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유일한 인간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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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물약과
그림/삽화
궤물약과
작품등록일 :
2025.10.26 16:20
최근연재일 :
2025.11.1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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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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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3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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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혹한의 낙원(1)

DUMMY


눈을 뜨자마자 미친 듯이 기침했다.


“콜록, 콜록! 컥, 끄으윽··· 헉···.”


반사적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내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목을 덥석 붙잡았다.

손톱을 세워 피부를 마구 긁자, 따끔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하아, 하···. 후우···.”


산채로 파묻힌 충격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살아있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야, 안정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하, 더럽게 아프네.”


아직도 숨을 쉴 때마다 흙이 후드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뒷수습이 먼저였다.

나는 상자에서 회복 물약과 구아비스트 즙을 꺼냈다.


물약을 마시자, 목에 난 상처가 깔끔하게 나았다.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 구아비스트 즙을 목과 양손에 꼼꼼히 바르고, 잠시 심호흡했다.


“아이야, 괜찮아?”


불쑥-.


손등 위의 눈동자가 두어 번 깜박거렸다.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헝클어진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리고, 땀에 젖은 이마를 문질렀다.

B만 경계하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복병이 있었다.


‘규율 제2항. 특정 크리쳐를 압그룬트의 종자로 판단할 경우, 신속하게 형을 집행한다.’


업화심판관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항목이다.

압그룬트 위험 분자를 사전에 제거한다는 취지지만, 그러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모든 크리쳐는 압그룬트의 종자인걸.’


크리쳐에겐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삼독의 양이 정해져 있다.

수용량을 넘길 경우, 크리쳐의 육체는 붕괴하고 혼은 기괴하게 뒤틀리는데, 그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에너지 반응이 발생한다.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압그룬트다.


‘그러니까 심판관 놈들은 그냥 의심스럽다 싶으면 죽이고 보는 거라고.’


사실 그들이 압그룬트를 경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녀석들은 말 그대로 재해니까.


‘이렇게 갑자기 휘말릴 줄은 몰랐는데···.’


내가 만약 소설 본편을 읽었더라면, 습격당하는 타이밍을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선 미리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건 알 수 있지.’


사각사각.

펑-.


[부록 5권-압그룬트 도감]


이걸로 찾아보면, 적어도 어떤 놈한테 걸린 건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으론 꽤 자세하게 적혀 있었는데···.’


팔락.

종이를 넘기자, 각 압그룬트에 대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됐다! 이걸 참고해서···.’


쿵-.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주변 풍경을 주워 담았다.


추리소설에서나 볼 법한 낡은 산장이었다.

창문 너머로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회색 보자기 위에 바늘 더미를 쏟아붓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쿵-!


창 위로 빨간 손바닥이 찍혔다.


‘으아악.’


쿵-. 쿵-. 쿵-. 쿵-.


하나 둘 셋···.

계속해서 개수가 늘어났다.

창을 두드리는 손바닥이 많아질수록 창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도와주세요도와주세요도와주세요도와주세요.”


끼이익-. 끽-.

간절한 도움 요청과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기괴한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나는 끔찍한 불협화음을 무시하며, 팔을 톡톡 두드렸다.


촤아악-.


팔을 찢고 나온 아이가 바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내 앞을 막아서는 모습이 굉장히 늠름해서, 두려움이 조금 사라졌다.


쿵-! 쿠웅-!

끼기긱-. 끼기기기긱-.


붉은 손들이 창을 두드리는 강도가 점점 세졌다.

이러다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다.

나는 서둘러 책을 펴고, 해당하는 압그룬트를 찾기 시작했다.


‘산장, 산장··· 찾았다!’


======================


얼어붙은 보금자리

-길잃은 나그네는 요람의 꿈을 꾼다.


「방황」의 압그룬트.

■■■는 평생 저를 받아줄 곳을 찾았지만, 나약한 자에게 허락된 낙원은 없었다.

절망한 그는 바랐던 낙원을 직접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선, 인정받는 자의 자격을 이해해야 한다.


▪ 당신은 설산 속 고립된 산장에서 눈을 떴습니다.

