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사고
"어휴, 드디어 끝났네."
마지막으로 열 번째 테이블에 누워 있는 카데바(Cadaver, 해부용 시신)의 좌측 소복재정맥(Lesser saphenous vein)에 묶여 있는 '50번'이라는 표식을 확인한 나는 고심 끝에 답을 적어서 조교에게 시험지를 제출했다.
한 학기 동안 해부 실습을 함께 해서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그는 후련한 표정을 짓는 나를 바라보고 씨익 웃으며 물었다.
"Are you sure?"
"......네?"
"정말 끝난 걸 확신 하냐는 뜻이야."
"에이, 형님.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설마 재시가 뜨겠어요?"
내가 속해 있는 한국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1학년은 모두 120명.
그 가운데 해부학 중간고사 범위 상지(Upper limb)와 기말고사 범위인 하지(Lower limb), 각각 하위 10%에 속하는 사람은 방학을 맞이하지 못하고 재시험을 치러야 했다.
한국대학교 의과대학은 독보적인 국내 최고 학부, 이곳에 속한 학생들은 모두 한때 전국 상위 0.1% 안에 들었던 인재지만 당연히 이들 가운데도 하위권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안타깝게도 거기 속하는 사람 중 한 명.
나처럼 본과 1학년의 폭력적인 공부량에 힘겨워하고 있는 절친 박성우가 ‘땡시’라고 불리는 해부학 실습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로 돌아온 나를 떨떠름한 얼굴로 맞이했다.
“어이, 윤서현. 어때, 아는 게 좀 많이 나왔어?”
“알잖아, 내가 실습에는 나름 강한 거. 그런데 너는 표정이 왜 그렇게 굳었어?”
“재시 명단이 곧 나온대.”
“벌써?”
“오늘부터 방학이니까. 고향에 갈 사람은 얼른 가야지.”
“좋겠다,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재시가 뜨면 결국 방학이 일주일 줄어 드는 거잖아?”
“......아니면 반년 더 쉬고 1학년 1학기를 다시 할 수도 있고.”
“야야, 불길한 소리는 집어치워. 백인성 교수님도 인간인데 설마 F를 주겠냐.”
“설마라니, 작년에 두 명 받았잖아. 방심하면 큰일 나.”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우리는 드디어 명단이 나왔다는 소식에 과 사무실 앞 게시판으로 달려갔다.
다음 주 금요일 오전 9시로 예정된 시험의 대상자는 상지 12명, 그리고 하지 12명.
하지만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이 넷 있었기에 게시판에 붙어 있는 종이에는 스무 명의 이름만이 씌어 있었다.
[...]
[박성우: 상지]
[...]
[윤서현: 상지, 하지]
“......이런 망할, 쌍시잖아?”
“힘내라, 친구야.”
“뭐야, 너도 재시 떴으면서 누굴 위로해?”
“그래도 나는 상지 하나뿐이잖아. 너 따위와는 수준이 완전히 다르다고.”
“......좋겠네, 아주.”
자신의 이름이 재시 명단에 속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본과에서 맞는 첫 번째 방학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강의실 뒤편에 모여든, 우리를 비롯한 패잔병들의 분위기는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
“아, 진짜 큰일 났네. 이거 어떻게 하지?”
“왜 그래? 재엽이 너도 쌍시야?”
“아니, 나는 상지만. 그나저나 설마 이러다가 F 받는 건 아니겠지?”
작은 키에 여드름 자국이 진한 모범생 박재엽은 이런 상황을 맞이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몹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본과 1학년 1학기인 김영도 선배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그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일주일 동안 죽어라 열심히 하면 최대 C+까지는 받을 수 있으니까.”
“......형님도 재시 뜨셨어요?”
“어, 나는 쌍시.”
“아......”
“괜찮아, 재시로 다시 기회를 주는 해부학은 전략적으로 버렸었으니까. 나는 여기서 D0만 받아도 올라가거든.”
