로 갖다 와야 이 개꼴 나는 운명을 벗어버릴 수 있다구요?"
나는 잠시 심사숙고 하는 척했다.
"말씀대로 진짜 보수만 확실하다면 하겠습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실제로 적당한 돈만 준다면 신약 개발 몰모트로라도 뛰어야 할 판이다.
고시원 비용도 간당간당 하다. 당장이라도 길거리 노씨로 지하도에 나앉을 형편이다.
"음, 보기보단 강단이 있구먼. 탁월한 결정이야. 자네가 가장 천박한 동물로 생각하는 것이 무언가?"
과감히 실행하겠다는 내 비장한 발언을 한 마디로 씹고 늙은이는 엉뚱한 걸 묻는다.
돈 얘기를 슬쩍 건너뛰는 것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일단 장단을 맞춰줘야 한다.
"귀뚜라미입니다. 어둡고 습기찬 곳을 뛰어다니는 등 동그란 놈이 가장 징그럽고 더러운 놈 같습니다"
어릴 때 꼽등이란 놈이 동족을 잡아먹는 것을 봤다.
그놈들 몇 마리를 잡아 빈 어항에 넣어 두었다. 뚜껑이 덮여 있어 어항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했다.
그 다음 날, 가장 큰 놈 한 마리만 남아서 더듬이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놈의 주위엔 동족의 머리와 다리가 분해된 각질로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 이후로 지구 생물의 말종으로 귀뚜라미 종, 동족 식육족 꼽등이를 꼽았다.
"흐음. 내가 아무리 무정해도 자네가 곤충으로 시작하는 꼴은 못 보지. 동물 종자를 대보게나"
- 뭐라? 곤충으로 시작하는 꼴은 못 본다고?
더 이상한 말을 한다. 사주팔자를 보려는 본래의 의도는 이미 저쪽으로 물 건너갔다. 에라 내친 김이다.
"쥐입니다. 동물 중에 가장 천박한 종자죠"
나는 조금 아까 내 발 밑을 지나간 쥐를 떠올리고 아무 생각없이 말했다.
쥐를 싫어하지만 딱히 더 싫어하는 동물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흐음, 쥐라. 너무 심하긴 하지만 자네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니 쥐로 하지. 허어, 잘못하면 내가 지겠는데..."
'내가 간절히 쥐를 원했다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스무고개 놀이 같다.
인류 구원, 소돔과 고모라, 팔자를 고치려면 그쪽 세계로 가라. 등등.
그러나, 아직 성질 내고 일어서기는 이르다. 내게 만 원은 큰 돈이다. 밑바닥까지 재미를 긁어내야 한다.
"어르신이 이긴다면 그 성공 기준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생존이 달렸다는데 매사를 허투로 할 수 없다.
친구와 하는 <롤 플레잉 보드 게임>을 플레이해도 역할에 몰입해야 즐길 수 있고 시간도 잘 간다.
"성공 기준이라... 자네가 사람이 되면, 그걸 승리 기준으로 하지. 제대로 된 사람 말야"
무슨 말인지 더 아리송했지만 어치피 현실을 벗어난 말장난 배틀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사람이 되면 제가 보수를 받을 수 있나요?"
"당연히 줘야지. 만수르의 몇 배라도 주지"
천 조원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는 세계 제일의 갑부 만수르. 내게 돌아오는 보상이 그 몇 배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엑스타시가 온다.
어차피 말장난이지만 그 말만으로도 복채 만 원값은 충분히 했다.
만수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저기 보이는 3층 짜리 고시원 건물 하나만 가져도 소원이 없다.
시간은 남아돌고 숙소로 돌아가야 할 일도 없다. 더 노닥거리기로 했다. 이 늙은이는 좋은 대화 상대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해야 만수르가 될 수 있는지?"
이런 진지한 질문에 늙은이는 대답을 않고 자꾸 주위만 살펴본다. 가끔 귀를 쫑긋거리기도 한다.
인생을 바꾸는 구체적 방법까지는 알려주지 않는 자들이 바로 점쟁이란 종자들이다.
"그런데, 자네를 쫓는 존재들이 있어도 괜찮겠나?"
주위를 살피던 그가 갑자기 이상한 것을 묻는다. 어차피 대화의 주도권은 늙은이가 쥐고 있다.
주인공이 있으면 당연히 그 카운터파트인 적(敵)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재미있다.
소설과 시나리오의 기본 작법이다. 즉시 대답했다.
"안티고니스트(Antigonist)인 적들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모험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있어야죠. 적들이 강할수록 성취감이 더 절절하죠"
정말 이계에 간다면 괜히 들판이나 헤매다가 돌아올 수는 없다. 적절한 모험이 있어야 재미도 있고 무언가도 생긴다.
경험치를 줄 괴물들, 추풍낙엽으로 썰어버릴 적들 그리고, 내가 구해줘야 할 아름다운 여자.
"고맙네.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한 약속을 확정하세. 자네는 인류의 가치 대변자로서 참가 여부, 쥐로 시작, 강력한 적의 존재, 모든 조건을 다 승락했네. 인정하나?"
모두 내가 아는 내용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오흔 정신 좌아세야. 보답으로 자네에게 한 가지 능력을 얹어 주지. 이건 승리를 위해서 꼭 필요한 거야"
이상한 발음으로 내 말을 확인하더니 나를 직시한다. 장난으로 시작한 게임이 점점 더 진지해진다.
"한 가지 능력이라뇨?"
"영혼 능력이야. 가장 어렵고 고귀한 능력이지. 자신의 영혼이 다른 개체로 들어가는 전이 능력까지 포함해서야. 물론 일정 조건을 갖춰야 하지만 말야"
- 뭐? 영혼이 옮겨다닌다구? 그거 좋지.
