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유일한 인간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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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물약과
그림/삽화
궤물약과
작품등록일 :
2025.10.26 16:20
최근연재일 :
2025.11.1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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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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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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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망망대해의 표류(3)

DUMMY


<여백아, 알겠니? 넌 앞으로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해.>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계란후라이를 올린 토스트. 버섯과 양상추가 들어간 샐러드. 머그잔에 담긴 오렌지 주스와 커피.

나는 내 몫의 식사를 그릇에 담으며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사람들은 이래서 아이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며 걱정하는 척 비아냥거릴 거야.>


괜찮아요. 난 아빠만 있어도 돼요.


<그럴 때마다 네가 얼마나 상처받을지 생각하면··· 아빠는 가슴이 미어져.>


알겠어요. 절대 트집잡히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이건 다 여백이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빠 마음, 알지?>


네, 알아요. 알아요, 아빠.


<우리 착한 아들.>


부드러운 손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어린 나는 웃으면서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검은 지렁이가 가득했다.


“··· 허억!!”


이런 미친. 제기랄. 빌어먹을.

온갖 욕을 떠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쏴아아아···.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손을 들자, 얼룩진 셔츠 소매가 보였다.

붉은색은 핏자국, 갈색은 흙먼지였다.


‘숲?’


흐릿한 시야를 정돈하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내가 살던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나무를 훑어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야야야···.”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머리, 목덜미, 팔다리, 옆구리. 종합 질병 세트였다.

그중에서도 칼이 박혔던 부위가 가장 아팠다.


‘안 죽어서 다행이다.’


목숨이 몇 개나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무모했다.

반성하며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셔츠를 들어 올렸다.


“!”


초록색 진액이 복부에 가득 발라져 있었다.

다친 옆구리를 손으로 조심스레 매만졌다.

표면이 울퉁불퉁했지만, 어느 정도 아문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이곳까지 데려오고 치료해 줬을 장본인을 나지막이 불렀다.


“아이야?”


대답이 없었다.


“아이야, 어디 있어?”


조용했다.


나는 차오르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초조하게 외쳤다.


“대답해 봐! 괜찮은 거야?”


설마 잘못된 거라면-···


“@#.”


“아야!”


퍽. 경쾌한 타격음이었다.

나는 얼얼한 어깨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었구나!”


아이는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양쪽 겨드랑이에 풀을 잔뜩 끼고, 나를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치료해 준 거야? 고마워.”


솔직히 감동했다.

놈을 처리하고 나면, 내 허리도 두 동강 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다니.


‘숙주가 있어야 기생체도 살 수 있단 걸 이해했나 봐.’


퍽.


‘··· 아닌가?’


내 이마를 강타한 호두 모양의 열매를 보며,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그놈은 어떻게 됐어?”


아이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더 쫓아오진 않은 거지?”


“%#&■.”


“다행이다. 고생 많았어.”


꿈에서 들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 내자, 아이가 질색하며 열매를 마구 던지려고 했다.

나는 바로 사과했다.


쏴아아아···.


향긋한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이가 겨드랑이에 껴 뒀던 풀을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거리가 좀 있긴 했지만, 날 죽이려 들지 않는단 점에서 큰 발전이었다.


“뭘 가져왔는지 좀 봐도 돼?”


내가 슬쩍 고개를 빼고 묻자, 아이가 순순히 풀더미를 내밀었다.

나는 만년필을 꺼내서 ‘부록 2권-식물도감’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설정집이 너무 재밌어서, 옆에 있던 부록들도 전부 빌려다 읽었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읽어서 다행이다.

나는 아이가 가져온 풀을 도감과 비교하며 쓸만한 것을 골랐다.

약초, 독초, 식용 열매···. 종류가 꽤 다양했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아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의 뒤를 따랐다.


“!”


나는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생태계와 맑은 호수를 보고 감탄했다.


‘좋은 재료가 많이 있겠군.’


문제는 어떻게 운반하냐는 것이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만년필을 꺼냈다.

