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우주의 여신
2024년 1월, 서울 연신내.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잔눈이 흩날렸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며, 떨어지는 눈발들이 빛을 머금었다가 천천히 녹아내렸다. 도시의 숨결 위로 하얀 입김이 겹겹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여름은 육교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금속 난간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냉기가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뼛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하—”
짙은 입김이 공기 속으로 흩어지며, 이내 바람에 녹아 사라졌다.
아래로는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붉은 브레이크등이 한 줄기 물결처럼 이어지고,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거리의 공기가 잠시 멎었다.
타이어가 얼어붙은 도로 위를 스치는 소리가 낮게 깔리고, 그 위로 바람이 휘파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매서운 찬기운이 여름의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뺨을 때렸다.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한 줄기, 두 줄기—허공을 부유하듯 흩날리다 손등에 닿자마자 녹았다.
여름은 녹은 물방울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선이 도로로 향했다가, 다시 눈으로, 다시 자신의 손끝으로 돌아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 하얀 숨결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여름은 문득 자신도 그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사람.’
그녀는 얼마 전 경찰대에 최종 합격한 고3이었다.
성실했고, 묵묵했고, 누구보다 단단했다. 하지만 그 단단함 안에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숨어 있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아든 날, 여름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깊은 안도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공허함이 눈발 사이를 떠도는 바람처럼,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사라진 이후, 이 연신내 육교는 여름에게 마음의 피난처였다.
어릴 적 어머니와 손잡고 장을 보러 오르내리던 곳. 그때의 웃음과 온기는 이제 그녀 혼자만의 기억 속에 남았다.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불빛은 여전히 반짝이는데— 정작 자신은 그 흐름에서 한 발짝 비껴서 있는 듯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의 한자락, 흩날리는 눈 사이로 스쳐 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 자신도 언젠가 그렇게, 눈처럼 스며들 듯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때, 뒤쪽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년 운세 보고 가요—”
여름은 고개를 돌렸다.
육교 입구 쪽, 허름한 두꺼운 코트를 걸친 노파가 작은 좌판을 펴고 앉아 있었다.
손때 묻은 천 위에는 낡은 동전통, 초 한 자루, 오래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여름도 처음엔 마찬가지였다.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점집 노인이라 여겼다.
“신년 운세 보고 가요. 학생도 보고 가요.”
여름은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지나쳤다.
그때였다.
노파의 낮은 목소리가 등 뒤를 파고들었다.
“학생, 엄마가 학생에게 할 말이 있대.”
그 한마디에 여름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노파의 눈빛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노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았다.
“...할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노파는 여름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학생 관상을 보니 귀인상이야.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텐데, 그 길에 내가 조금 도와줄 수 있지.”
“저... 돈 없어요.”
“돈은 필요 없어. 손 줘봐. 손금만 잠깐 보자.”
여름은 잠시 망설이다가 장갑을 벗었다. 하얗고 여린 손이 노파의 거친 손바닥 위에 얹혔다.
노파의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그녀는 손금을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음... 생명의 줄이 깊고, 감정선이 얕구나. 강한데 외로운 운명이야. 큰 사람이 되겠지만, 큰 시련도 함께 따르겠어.”
여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생일은 언제야?”
“2004년 8월 1일이요.”
“태어난 시간은?”
“새벽 4시요.”
노파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수를 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여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올해는 유독 일이 많이 생기는 해구나. 하지만 걱정 말아. 너한테는 우주의 여신이 깃들어 있거든.”
여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주의... 여신이요?”
“그래. 세상에는 가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지. 그 틈새를 지나는 사람—그게 바로 너야.”
그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묘하게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여름은 피식 웃었다.
“할머니, 저한테는 그런 단어가 안 어울려요. 우주의 여신이라니요.”
“그래도 듣기 좋잖니?”
“...네, 듣기는 좋네요.”
여름은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오천 원 지폐를 꺼냈다.
“제가 가진 돈이 이거밖에 없어요. 괜찮죠?”
노파는 다정한 눈빛으로 돈을 받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이 돈을 40배로 불려줄까?”
“예? 어떻게요?”
노파가 손가락으로 육교 위를 지나가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겨울 코트를 입은 남녀 한 쌍, 차분한 걸음으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을 오늘 두 시간만 따라가 봐. 1미터 안쪽 거리로.”
“왜요?”
“그게 네 운세야. 귀인이 네 앞에 나타날 테니까.”
여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파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이상하리만큼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놓치면 안 돼. 얼른 가.”
노파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흩어졌다. 그 말은 눈송이처럼 가볍게 날아와 여름의 귓가에 닿았다.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등을 살짝 밀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녀는 문득 멈춰 섰다. 뒤에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겨울 공기만이 차갑게 흐르고 있었다.
여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육교 위—아까 노파가 앉아 있던 자리. 그곳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대신, 낯선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코트를 여민 채, 멍한 표정으로 손에 든 오천 원 지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마치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당혹감이 어렸다.
“이게 뭐지···?”
그녀의 목소리가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눈송이 하나가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곧이어 또 하나, 또 하나— 하얀 점들이 조용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덮어 갔다.
그리고—
후우우우우우—
갑작스런 바람 한 줄기가 육교를 가로질렀다. 오천 원 지폐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얇은 종이가 바람 속에서 느리게 회전하며 춤을 췄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눈발과 바람과 지폐만이 느리게 떠다녔다.
오천 원 지폐가 공중에서 몇 번을 빙그르르 돌았다.
그때—
그 지폐가 여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발 앞, 눈 위로 지폐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스윽.
여름은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손끝이 지폐를 집어 올리는 순간, 그 감촉은 뜻밖에도 따뜻했다.
“이거... 내가 할머니 준 돈인데···”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여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육교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
아주 희미하게, 귓가에 닿는 목소리.
“놓치면 안 돼··· 그게 네 길이야.”
여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선가 들려온 그 말이, 마치 아직 보지 못한 세상을 향한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여름은 손에 쥔 오천 원 지폐를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노파가 말한 두 사람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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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제2화 그녀의 첫 걸음”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여름을 세상 밖으로 조용히 이끌었다. 알바돌의 첫 걸음이었다.
- 작가의말
재밌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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