매 학기가 끝나고 결정되는 유급의 기준은 ‘학점이 2.0 미만이거나 한 과목이라도 F를 받는 것’이었다.
조직학, 생리학 등 다른 과목들의 성적도 하위권이었던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이, 윤서현! 너도 쌍시 맞지? 일주일 동안 어디서 공부할 거야?”
“자취방에서 혼자 할 생각입니다.”
“안돼, 안돼. 혼자 공부하다가 까딱 잘못하면 F 받는다. 우리 다 같이 강의실에 모여서 하자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러죠, 뭐.”
해부학 재시 대상자 스무 명 가운데 김영도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나와 박성우를 비롯한 여덟 명.
절치부심한 나는 일주일 동안 누구보다 일찍 나와서 가장 늦은 시간에 귀가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 날 아침이 밝았다.
* * *
늦은 시간까지 상완의 단면 구조를 암기하다가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이 들었었던 나는 좁은 자취방 안을 요란하게 채우는 알람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이런, 벌써 아침인가? 얼마 못 잔 것 같은데......”
나는 눈을 비비며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새벽까지 정리해 둔 핵심 요약본들을 가방에 쓸어 담은 뒤 바닥에 널려 있는 옷들을 주워 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니 시험 30분 전인 8시 30분.
거울을 보고 옷차림을 가다듬은 나는 전날 미리 사둔 크림 빵을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며 달려 나갔다.
부속병원 바로 옆에 위치한 의과대학 앞 사거리는 진료를 위해 찾아온 환자들의 차들로 북적였다.
가능한 일찍 도착해서 한 글자라도 더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했기에 나는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자마자 앞으로 달려 나갔다.
-꺄악! 누가 좀 도와줘요!
“이게 무슨 소리지?”
지하철역에서 병원 입구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젊은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내 시야에 믿을 수 없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기가 타고 있는 유모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도로를 향해 굴러 내려가는 모습을 발견한 나는 앞뒤 생각 없이 달려갔다.
-빠아아앙!
멀리서 다가오던 택배 트럭이 막 유모차를 덮치려던 순간, 몸을 날린 내가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으악!”
-쿠웅
하지만 안타깝게도 트럭을 피하지 못한 나는 종이 인형처럼 튕겨 나가 보도블럭에 얼굴부터 떨어져 버렸다.
-웅성웅성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잃어버렸던 내 귀에 모여든 사람들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 죽어버린 건가?’
하지만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내 입에서 진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히 이빨은 멀쩡하군.’
멍한 와중에 대충 상태를 살피니 일단 코가 부러진 듯했고, 얼굴 뼈도 멀쩡하지 않은 것이 확실했지만 시험을 못 볼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뒤늦게 달려와 서둘러 유모차 안의 아기 상태를 살핀 어머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나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아기가 살았어요! 그런데 학생 얼굴에서 피가 많이 나는데 빨리 병원으로 가야......”
“아닙니다. 저는 꼭 쳐야 할 시험이 있거든요.”
“아니,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 시험이라고요?”
물론이다. 재시에 결장하면 해부학 성적은 F로 확정, 내년에 다시 1학년 1학기를 수강해야 했기에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드르륵
시험을 기다리던 학생들이 서로 문제를 주고받느라 소란스럽던 강의실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서현이? 너 괜찮냐?”
“얼굴이 엉망인데, 설마 누가 때리기라도 한 거야?”
지난 일주일 동안 함께 공부했던 김영도 선배와 절친 박성우가 다가와서 내 상태를 살폈다.
“......트럭에 부딪혔어요.”
“얼굴을?”
“그러고 보니 허리하고 무릎도 좀 아프네요. 그래도 시험을 못 볼만한 상태는 아닙니다.”