식물도감의 표지에 펜으로 X자를 긋자, 책이 흐물흐물 녹으며 은빛 액체로 되돌아갔다.


펜촉이 잉크를 빨아들이는 걸 확인하고, 이번엔 ‘부록-세계지도’를 적었다.


팔락···.


낡은 지도 한 장이 떨어졌다.

우리의 현재 위치가 체스 말, 그중에서도 나이트로 표시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지도를 문지르자, 내가 있는 지역이 확대되었다.


‘북방 대륙, 달맞이 대삼림.’


이 숲은 자원이 풍부하고, 호숫물도 1급수라 식수로 사용할 수 있다.

달맞이란 명칭도 낭만적으로 보이나, 사실 여기엔 무서운 설정이 숨겨져 있다.


달이 뜨면, 즉 밤이 되면, 나무 안에 잠들어 있던 크리쳐가 깨어나서 식물을 제외한 모든 생물을 잡아먹는다.


그들의 피와 살이 비료가 되어 이처럼 아름다운 숲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밤까지 머물 수는 없다는 거지.’


나는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크리쳐가 모방하는 인간의 특성 중엔 무리 지어 사는 생활 방식도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세계엔 마을과 도시가 존재했다.


‘뭐, 주인공의 편의를 위한 설정이겠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지도를 살피다가, 한 지역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운이 좋네.’


시작부터 이곳에 들를 수 있다니.

나는 지도를 집어넣고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일 좀 해야겠다.”


“%%#■※.”


감히 나한테 궂은일을 시키다니, 죽고 싶은 거냐.

아이의 형형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이번에도 싹싹 빌어서 겨우 넘어갔다.


-----


고요한 물결 장터.

크리쳐가 만든 상점가 중, 그나마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상인들은 욕심이 과하지 않거든.’


낡은 가판대에서 호객 중인 크리쳐들은 모두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액체로 된 몸 안에 둥그런 핵을 품은, 슬라임 같은 모습이었다.


‘물건을 훔치거나 가판대를 부수지만 않으면 온순하다고 했으니···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말자.’


여기 오기 전, 아이를 설득해서 몸속으로 돌려놓았다.

인간인 걸 들키지 않게 다른 연막도 쳐놨다.


‘숲에서 발견한, 크리쳐의 체취와 비슷한 향을 내는 열매.’


일명 ‘구아비스트 열매’였다.

열매를 으깨서 낸 즙을 몸에 바르고, 옷에 적신 덕분에 아무 의심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냄새는 좀 고약하지만.’


나는 콧잔등을 씰룩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오세요. 오, 오세요. 오세요.”


“손님손님손님손님. 손님손님. 손온님.”


슬라임들이 출렁거리며 내게 손짓했다.

그들의 기괴한 목소리를 듣자,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크리쳐들 말은 다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아이 말만 해석이 안 되지?’


내게 기생하면서 생긴 변화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어린 시절 말을 배울 때 읽은 책들을 떠올렸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한국어를 가르쳐 봐야겠어.’


일단 대화가 원활해야 협력을 구할 수 있을 테니.

나는 결론을 내리고 가까운 가판대로 향했다.


“오, 손님. 고르세요. 고르세요.”


유리로 만든 갈랜드가 위에서 달랑거렸다.


“이거랑 이거 주십시오.”


여러 개의 유리병과 절구 세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슬라임이 허공에 손짓하며 계산하는 척을 했다.


“도, 도온. 돈돈. 돈.”


화폐를 쓰는 시장도 있지만, 이곳은 아니다.

고요한 물결 장터는 기본적으로 물물교환이 원칙이다.


“이거면 됩니까?”


재킷에 싸놨던 광물을 우르르 가판대 위에 쏟자, 슬라임이 펄쩍 뛰었다.


“보, 보석. 보석. 보석 좋아. 보석.”


이곳 슬라임들은 반짝이는 물건을 좋아한다.

그래서 보석을 주면, 웬만한 상품은 거의 매입할 수 있다.


‘이거 캐느라 정말 힘들었지.’