- 내가 부자 몸에 들어가면 일생 호강을...미국 대통령 몸 안으로 들어가도 되고... 흐흐, 천하 미남 탐 크루즈 몸도 좋지. 세상 미녀들을 모두...
개소리는 개생각으로 즐겨준다. 허황될수록 상상하는 재미가 더 커진다.
- 영혼능력이라. 처음 들어보는 능력이야. 어떤 웹소설에서도 못봤어. 생각만 해도 즐겁구나.
"내가 한 가지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드디어 점괘를 주려나보다. 만 원 받고 농담 따먹기만 하고 보내려니 찜찜한 거다.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게"
- 이게 무슨 귀뚜라미가 똥 싸는 소리지?
내가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급히 말했다.
"이크, 시간이 다 됐군. 그들이 이 근처까지 다 왔네. 참 집요하구먼. 빠르게 다가 오고 있어. 시간이 없어. 지금 바로 시작하세. 하여튼 건투를 비네"
- 그들이라니? 게다가, 그들이 다가온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네.
-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원, 꼭 이렇게 신비한 척을 해야 하나?
하여튼, 판타지 여행 만 원 어치가 다 소진되었나 보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었다.
점쟁이와의 대화로 오늘 돌돌 말렸던 마음이 많이 풀렸다.
고시원 내 방에 가서 소주 한 병 때리고 내일부터 새 직장을 알아볼 생각이다.
나는 점쟁이 늙은이를 향해 호쾌한 웃음을 날렸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내가 줄 선물에 대해서는 말해줬지? 영혼 능력은 삶과 죽음 다루는 궁극의 네크로맨서만 갖는 능력이라고 말야"
"지금 시작한다고요? 그러시죠. 말씀 재미 있었습니다"
늙은이가 일어나려는 포즈를 취했다. 나도 같이 일어났다. 돌연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 참. 내가 깜빡했구먼. 영혼 능력 발휘의 첫 번째는 시체 흡입인데... 좀, 징그럽겠지만... 그리고, 정 견디지 못 하겠으면..."
갑작스런 늙은이의 행동에 나는 얼른 손을 뺐다. 아니, 빼려고 했다. 그러나, 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단단히 잡혔는지 쇠집게로 팔목을 찝힌 듯했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빠른 어조로 무슨 말을 더했다. 그것은 언어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빼려는 몸부림에만 열중해서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이 늙은이가 도대체 뭔 짓을..."
"디시 한 번 말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짓지 말게. 그리고 존버... "
내가 엉덩이로 밀어내는 의자 소리에 마지막 말을 잘 듣지 못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이것이 인간이었을 때의 마지막 기억이다. 심심풀이 한 번에 인생 망쳤다. 홧김에 서방질 아니, 내 목숨질을 한 것이다.
- 생각하기도 싫다. 다 내 자업자득이다. 이미 다 지나간 그쪽 세상 얘기다.
* * *
내 앞길을 막던 꼽등이를 다 잡아먹고 정들었던 작은 공간을 벗어난다. 대장정이다.
드디어 건너편 통로로 들어섰다. 인간의 길로 가는 첫 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딛었다.
저쪽 편으로 검은 길이 쭈욱 이어져 있다.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가득 찬다. 성지로 향하는 길이다.
희망이 보인다. 아무리 황폐해도 인간은 신을 찾아 헤맬 광야가 필요한 존재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멈춰졌다. 그놈을 발견한 것은 저쪽 끝에서였다. 보는 즉시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비로소 알게 됐다. 그래서 꼽등이들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보는 순간, 거대한 공포가 다가왔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온몸이 떨리고 위축되어 걸음을 옮길 수 없다.
무시무시한 존재가 저 앞에 도사리고 있다.
놈에게 다가가는 것은 총탄이 빗발치는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과 같다.
- 그러면 그렇지. 벌레 정도로 시련이 끝난다면 이 통로는 The Way to Heaven 이 아니지.
빛과 하늘로 향하는 순례길이라면, 군데 군데 목말라 죽고 짐승에 뜯긴 시체가 보여야 제격이다.
'여기가 바로 죽음의 순례길이오' 라는 표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표식을 남겨 놓을 존재가 저 앞에 있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바로 자신이 이런 하늘길 데코레이션으로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고난의 행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길 따위는 아예 없다.
저놈이 풍겨내는 포스를 보니, <만수르의 꿈>이 아니라 <생존의 기도>를 해야 할 판이다.
놈은 거뭇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길 한 옆에 수문장처럼 앉아 있었다. 쥐다. 그러나 쥐가 아니다.
쥐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 시인의 현재 몸에 비해 최소한 4 배 정도의 크기다. 시인이 보기에 마치 산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놀랍다. 윗 턱에 두 개의 상아빛 송곳니가 돋아나 있다.
마치 검치 호랑이 그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길게 뻗은 하얗게 반짝이는 두 개의 칼날이다. 검치쥐다.
쥐라는 동물은 먹이를 쏠아대는 앞 이빨만 있을 뿐 송곳니는 없는 동물이다.
그러나, 이 괴물쥐는 앞 이빨 외에 윗 송곳니 두 개가 턱 밑으로 길게 돋아나 있다.
저 어마무시한 칼날에 찍혔다 하면, 보통 쥐의 몸통 정도는 순식간에 두 동강이가 날 것이다.
그런 절대 존재가 길을 막고 있다. 거대한 검치쥐는 새파란 적의를 가지고 시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 젠장할. 튜토리얼 단계에서 극강 끝판왕이 나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저거 실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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