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의 표류(4)
약육강식. 적자생존.
살생과 약탈이 당연하다 못해 일상인 세상.
이런 세계관에는 무릇 악명을 떨치며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거대 세력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남자도 그중 하나고.’
불꽃을 휘감은 검 모양 브로치.
[업화심판관]의 표식이었다.
멋들어진 단체명에 걸맞게, 이들이 좇는 가치는 정의였다.
그들에게 있어 대의를 위한 규율은 만고의 진리이자 충성의 대상이다.
그리고 업화심판관의 모든 문제는 그 규율에서 비롯된다.
‘크리쳐가 추구하는 정의가 제대로일 리 없잖아.’
안하무인 집단.
이들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일 것이다.
“··· 정교하군요.”
한동안 침묵하던 남자가 툭 말을 뱉었다.
긴장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게 ‘예?’하고 반문했다가 의심받았을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날 선 대답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붉은 머리칼이 콧대를 타고 흘러내렸다.
“혹시 이름이 있습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사실 이름을 가진 크리쳐가 드문 건 아니었다.
본인이 대충 ‘초코’ 수준으로 짓는 경우도 있다고, 책에 적혀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갖출 정도라면, 이름이 없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명을 대기로 했다.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휴양입니다.”
왜 하필 휴양이냐고?
지금 나한테 무엇보다 필요한 거니까.
‘이런 일에 휘말리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에어컨 바람 쐬면서 책이나 읽고 있었을 텐데.’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저는 B입니다.”
본인을 B라고 소개한 남자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보고 있는 상품은 글자가 각인된 작은 수정이었다.
‘속을 알 수가 없군.’
방심은 금물이다.
지능이 높은 놈들은 연기에도 능하니.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다른 구역으로 향했다.
‘찾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활대.
섬세하고 탄탄한 시위.
각양각색의 문양이 그려진 화살통.
학창 시절, 양궁부에서 활동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집중력 기를 겸 시작했던 거지만, 나름 재밌었지.’
사고를 당한 후론 아예 놓아버렸지만 말이다.
오른쪽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를 문지르며 눈을 깜박였다.
‘한쪽 눈이 거의 안 보여서 원근감이 엉망인 게 문제야.’
지렁이 크리쳐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 것도 오른눈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일상생활은 무리 없이 할 수 있지만, 운전 같은 섬세한 작업을 하는 데엔 아직도 애로 사항이 있었다.
‘그나마 몸에 익은 무기지만··· 예전 같은 기량이 나올까? 하물며 이젠 움직이는 적을 쏴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나무 활을 골랐다.
불안해도 지금 쓸만한 무기는 이것뿐이었다.
원하는 화살을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신기한 화살통도 목록에 추가했다.
‘혹시 모르니 이것도.’
다용도 나이프까지 챙긴 후, 슬라임에게 갔다.
“오, 보석! 보석! 보석!”
상자에서 보석을 꺼내자, 슬라임은 펄쩍펄쩍 뛰다가 하늘까지 날아갈 기세였다.
계산하려던 나는 문뜩, B가 보고 있던 수정이 신경 쓰여 주인에게 물었다.
“저 수정은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휴대용 마도구. 다양한 주문 각인. 이건 화르륵.”
슬라임이 불꽃을 품은 수정 하나를 가져왔다.
수정을 똑- 잘라서 서로 마찰시키자, 금세 불씨가 타올랐다.
‘생존에 있어서 불은 필수지.’
“그것도 같이 주십시오.”
“고객님! 감사!”
거래를 마치고 나니, 남은 보석은 부스러기뿐이었다.
나는 무기를 상자 안에 넣은 뒤,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지금은 B가 내게 관심 없어 보여도,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를 일이다.
‘그냥 물건을 사려고 여기 온 거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규율과 관련이 있다면.
경우의 수를 상상하다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꼬르륵-.
아, 이런.
나는 잠시 멈춰서서 배를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식사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 안 나.’
계속 긴장 상태로 있었더니, 배고픈 줄도 몰랐다.
한계에 다다른 위장이 당장 먹을 걸 내놓으라며 아우성쳤다.
불쑥-.