이곳은 ■■■가 처음으로 빼앗긴 둥지입니다.


======================


중간에 나온 위로라는 표현이 뜬금없게 느껴져도, 다 이유가 있었다.


‘미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 미궁의 주인을 죽이거나, 한풀이를 해주거나.’


몇몇 압그룬트에겐 본인의 심상을 반영하여 만든 내면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이 미궁이다.

그들은 미궁으로 크리쳐를 끌어들이고 사냥함으로써 저주와 같은 파괴욕을 달랜다.


인간성을 갈망하는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멸종한 인류의 혼이 섞였기 때문인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통 미궁은 인간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엄청 기괴해진다는 거.’


귀신이 튀어나오는 학교라던가.

내장 조각이 떠다니는 커피를 주는 카페라던가.

흡사 괴담에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비주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말이 좋아 심상이지, 미궁은 결국 크리쳐가 압그룬트가 된 원인을 반영하는 거니까.’


그러므로 설정집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분석해 보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얼어붙은 보금자리’가 바라는 건 저를 받아들여 주는 집이다.


‘놈에게 원하는 걸 주면, 한을 풀어주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보통 크리쳐는 쓸 수 없는 방법이다.

동족끼리도 만날 싸우는 녀석들이 압그룬트를 이해하고 달래준다?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나한텐 이 방법이 죽이는 것보단 쉽겠지.’


괜히 아이한테 죽여야 한다고 강요하다가, 삼독에 매몰되게 하는 것도 싫으니 말이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주변을 살폈다.


사용감이 전혀 없는 벽난로가 오른쪽 벽에 붙어있었다.


쿵-! 쿵-!


‘일단 저 손바닥들을 처리해야 해.’


“추워추워추워. 춥습니다. 춥습니다. 아. 아아.”

“들어가게해주세요녹여주세요들어가게해주세요-.”


원하는 바가 참으로 명확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사슬을 꺼내 다 쓸어버릴 기세인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내가 불 피우는 사이에 저것들 들어오면, 잠깐만 막아 줘! 부탁할게!”


어디서 명령이냐는 비난의 눈빛이 날아왔지만, 사과는 나중에 하기로 했다.

빠르게 벽난로까지 뛰어간 나는 상자를 열어 필요한 재료를 꺼냈다.


‘나이프. 우탄타 열매. 그리고··· 발화 수정!’


쓸모가 있을 법한 재료를 강박적으로 모아두길 잘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우탄타 열매의 껍질을 벗기고 나이프로 길게 잘랐다.


‘가연성이 높아서 장작 대용으로 쓰기 좋다고 했어.’


자른 과육 절반은 벽난로 안에 넣고, 절반은 손으로 짜서 기름을 냈다.


쌓은 과육 위에 기름을 뿌리는 순간, 유리창이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아아아아! 추워추워추워···.”

“아아아아아으아아아가아아아아-···.”


창을 뚫고 들어온 붉은 팔 3개가 산장 내부를 헤집으며 비명을 질렀다.


촤악-.


아이가 재빨리 사슬을 꺼내 놈들이 내게 닿지 않도록 막았다.

나는 아이가 다치기 전에 서둘러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뚝-.


수정이 깔끔하게 반으로 잘렸다.


‘이제 불을 붙이기만 하면···!’


···

······

불꽃이 나오지 않았다.


‘뭐야, 불량품인가?!’


이런 경우가 어딨습니까, 점장님!

나는 속으로 절규하며 반으로 자른 수정을 미친 듯이 서로 마찰시켰다.


따깍-. 따깍-.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쨍그랑! 쿵-···! 우지끈···!

“추워추워흐으으추워아아춥다···.”


“@%%#@@!”


잔뜩 짜증 난 아이가 붙잡은 팔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대로 칭칭 묶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하고,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나머지 팔들을 상대했다.


‘젠장, 이건 버려!’


나는 불량품을 구석에 던져버리고, 꺼내뒀던 여분의 수정을 손에 쥔 채 반으로 쪼갰다.


와장창-···!


