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펜 끝의 추적, 기자의 직감
피와 빗물이 뒤섞인 아스팔트 위로,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축축하게 번지고 있었다.
조직원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골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에 질린 표정을 하면서도, 훈련된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시신을 담요로 덮고, 핏자국을 지우고, 탄피를 수거했다.
그 모든 소란의 중심에, 류신은 여전히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조각상처럼.
그의 검은 이미 칼집에 거두어져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예리한 칼날이 주변 공기를 베어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조직원들은 그에게서 최소 세 걸음 이상 떨어져 움직였다. 감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저것은 인간의 영역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최도현이 방탄 처리된 검은 세단의 뒷문을 열었다. 그는 부서진 어깨의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강태오를 부축했다.
태오는 피에 젖은 몸을 간신히 차에 실었다. 가죽 시트에 피가 배어드는 감촉이 불쾌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차창 밖, 여전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류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분도.”
태오가 낮게 말했다.
최도현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형님, 하지만···.”
“내 말 안 들려?”
날카로운 목소리에 최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류신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타시죠. 저희 형님이 모시라고 하십니다.”
류신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돌려, 검은 세단과 그 안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강태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은 젖어 있었지만, 빗물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장 시끄러운 곳.’
류신은 속으로 되뇌었다.
‘가장 깊은 어둠.’
그는 말없이 움직여, 태오의 반대편 뒷좌석에 올랐다. 육중한 차문이 닫히자, 바깥세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차 안에는 태오의 거친 숨소리와 에어컨 바람 소리, 그리고 숨 막히는 침묵만이 남았다.
차는 부드럽게 골목을 빠져나와 강남의 밤거리로 합류했다.
화려한 불빛들이 빗물에 젖은 차창을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수백 년 전의 세상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 류신은 무감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불빛들만큼이나 현란하고, 그만큼이나 공허한 시대였다.
태오는 팔의 통증을 참으며 류신을 곁눈질했다.
젖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 옷차림은 평범했지만, 그에게서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치 잘 벼려진 칼날처럼,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긴장시키는 압도적인 위압감.
“이름이 뭐지?”
태오가 먼저 침묵을 깼다.
“······.”
류신은 대답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태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저런 괴물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을 터였다.
“내 이름은 강태오다. 흑성파의 대표지.”
스스로를 소개했지만, 류신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태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그는 맹수의 우리에 제 발로 머리를 들이민 기분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 맹수를 길들일 수만 있다면, 조직 내의 배신자는 물론이고 이강민까지 단숨에 찍어 누를 수 있을 터였다.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차는 어느새 강남의 화려함을 벗어나, 육중한 철문으로 가려진 한적한 건물 지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흑성파의 심장부이자, 강태오의 왕국이었다.
* * *
“찾아내야겠어.”
한지연의 목소리는 텅 빈 오피스텔에 낮게 울려 퍼졌다.
“당신이 누구든.”
그녀는 낡은 트렌치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가장 아끼는 만년필과 취재 수첩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대기업 비자금 관련 자료들은 이미 그녀의 안중에 없었다.
그것들은 그저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진부한 서사.
하지만 지금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2024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검을 든 남자’.
이것은 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폭력적이며, 미스터리한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치 잊혀진 고대 신화의 한 조각이 현대의 아스팔트 위에 툭 떨어진 것만 같았다.
지연은 곧장 차를 몰아 강남경찰서로 향했다. 정문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늦은 밤, 그녀는 경찰서 뒤편의 후미진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김 반장이 교대 시간 직후, 머리를 식히기 위해 꼭 들르는 장소였다.
역시나, 희미한 담배 연기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반장님.”
지연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자, 김 반장은 화들짝 놀라며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씨, 깜짝이야! 너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반장님 동선 파악하는 게 대기업 회장님 동선 파악하는 것보다 쉬운 거 아시잖아요.”
지연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다가섰다.
“헛소리 말고 용건만 해. 나 피곤해 죽겠다.”
김 반장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그의 얼굴에는 사건 현장의 피로감이 역력했다.
“현장, 직접 보셨죠?”
지연의 목소리가 낮고 진지하게 바뀌었다.
“······.”
“총상으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면서요. 대부분··· 칼에 베인 상처였다고요.”
김 반장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지연. 내가 너 아껴서 하는 말인데, 이 사건에서 손 떼. 이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
“그러니까 더 알고 싶어지는 거죠. 반장님도 아시잖아요, 제 성격.”
“성격 좋아하시네. 그러다 진짜 죽는 수가 있어. 상대는 그냥 동네 양아치들이 아니야. 흑성파, 그것도 제일 독한 놈들이었어. 그런데 그런 놈들이··· 무슨 닭 잡듯 목이 날아갔다고.”
김 반장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베테랑 강력계 형사조차 공포를 느끼게 한 현장이었다.
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림자 같은 남자. 생존자가 그렇게 말했다면서요.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없을까요? 인상착의라던가··· 뭐라도.”
“······미친놈 헛소리라고 했잖아.”
“베테랑 강력계 형사가 미친놈 헛소리 때문에 이렇게 잠 못 이루고 담배만 태우진 않죠.”