“@%#&₩!”
그리고 한계에 다다른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미, 미안해. 이것저것 살 게 많아서···.”
열심히 사과했지만, 응징을 피할 수는 없었다.
팔에서 나온 사슬이 내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아야! 미안하대도!”
“■■※#@.”
이 살벌한 목소리···. 분명 욕하고 있는 거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피를 문지르며 쩝 입맛을 다셨다.
“장터 안에 여관이 하나 있어. 거기 가서 풀어줄게.”
그렇게 도착한 여관은 무기점보다 더 낡아서 걸을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리 낡아도 밖에서 야영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최소한 자다가 습격당할 일은 없으니까.’
나는 남은 보석을 전부 털어 사흘 동안 머물 방을 잡았다.
와르르···.
먼지가 장난 아니다.
문을 열자마자 정수리로 흰 가루가 떨어졌다.
배를 채우기 전에 샤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으, 추워.”
미지근한 물로 대충 샤워를 마치고, 나무 대야에 물을 받았다.
거기에 구아비스트 즙을 풀어 더러워진 옷을 넣어두었다.
나는 상처 부위를 손으로 더듬다가, 담요를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다.
‘상처는 거의 아물었고··· 며칠 쉬면 체력도 다 돌아올 것 같아.’
사흘 동안 여관에 머물면서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준비를 할 예정이다.
도구가 갖춰졌으니, 전보다 쉽게 열매를 가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설정집 복습하면서 탈출할 방법도 찾아야지.’
꼬르륵-.
‘··· 그전에 밥 좀 먹고.’
헛기침하며 팔을 톡톡 두드렸다.
여느 때처럼 피부를 찢고 나온 아이가 바닥에 쿵-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답답했지? 잘 참았어. 착하다.”
“%#■※.”
아이가 이를 빠드득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자, 이거. 답례라기엔 뭐하지만··· 아까 가게에서 산 거야. 어때, 귀엽지?”
상자에서 인형을 꺼내 아이에게 쥐여주었다.
머리는 코끼리인데 몸은 독수리인 인형이었다.
‘애 취급하지 말라고 화내려나.’
다행히 아이는 인형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바닥에 쾅쾅 내리치고, 날개를 쭉 잡아당기다가, 품에 안고 빙빙 돌았다.
내가 혹여라도 가져갈까 봐 경계하며 으르렁 소리를 낼 정도였다.
‘식사 준비하는 동안은 얌전히 있겠어.’
상자를 열고, 식용 열매를 꺼냈다.
물컹한 자주색 사과와 말라붙은 초록색 망고.
각각의 명칭은 르상트 열매와 미룬 열매였다.
나는 열매의 껍질을 벗긴 뒤, 무기점에서 샀던 나이프로 과육을 잘랐다.
“자, 아.”
“@%.”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에게 과일을 주려고 했다.
그 순간···
촤악-.
‘으악!’
투구가 활짝 열리면서 두족류의 다리를 닮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그대로 내 손에서 과일을 낚아채서 우물우물 씹는데, 놀라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입이 독특하게 생겼네···.”
역시 아무리 작아도 크리쳐는 크리쳐다.
손가락이 안 잘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남은 과일을 손질했다.
‘초코바랑 젤리는 최대한 아껴두자.’
식량 확보는 중요하다.
열심히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는데, 아사하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이젠 보관 상자도 있으니, 숲에 수시로 들려서 열매와 식수를 최대한 많이 챙겨두는 게 좋겠다.
식사를 마친 나는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사각사각.
펑-.
[처음부터 배우는 가나다라]
어린 시절, 내 국어 선생님을 해줬던 책을 아이에게 건네며 최대한 상냥하게 웃었다.
“있지, 우리 공부 좀 해볼까? 한국어라고 하는 건데···.”
“%#&₩.”
손으로 좍좍 찢으려고 해서 황급히 회수했다.
“한 번 읽어봐. 재밌을지도 모르잖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던 아이가 한숨을 쉬며 책을 받았다.
한 장씩 펼치는 아이에게 조심스레 접근했다.
“자, 이건 ㄱ이야. 기역이라고 발음해.”
“#.”