나를 마지막으로 스무 명이 모두 자리에 앉은 지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해부학 교실 조교 한 명이 시험지를 들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심하게 부어오른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별다른 말 없이 시험지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시험지는 상지 세 장, 하지 네 장입니다. 시험 시간은 각각 한 시간 반. 두 개 모두 해당하는 학생은 세 시간 동안 풀면 됩니다.”
안면에 밀려오는 통증을 힘겹게 참던 나는 내 눈앞에 놓인 일곱 장의 종이를 내려다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휴, 많기도 하네.”
시험지 배부를 모두 마친 조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다 푼 학생은 먼저 제출하고 나가면 됩니다. 시험 결과는 오늘 저녁 6시에 해부학 교실 홈페이지 공지 사항 게시판을 확인하시고, 교수님을 직접 찾아오거나 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백인성 교수님은 학생이 직접 찾아오는 걸 정말 싫어하시거든.”
벌써 두 번의 본과 1학년을 겪었던 김영도 선배는 조교의 말에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조교의 신호와 함께 시험 시간이 시작되자 나는 먼저 상지 시험지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겪었던 사고와 그 여파로 생긴 통증, 문제를 풀기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갈수록 점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나를 엄습했다.
“......어라?”
아무리 봐도 분명 문제의 난이도는 상당했다.
물론 나는 교과서와 렉쳐, 족보를 지난 일주일 동안 눈알이 빠져라 달달 외웠지만, 독사라는 별명이 걸맞게 백인성 교수는 재시를 위해 모든 문제를 새롭게 만들어서 출제했다.
어느 정도 지난 시험 문제가 재활용 되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학생들에게서 괴로움 가득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의 나는 달랐다.
문제를 읽는 즉시 눈앞에 그 구조와 이름이 마치 책을 보는 것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4. 럭비 경기 중 과도한 견관절 하강 및 반대측으로의 경부 신전으로 인해 상완신경총의 상부 신경간(Superior trunk, C5, C6)이 손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마비는 무엇입니까?]
‘이건...... Erb-Duchenne paralysis.’
일필휘지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동안 순식간에 50분이 지났다.
놀랍게도 나는 스무 명 가운데 가장 먼저 시험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답안을 제출했다.
졸린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조교가 인기척을 느끼고 놀라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벌써 끝냈어?”
“운 좋게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왔습니다.”
“포기한 건 아니지?”
그는 모든 문제에 답이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졸음이 달아난 듯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김영도 선배가 강의실에서 나가려는 내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윤서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온 내게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다가와서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어이, 다친 곳은 좀 어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좀 아프네요. 빨리 진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참, 나 누군지 모르지? 성형외과 조교수 전상욱이라고 해. 한참 차이가 나긴 하지만 편하게 선배라고 불러.”
갑자기 나타나서 친근하게 말을 건네던 그는 내가 약간 당황한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웃으며 말했다.
“아침에는 정말 고마웠어. 우리 와이프가 다른 데 한눈을 팔다가 유모차를 놓쳐서 큰일 날 뻔했다고 하더라.”
“아, 그때 그...... 아기는 괜찮은가요?”
“그럼, 덕분에 아주 멀쩡하지. 그런데 너는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름이......?”
“본과 1학년. 윤서현이라고 합니다.”
“그래, 분명 학기가 끝났을 텐데 시험을 치러 달려갔다고 해서 재시가 뜬 1학년인 것은 짐작했지. 시험은 잘 봤어?”
“그럭저럭이요.”
“제일 먼저 나온 걸 보니 모 아니면 도인데. 아무래도 도는 아닌 것 같군. 어쨌든 얼른 가자.”
“어디로 말씀이신가요?”
“어디긴? 성형외과 외래지. 이왕 치료하는 거 아주 멋있게 만들어 줄게.”
이렇듯 막판에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마침내 길었던 나의 본과 1학년 1학기가 끝났다.
짧았던 방학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 버리고, 기다렸던 2학기 첫날이 다가왔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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