지연의 집요한 추궁에 김 반장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하··· 진짜 너란 애는.”
그는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검은색 옷.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마른 체형. 그게 다야.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서 제대로 못 봤다더군. 그리고···.”
김 반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 무언가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요?”
“그놈이··· 총알을··· 피했다고 하더라.”
“네?”
지연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거 알아. 쇼크 때문에 헛것을 봤겠지. 하지만 그 생존자 놈, 눈빛이··· 거짓말하는 눈이 아니었어. 진짜로 ‘봤다’고,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었다고.”
총알을 피하는 남자.
지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용병?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
“CCTV는요? 현장 주변에 분명히 있을 텐데요.”
“그게 더 미스터리야. 그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목 CCTV는 전부 먹통이 됐어. 아주 잠깐, 몇 분 동안. 전문적인 장비로 전파 방해를 한 흔적이 있더군. 작정하고 벌인 일이야.”
점점 더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철저하게 계획된 기습, 그리고 그 계획을 아득히 뛰어넘는 미지의 변수.
‘검을 든 남자.’
지연은 직감했다. 이 사건의 모든 열쇠는 그가 쥐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반장님.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요.”
“야, 야! 내가 뭘 알려줬다고! 기사 한 줄이라도 쓰기만 해 봐!”
김 반장의 외침을 뒤로하고, 지연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머릿소리보다는 심장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CCTV도, 목격자도 없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사건의 또 다른 당사자, ‘흑성파’.
그녀는 차에 올라타 내비게이션에 익숙한 주소를 입력했다. 흑성파가 운영하는 강남의 최고급 멤버십 바. 그곳은 단순한 유흥업소가 아니었다. 강태오를 비롯한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움직이는 아지트이자, 온갖 검은 정보가 모여드는 소굴이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특종의 냄새는 기자의 모든 두려움을 마비시키는 마약과도 같았다.
‘검은 그림자···.’
지연은 엑셀을 밟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서울의 밤은, 그녀의 뜨거운 호기심을 삼킬 듯 깊고 어두웠다.
* * *
끼이익–.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지하 주차장의 철문이 닫혔다.
강태오가 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형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함께, 태오의 뒤를 따라 내리는 낯선 남자를 향한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류신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낯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 그리고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수백 년 전의 그가 머물던 음습한 암채(暗砦)와는 전혀 다른, 현대적인 요새였다.
“안으로.”
태오는 짧게 명령하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장섰다.
비밀번호와 지문 인식을 거쳐 두꺼운 방음문이 열리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넓은 홀은 최고급 호텔 라운지를 방불케 할 만큼 화려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와인 셀러, 중앙의 거대한 가죽 소파, 그리고 여러 개의 모니터가 설치된 상황실까지. 이곳이 조폭의 아지트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어느 대기업의 비밀스러운 VVIP 라운지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직의 핵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날카로운 눈매와 야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한 남자였다. 조직의 2인자이자 태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이강민 상무였다.
“형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연락도 없이···.”
이강민의 시선은 태오의 상처를 스치듯 훑고는, 곧바로 그 뒤에 서 있는 류신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단순한 경계를 넘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낯선 맹수를 보는 듯한 적의로 이글거렸다.
“그리고··· 저분은 누구시죠?”
그의 질문에 홀 안의 모든 시선이 류신에게로 집중되었다. 의심과 호기심, 경외와 질투가 뒤섞인 수십 개의 눈동자.
류신은 그 모든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소란스러운 시장 한복판에 우뚝 선 오래된 석상처럼, 그는 자신만의 시간 속에 존재했다.
태오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의사부터 불러. 그리고···.”
그는 턱짓으로 류신을 가리켰다.
“이쪽은 오늘부터 우리 식구다.”
“네?”
이강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높아졌다.
“형님, 지금 그게 무슨···.”
“내 목숨을 구해준 분이다.”
태오의 한마디에 홀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조직원들은 충격에 휩싸여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강민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류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모를, 뼈대도 없는 외부인을 하루아침에 ‘식구’로 들인다는 말에 그의 자존심이 날카롭게 상했다.
반면, 이강민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한 남자의 눈빛은 달랐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뱀처럼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태오의 책사이자 조직의 브레인, 박준서 실장이었다.
박준서는 류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류신의 마른 체형 너머에 숨겨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힘을, 무감한 표정 뒤에 감춰진 심연의 깊이를, 그리고 이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조직에 가져올 파괴력과 가능성을 동시에 읽고 있었다.
늑대를 피하려 호랑이를 들인 것인가.
아니면, 신의 칼을 손에 넣은 것인가.
박준서의 입가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 지루한 판을 뒤흔들, 아주 흥미로운 ‘패’가 등장했다.
류신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각기 다른 욕망의 시선들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시끄러운 곳.
인간의 탐욕과 배신, 의심과 야망이 들끓는 곳.
‘흑연의 그림자’ 놈들이 결코 자신을 찾아낼 수 없는, 완벽한 은신처.
그렇게 고대의 검은, 현대의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새로운 폭풍의 눈이, 조직의 심장부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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