너머의 손들이 유리창을 전부 부수고, 산장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순간.


따닥-! 탁!

화르륵-···!


그제야 수정의 단면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됐다!!’


나는 불이 열매 위에 옮겨붙는 걸 확인하고, 아이에게 외쳤다.


“숙여!”


아이가 사슬을 거두자, 그에게 붙잡혀있던 팔들이 자유를 되찾았다.

환한 벽난로를 본 손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팔을 활짝 벌려 아이를 안고 데구루루 굴렀다.


퍽.


벽에 부딪힌 정수리가 쓰라렸다.

아이는 내가 꼭 안고 있어서 다친 곳이 없었다.

갑자기 안긴 것이 불쾌했는지, 고사리손으로 내 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기긴 했지만.


타다닥···.

타닥···.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던 산장이 어느새 처음의 멀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벽난로에서 나온 온기가 산장 안을 가득 채웠다.

포근한 아지랑이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었던 붉은 손들은 불길 앞에서 순한 양이 되었다.

놈들은 벽난로가 주는 안락함에 취해, 가만히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내가 방해하지 않자, 불을 쬐던 손들이 거미줄처럼 쪼개지기 시작했다.


“따 뜻 해”


모든 손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벽난로와 동화되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 기묘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뒤집혔다.


쿵-!


우리는 순식간에 밖으로 내쫓겼다.


휘오오오-···.


“에, 에취!”


휘날린 눈이 콧속으로 들어가자, 저절로 재채기가 나왔다.

나는 종아리까지 쌓인 눈을 망연자실하게 보았다.


‘놈들에게 집을 내어줬으니, 쫓겨나는 게 당연하지. 이런 흐름으로 가야 하는 것도 맞고.’


문제는 너무 추웠다.

그래, 너무 추웠단 말이다!

나는 지금 다 해진 셔츠와 얇은 재킷, 가을용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런 차림으로 설산의 혹독함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에취! 으에취!”


꼴사납게 콧물을 흘리자, 아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더기를 입고 있는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와 달리 전혀 추운 기색이 없었다.


‘한 명이라도 안 추우면 됐지, 뭐.’


나는 재킷의 지퍼를 올리고, 상자에서 발화 수정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수정이 손난로 역할을 해줘서 조금 나았다.


“에에취!”


이러다 동사하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겠다.

나는 ‘얼어붙은 보금자리’의 공략 계획을 되뇌며 아이에게 가자고 손짓했다.


“%%#■.”


··· 음, 이대로 가는 건 무리겠군.

나는 눈에 파묻히려고 하는 아이를 서둘러 구조했다.


“%%%₩&!”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잠깐만 참자, 응?”


아이에게 발화 수정을 건네주고, 한 손으로 엉덩이를, 나머지 손으로 허리를 받쳐 안아주었다.

이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바둥거리던 아이는 곧 크게 한숨을 쉬며 체념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번만 참겠다는 뜻이었다.


‘애가 참··· 크리쳐치곤 착하단 말이야.’


일단 설득이 통한다는 점에서, 크리쳐 상위 1%라고 감히 잠당한다.


‘이렇게 도와주는데 나도 힘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료집에 나온 단서를 토대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치는 험준한 산을 넘는 일은 굉장히 고됐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걸어서 적어도 이틀은 걸렸겠지만···.’


중요한 건 이곳이 미궁이란 것이다.

평범한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신비한 공간.

그 증거로, 체감상 15분 걸었을 뿐인데 우리는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끼익-···. 끼익-···.


굉장히 들어가기 싫게 생겼단 점이 문제였지만.


‘진짜 살아남기 힘들다.’


모든 것이 도화지처럼 새하얀 설산 속에서 유일하게 푸른 빛을 잃지 않은 숲. 그곳에 있는 저택.

‘얼어붙은 보금자리’의 주무대가 피 칠갑을 한 대문을 앞뒤로 흔들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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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혹한의 낙원(2) 25.10.31 2 1 12쪽
» 혹한의 낙원(1) 25.10.30 11 1 12쪽
4 망망대해의 표류(4) 25.10.29 8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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