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유일한 인간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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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물약과
그림/삽화
궤물약과
작품등록일 :
2025.10.26 16:20
최근연재일 :
2025.11.10 12:5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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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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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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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망망대해의 표류(1)

DUMMY


입 안 가득 피 맛이 맴돌았다.


하도 걸어서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으며, 주변을 살폈다.

벤치 대용으로 쓸 만한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 그 위에 앉았다.


“미치겠네.”


작게 욕을 읊조렸다.

마음 같아선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괜히 이상한 놈들이 몰려올까 봐 꾹 참았다.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먹통인 휴대폰. 깨진 안경.

초콜릿바 두 개와 젤리 한 봉지.

신분증과 카드, 현금 6만 원이 든 지갑.


그리고 언제부턴가 주머니에 들어있던 만년필.


달칵.


만년필의 뚜껑을 열자, 보석으로 만든 것 같은 오색 빛깔의 펜촉이 드러났다.

배럴 부분에 새겨진 나비 문양을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허공에 글자를 적었다.


[종말 이후의 남겨진 자들을 위하여]


촤라락-.


펜촉에서 은색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액체는 이내 응고되어, 책의 형태가 되었다.

나는 만들어진 책을 받아 들고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내가 읽었던 책만 만들 수 있나 보군.’


이것도 처음 공황에 빠졌을 때, 만년필을 들고 난리를 치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다.

바닥에 던져도 보고, 휘둘러도 보고, 카트리지를 분리해 보기도 하고, 뚜껑을 이로 물어보기도 했지···.


‘복습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이게 진짜 최선인가?’


나는 책의 표지를 착잡한 시선으로 훑었다.

제목 밑에 얄미운 글자가 적혀 있었다.


[종말 이후의 남겨진 자들을 위하여]

[설정집]


그렇다. 설정집이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줄 아는가?


나는 이 책의 본편을 읽어본 적 없다는 뜻이다.


‘판매 중단에 중고 매물도 못 찾았고, 도서관에도 비치된 게 없었는데 나 보고 어쩌란 거야···.’


울고 싶어졌다.


-----


화평대학교 도서관.

나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

한 달 전, 계약 기간이 끝나 퇴직했던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방황 중이었다.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불안감이 심해져서 알바를 할 때를 제외하곤 점점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는 게 괴롭다며, 여행을 다녀오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하셨다.


<딱 일주일만 쉬다 오렴. 일하면서 모아둔 돈도 아직 남았잖니. 그래도 혹시 여행 경비가 부족하면, 아빠가 좀 더 챙겨주마.>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께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부산 근교의 한적한 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쉬다 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근심 가지지 말고, 푹 쉬다 오자!’


활기차게 캐리어를 끌고 열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이 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분명 열차에 탄 것까진 알겠는데, 그 이후가 깜깜했다. 누가 해마 위에 검은 먹물을 부어 놓은 것 같았다.


‘기억도 문제지만, 왜 하필 여기야? 살면서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뽑기 운이 이 정도로 안 좋을 수가 있나?’


내가 책 속의 세계에 들어가면 어떨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꽤 재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게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 아냐, 혹시 몰라. 여기에도 괜찮은 구석이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잖아?’


나는 희망을 품기 위해 기본적인 세계관 설정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


서기 2350년.

봄볕 위로 푸른 싹이 움트던 계절.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대재앙이 벌어졌다.


문 너머에서 쏟아진 재액은 순식간에 전 세계를 뒤덮었다.

재액에 휩쓸린 인간의 신체는 서서히 괴사했고, 최후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녹아내렸다.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각국의 정상.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

모두가 공통된 목적을 위해 힘을 합쳤다.


하지만, 열린 문을 다시 닫을 방법도, 재액을 극복할 길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지구상의 마지막 인간마저 오염됐을 때.

그들은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머릿속으로 정리하자, 당당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X됐다.’


진짜 X됐다.

수습도 못 할 정도로 X됐다.

좋은 구석을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설정집의 내용대로라면,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인간은 나 하나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해.’


어차피 이대로면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

나한테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본편을 읽어서 대략적인 전개를 아는 것도 아닌데,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는가.


‘설정집에 단서가 있을 거야.’


나는 서둘러 책을 펼쳐보았다.

맨 앞의 목차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읽으려다가, 위화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 반지?’


왼손 소지에 처음 보는 반지가 껴있었다.

알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고, 표면이 울퉁불퉁한 못난 반지였다.


‘만년필처럼 생존에 도움이 되는 물건인가?’


등장인물 보정, 그런 걸지도 모른다.

신이 자비를 베풀어서 나한테 이름 한 줄 지나가는 조연 자리를 줬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반지를 빼려고 했다.


찌릿.


“윽···!”


그 순간, 심장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반지를 빼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손을 떼자, 바로 통증이 멎었다.


‘뭐야? 설마 페널티야?’


그럼 그렇지. 익숙한 실망감이 몰려왔다.


‘조연은 무슨. 욕심도 과하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어쩌면 오늘 하루도 못 버티고 죽는 거 아닐까.

그리 생각하자, 썩은 동아줄이라도 바라게 되었다.


불쑥.


“··· ?”


하지만 이건


“어, 어어··· 어?”


이런 동아줄은


“··· 그, 그러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안녕···?”


“@%%#@■···!”


손등 위로 불룩 올라온 금색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며 아르렁거렸다.


-----


콰직.


머리 바로 옆에 사슬이 박혔다.

