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기재(奇才) 중의 기재라 불릴 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고, 수려한 외모로 수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별호가 말해주듯, 그는 언제나 정의롭고 올곧은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날, 알 수 없는 누명에 휘말려 ‘패륜검(悖倫劍)’이라 불리게 된다.
무당의 정기를 잇던 검은 순식간에 마도(魔道)의 검이 되어버렸다.
믿었던 사문의 배신. 지키려 했던 자신의 정의. 그립던 가족.
양진은 억울함 속에서 무너졌고, 끝내 마공을 익히기 시작하며 점차 감정을 잃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와 유희만이 그의 전부가 되었고, 결국 세상은 그를 ‘마신(魔神)’이라 불렀다.
그는 복수라는 이름 아래 셀 수 없는 목숨을 베었다.
하지만 그에게 복수심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그 ‘재미’가 무엇인지조차, 이제는 그 자신도 모른다.
자신을 잃어버린 그의 악행은 세상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고, 그를 막고자 수많은 고수가 모였다.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은 연합이었으나, 모두 그의 검 아래 쓰러졌다.
마지막까지 싸운 자들은 분명 강했으나, 결국 양진이 승리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컸다. 그의 몸 또한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이제 나도 끝이군. 파천마제처럼 몸이 썩어 가겠지.’
그렇게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던 순간, 세상이 갑자기 하얗게 번졌다.
어느 순간, 새하얀 공간 속에 그가 서 있었다.
시간도, 방향도, 무게감조차 없는 곳.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없었다.
‘여긴··· 어디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싸움, 수많은 피, 그리고 공허. 그 후의 기억은 없다.
그때—
“문고리를 앞에 두고 열지 못하니, 직접 열어 데려오는 수밖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백발의 수염을 늘어뜨린 한 노인이 허공에 앉아 있었다. 공중에 앉은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누구지?” “그저 문지기라 부르면 되네.” “문지기? 무슨 문지기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노인은 미소를 띠었다.
“문고리를 앞에 두고도 열지 못해, 문 앞에서 서성이길래··· 내가 직접 열어준 것일세.”
이상했다. 노인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氣)의 흐름이 전혀 없었다. 살아 있는 자의 느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죽었다고 보기에도 모호했다.
또한 전신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오색빛 일렁임은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양진은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양진, 마기에 물들었으나 그 기운은 이미 등선을 이룰 만큼 충만했네. 그러니 더 이상 지계(地界)에 머물게 둘 수 없었지.”
“등선? 지계? 무슨 말인가?”
노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늘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벽 너머가 보일 거라고.”
“······.”
“그 벽 너머가 곧 우화등선(羽化登仙) 일세.”
양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자다. 그런 내가 등선을 한다고?”
“정의는 누가 정하는 것이며, 악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그건······.”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옳다고 배웠고, 틀리다고 배웠을 뿐이었다.
“삶과 죽음도 결국 세상만사의 일부. 도적이 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이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흐름. 다만 그 도적은 다음 생에 그 업보를 짊어질 뿐이지.”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천계에도 자네 같은 자들이 많네. 정(正), 마(魔), 사(邪)··· 각자의 길로 등선한 자들이지.”
양진은 비웃듯 웃었다.
“하하! 신선들이라면서 싸운단 말인가?” “신선이라··· 그 또한 인간이 만든 말이지. 그들 또한 의지를 지닌 존재일세.”
양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란 말인가.”
“그럴세.”
“나를 데려왔다고 했지? 내가 천계에 가면 무슨 짓을 할지 알고?”
“그 또한 자네의 의지. 나는 그저 문지기일 뿐이네.”
양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걸세. 나는 그곳마저 내 손에 쥘 테니까.”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껄껄··· ‘그자’와는 다른 말을 하는구나. 그리고 아직 자네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있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양진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가 누구였는지, 다시 떠올려 보게.”
노인의 손끝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끄악!”
머릿속이 폭발하듯 갈라졌다. 그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피, 원한, 증오, 슬픔, 그리고··· 죄책감. 그가 죽인 자들, 그를 위해 죽은 자들. 그 모든 얼굴이 눈앞을 스친다.
“크흐흐흐흑······.”
양진은 무너졌다. 소리 내어, 아이처럼 울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울음이 멎자 노인이 말했다.
“지금 자네는 마신이 아니라, 양진일세.”
“······나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오.”
“원하는 건 없다. 그저, 자네가 등선을 이룰 수 있기에 데리러 왔을 뿐이지.”
양진은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얼굴은 자애 보였지만 눈빛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내가 가지 않겠다 하면?”
“그 또한 자네의 의지.”
“······.”
양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말했다.
“나를··· 되돌려주시오.”
“되돌려 달라니?”
“언제라도 좋소. 어느 때라도. 나를 과거로 돌려주시오!”
노인은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나는 문지기라 하지 않았나.”
“그대는 할 수 있을 것이오. 분명히.”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미련인가? 후회인가?”
“둘 다요. 그리고··· 바꾸고 싶소.”
노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윽고 말했다.
“그대는 마기로 기준을 채웠으나, 마음의 일부는 아직 남아 있었네. 그러니 한 번의 기회를 주겠네.”
“기회···?”
“한 번 올랐던 곳은, 언제든 다시 오를 수 있지.”
“이번엔 마기로 오르지 않겠소.”
“그 또한 자네의 의지일세.”
노인은 합장을 했다.
“그럼, 나중에 보세.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그대가 어찌 살았는지 내게 말해주게.”
그 말이 끝나자, 세상이 다시 흩어졌다. 양진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에 보이는 노인의 눈빛만이 기억에 남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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