중간부터 아이가 언제까지 캐야 하는 거냐며 화를 내더니, 내 머리털을 다 뽑으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하다.


“이거. 이거이거. 이거 다 가져.”


보석을 보고 흥분한 슬라임은 가게에 있는 재고를 전부 털어올 기세였다.


“음, 그러면 혹시 다른 상품은 없습니까? 물건을 보관할 가방이라던가···.”


“가방. 가방. 있어. 가방.”


슬라임이 신이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와당탕탕. 쿠당탕. 우지직.

한차례 소란이 끝나고, 먼지투성이가 된 슬라임이 밖으로 나왔다.


끈적한 손에 들린 건 예스럽고 작은 나무 상자였다.


달칵.


상자를 열자, 투명한 홀로그램이 허공에 떠올랐다.

총 100개의 칸이 있었고, 한 칸당 같은 물건을 50개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시험 삼아 구매한 유리병을 상자에 넣어보자, 첫 번째 칸이 차오르면서 30이란 숫자가 적혔다.


‘유용한데, 휴대성이 떨어지는군. 어떻게 들고 다니지?’


내가 상자를 들고 고민하자, 슬라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바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상자의 잠금 고리 부분을 문지르자, 상자가 구겨지면서 이내 작은 키링으로 변하였다.


“이것도 사겠습니다.”


나는 값을 치르고, 상자에 내가 가져온 보석과 열매, 지금 산 물건을 전부 넣은 뒤, 키링으로 만들어 벨트에 걸었다.


“오세요오세요오세요오세요오세요-···.”


내가 가진 보석의 양을 파악한 슬라임들은 전보다 더 전투적으로 홍보 중이었다.

이곳이 물결 장터가 아니었다면, 대놓고 보석을 보여주진 않았을 것이다.


‘욕심 많은 놈들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강도질하려 하거든.’


매물도 괜찮고, 상인들도 매너 있고, 나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거래처다.

나는 가게를 돌아다니며 침낭과 필요한 물자를 산 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삐그덕-. 삐그덕-.


도끼와 방패가 그려진 낡은 간판이 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구멍 난 곳을 판자로 대충 틀어막은 모양새가 을씨년스러웠다.


이 세계엔 스스로 무기를 만들지 못하는 크리쳐들을 위해 무기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존재한다.


‘간판에 적힌 글자는 못 읽겠지만, 외관을 보면 여기가 물결 장터의 무기점이겠지.’


시작부터 크리쳐에게 습격당해 죽을 뻔했다.

아무리 아이가 도와준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내몸을 지킬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끼익-.


“오세요. 어서 오세요.”


다른 슬라임과 달리 팔 부분이 단단한 강철로 이루어진 가게 주인이 나를 반겼다.

진열대에 여러 무기가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 게 좋을까.’


장검을 들고 휘두르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바보처럼 흐느적거리다가 검을 빼앗겨서 역으로 당하는 미래만 떠올랐다.


‘그나마 익숙한 무기는···.’


진열된 칼을 지나쳐 가게 안쪽으로 걸어갔다.


달그락-.


작은 물건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 말고 손님이 또 있던 모양이다.

진열대 건너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


눈이 마주치면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젠장··· 인간형 크리쳐라고?’


이런 한적한 데엔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남자의 외양을 곁눈질로 살폈다.


‘수상한 구석이 하나도 없네. 완전 인간 같아.’


저렇게 완벽한 의태라니.

분명 위험한 놈이다. 엮여선 안 된다.

마른침을 삼키고, 남자에게 관심 없는 척, 무기를 고르는 시늉을 했다.


저벅-.


“안녕하십니까.”


미친. 너무 놀라서 소리 지를 뻔.

내 앞으로 순간 이동한 남자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여서 답했다.


“······.”


그 후로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흐릿한 회색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날 관찰할 뿐이었다.


‘제발 좀 꺼져.’


당장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순간, 남자의 가슴께에 걸려 있는 브로치가 반짝 빛났다.


그걸 본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거 그냥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


대형 지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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