나는 꼴사납게 바닥에 누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 잠깐만! 우리 대화로 풀자!”


“%%#■@!”


콰지직.


있는 힘껏 왼쪽으로 굴렀다.

피하지 않았다면, 두개골이 박살 나서 죽었을 것이다.


“%#.”


처음 보는 생물··· [아이]가 제 몸에서 나온 사슬을 거둬들이고, 나를 서슬 퍼런 눈빛으로 쏘아봤다.


‘왜 아이냐면, 아이처럼 작으니까.’


절대 보통 아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아이의 얼굴 대신 자리한 낡은 투구를 살피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인간은 처음 보지? 놀라는 것도 당연해. 그, 그런데 내가 죽으면 너도 큰일 나거든. 아까 봤잖아. 네가 내 몸에서 나온 거.”


내 팔을 찢고 수십 갈래의 사슬이 튀어나왔던 걸 기억한다.

사슬이 뼈대를 이루고, 찢어진 피부 틈에서 흐른 검은 액체가 살을 만들어, 지금의 아이를 만들었다.


‘이런 전개, 다른 책에서 본 적 있어.’


이른바 기생 관계.

나는 아이가 차고 있는 팔찌를 보았다.

내가 낀 반지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내가 숙주가 된 건가? 하지만, 종말 이후의··· 하, 너무 길다. 대충 「종남위」라고 부르자.’


아무튼 종남위에선 사람에게 기생하는 생물은 나오지 않는다.

인류가 멸종한 세계임을 생각하면, 그게 당연할 것이다.


‘내가 개입하는 바람에 오류가 생긴 건가? 아니면 설마 이게 특수한 능력?’


특별하다면, 특별하겠지.

문제는 아이가 날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거고.


나는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설득을 시도했다.


“혹시 내 말, 못 알아듣겠어?”


“%#&.”


아이는 잔뜩 화가 난 와중에도 고개를 저으며 부정의 뜻을 전했다.


======================


▪ 언어의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들은 서로의 혼을 읽으며 소통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설령 당신이 다른 세계의 언어로 말을 건다 해도, 그들은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편리한 설정이 아이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사람이 보통 쓰는 비언어적 표현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동작으로 대충 파악할 순 있겠어.’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대는 아이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살려면, 내가 필요해. 너를 다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니-···”


휘릭.


“···-까, 아아아악?!”


발목을 휘감은 사슬이 확- 당겨졌다.

뒤로 넘어가기 직전, 깍지 낀 손으로 목덜미와 뒤통수를 감쌌다.


쿵!


바닥에 부딪친 허리가 끔찍하게 아팠다.

눈물을 흘릴 겨를도 없었다.

아이는 바로 사슬을 손에 감고, 나를 제 쪽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이대로면 죽는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보통 이럴 땐, 기생체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있기 마련이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명령.’


등에서 불이 날 것 같은 통증을 무시하며, 온갖 단어를 크게 외쳤다.


“그만! 멈춰! 안 돼! 으악!”


내 발악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뭔 놈의 힘이 장사야···!’


저 정도 괴력이면 나를 반으로 찢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


기어코 나를 제 발밑까지 끌고 온 아이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투구를 붙잡은 목의 혈관들이 꿈틀거렸다.

헐렁한 누더기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사슬과 같은 감색(紺色)이었다.


나를 포박한 아이가 주먹을 높게 치켜들었다.


내 몸이 산산조각 나는 상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제, 제발 돌아와!”


촤악-.

주르륵··· 주륵···.


주먹이 내 복부에 직격하려는 순간, 아이의 몸이 처음 나왔을 때처럼 여러 갈래의 사슬로 쪼개졌다.

손목, 정확히는 손목의 동맥 부분이 찢어지면서 그 틈으로 사슬과 녹은 살점이 들어갔다.


촤르륵···.

꿀렁··· 꿀렁···.

지이익···.


아이의 몸을 이루던 조직이 전부 내 안으로 흡수되자, 찢어진 피부가 다시 꿰매졌다.


“허억··· 헉···.”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 살았다···.’


뭘 하기도 전에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아이가 튀어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강제로 귀환시키면, 다시 나올 때까지 대기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혼자가 아닌 건 좋지만, 동행자가 너무 난폭한걸.’


작다고 얕보면 안 되겠다.

나는 쓰라린 등을 툭툭 두드리며, 난장판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질질 끌린 자국이 바닥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지막에 외친 말이 정답이라 다행이야.’


명령이라기보단 애원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잠시 휴식했다.


‘··· 이제 복습 좀 해볼까.’


진정이 된 나는 설정집의 첫 장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기억이 글자를 읽을수록 선명해졌다.


‘대략적인 건 봤고, 가장 중요한 정보는 어디 있으려나.’


돌아갈 방법. 탈출할 방법.

나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아이를 안전하게 분리할 방법도 찾아야 하는데···.’


나 때문에 이 소동에 휘말린 것이니 최소한의 책임은 지고 싶었다.

정보 탐색을 위해 다시 목차 부분으로 넘어갔다.


“··· 인간?”


“!”


제기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최대한 동요하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이, 인간이다. 인간이야. 인간. 인간.”


까만 덩어리 여러 개를 뭉쳐서 만든 듯한 생물이 수많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명백히 인간으로 인식한 놈을 보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세계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동족은 전부 멸종한 지 오래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이 세계엔 ‘인간’을 원하는 놈들이 많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한마디로···.’


망한 거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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