기괴한 잡음이 낀 목소리.
나름 따라 하려고 노력한 것 같았다.
이후에도 단어를 짚어줄 때마다 조금씩 다른 발음이 나왔다.
‘언젠가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이 무서운 세계에 나 홀로 떨어졌다는 공포와 고독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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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하루 종일 숲에서 노동하고, 방에 틀어박혀 물약 제작에 열을 올렸더니 몸 이곳저곳이 쑤셨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한동안 든든하겠어.’
나는 뿌듯하게 유리병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맑은 연두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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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누아초: 고사리를 닮은 약초. 햇빛을 받으면, 잎이 노란색으로 변한다. 체력 회복 및 염증 억제 효과가 있다.
▪ 스카이힐 플라워: 푸른 꽃잎이 물방울 모양의 열매를 감싸안은 형태의 꽃. 꽃잎은 먹을 수 없으며, 열매는 지혈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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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를 섞어서 물에 개자, 소위 말하는 회복 물약이 만들어졌다.
시험 삼아 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물약을 마셔봤는데, 1분도 되지 않아서 나았다.
‘중상에도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게 어디야.’
지렁이 남자에게 피 냄새를 풍기다가 덜미를 잡혔던 걸 생각하면, 작은 상처도 간과할 수 없다.
나는 그간 만든 회복 물약 30개를 상자에 쑤셔 넣고, 여관 밖을 나섰다.
‘해가 지려면 멀었으니까, 잠깐 숲에 다녀오자.’
구아비스트 열매와 식수를 좀 더 가져올 생각이었다.
장터에서 멀어지자, 손등 위로 금색 눈동자가 나왔다.
“%#@.”
“그래, 숲에 도착하면 꺼내줄게.”
요즈음엔 목숨을 위협당하는 일이 없었다.
채집활동이 좀 고되긴 해도, 미친 괴물들에게 쫓기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이대로 평화가 계속됐으면.’
저벅-···.
바스락.
아, 젠장. 불길한 발소리가 정적을 깼다.
내 바람과 달리, 곧 평화가 깨지리란 징조 같았다.
‘B?’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놈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숲을 살피고 있었다.
걸어가다가 이따금 멈춰서 바닥을 손으로 훑고, 주운 나뭇잎을 관찰했다.
‘탐색하는 것 같은데···.’
단순히 무기를 사려고 왔던 게 아닌 모양이다.
규율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맞은 걸까.
‘엮이면 좆되-···.’
휙-.
“!!”
B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황급히 몸을 숙여 피했다.
놈의 눈동자에 위협적인 이채가 번뜩이다가, 이내 탁한 회색빛으로 침전했다.
“······.”
다행히 안 들켰다.
주변을 빙 둘러보던 B는 이내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멀리 있어서 냄새를 못 맡았나 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일단 돌아가고, 한 시간 후에 다시 오자.’
저런 놈이랑은 최대한 안 마주치는 게 좋다.
내일 중으로 짐을 챙겨서 장터를 떠나야겠다.
물컹-.
“··· ?”
그대로 돌아가려다가, 위화감이 느껴져서 멈칫했다.
딱딱했던 대지가 갑자기 비가 온 것처럼 물렁거렸다.
밑을 내려다보자, 검게 변한 흙이 내 종아리를 꽉 붙잡고 빨아들이고 있었다.
“!!”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늪에 빠진 것처럼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숲 일대가 거대한 블랙홀이 된 느낌이었다.
촤악-.
팔에서 나온 사슬이 인근 나무를 붙잡았다.
나는 양손으로 사슬을 쥔 채,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우지직-.
그러나 나무가 부러지는 게 먼저였다.
가슴 아래까지 차오른 흙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침착해. 알고 있잖아.’
이런 짓을 벌이는 주체.
이런 일이 벌어진 원인.
단어 하나가 번쩍-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압그룬트」
꼬르륵-···.
이윽고 몸이 완전히 잠겼다.
콧구멍. 눈구멍. 귓구멍.
텁텁하고 거친 흙이 온 구멍이란 구멍에 다 들이차는 감각은 정말 끔찍했다.
“커흑, 끅···.”
이대로 질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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