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엘프의 배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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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한줄
작품등록일 :
2025.11.10 15:21
최근연재일 :
2025.11.14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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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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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바꼭질

DUMMY


“에리온, 거기 있었구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나리데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밝게 웃었다.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자, 금빛이 번져 나갔다.

눈부실 만큼 예쁜 아이였다.

살짝 뒤늦게 라엔이 따라왔다.

그는 내 옆에 앉으며, 흙 묻은 손을 털었다.

튼튼한 팔이며, 똑바로 선 어깨가 언제나 듬직해 보였다.

이 둘은 내 소꿉친구들이다.

우리 마을에서 나와 어울려 주는, 거의 유일한 친구들이기도 했다.


“또 혼자 있었지?”


“그냥··· 피곤해서.”


“피곤한 건 핑계고.”


세나리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또 그 애들 때문에 그런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은빛 머리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햇살을 받아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 아이들은 나를 힐끗거리더니, 곧 귓속말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까맣다.”


“숲의 그림자가 엘프 흉내 내는 거 아니야?”


“어제는 진짜 놀랐다니까. 어둠 속에 있으니까 안 보이더라니까.”


“그럼 괜찮지 뭐. 안 보이면 무섭지도 않잖아”


“아니야. 그 눈, 빛나잖아. 기분 나쁘게.”


“걔 눈 봤어? 붉은색이래. 마치 짐승 같지 않아?”


“쉬잇, 들리겠다.”


그런 말들은 이제 새롭지도 않았다.

그래서, 웃었다.

하지만 웃는 동안에도,

속에서는 누군가 내 살을 긁는 것처럼 따가웠다.

입꼬리는 올랐는데, 손끝은 얼어붙었다.


‘웃으면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 되뇌었다.

예전에는 그 말이 통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통하지 않았다.

웃음이 식자, 가슴 안쪽에서 서서히 무언가가 타들어갔다.

그 열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밖으로는 내보내지 못했다.

말 대신 숨을 삼켰다.

그래야 아무 일도 없는 척할 수 있으니까.


“무시해.”


그때 라엔이 낮게 말했다.


“걔네는 멍청해서 그래.”


“라엔, 말이 거칠어.”


세나리데가 살짝 타박했지만, 웃고 있었다.


세나리데는 흙 위에 나뭇가지를 눕히며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거 봐. 숲 지도를 그리는 거야.”


그녀는 나뭇가지 끝으로 길을 표시했다.


“여기가 우리가 사는 마을, 그리고 여기 강.


이쪽은 나무들이 제일 빽빽한 곳이니까 숨바꼭질할 때 최고야.”


라엔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여긴?”


그가 가리킨 곳은 세나리데가 그리다 말아 빈 공간으로 남긴 부분이었다.


“거긴 숲이 끝나는 곳이야.”


“끝?”


“응. 거기서부터는 나무가 안 자라. 아무것도 없대.”


“아무것도?”


“아무것도.

새소리도, 나뭇잎도 없어.

그래서 다들 그쪽으로는 가지 말래.”


그 말에 라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에 라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서워서 금지한 거야?”


세나리데가 잠시 망설이다가 낮게 말했다.


“무서워서라기보다··· 위험해서래.

어른들은 그 너머에 ‘인간들의 땅’이 있다고 했어.”


“인간?”


라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응. 불을 쓰고, 나무를 자르고, 땅을 바꾸는 애들.”


“진짜로 그런 애들이 있을까?”


내가 묻자 라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랑 상관없잖아.

거기까진 아무도 안 가니까.”


“응, 그래도···”


세나리데가 나뭇가지를 돌려 쥐었다.


“어른들이 괜히 금지한 건 아닐 거야.

그쪽에선 숲의 소리가 멈춘대.

마나도 흐르지 않고.”



하지만 곧 세나리데가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오늘은 숨바꼭질이니까.”


“누가 술래할래?”


““라엔!””


세나리데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라엔은 헛웃음을 지었다.


“야, 너희 둘이 짠 거지?”


“아니?”


“아니긴. 알았어, 해줄게. 이번엔 내가 다 잡는다.”


라엔이 나무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나는 세나리데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 숨을래?”


“이번엔 깊은 쪽으로 가자. 나무가 많아서 찾기 어려울 거야.”


“그래.”


우리는 동시에 달렸다.

풀잎이 다리를 스치고, 바람이 귓가를 때렸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숲 속은 금세 온통 초록빛으로 뒤덮였다.


‘이쪽이면 모르겠지.’


나는 한 그루의 굵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멀리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섯··· 여섯···!”


세나리데는 반대쪽 덤불로 숨어들었다.

그녀가 조용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진짜 안 걸리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먼 곳에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 이제 찾는다!”


그가 땅을 박차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 밟히는 소리, 숨소리, 어딘가 부딪히는 가지의 마찰음까지 또렷했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라엔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고, 바로 오른쪽 세나리데가 숨어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나리데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머리카락 끝이 덤불 너머로 삐져나왔다.


‘안 돼.’


라엔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다가가려는 찰나,

나는 반사적으로 뛰쳐나갔다.


“야! 나 여기 있다!”


라엔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내 시야는 흔들리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에리온?!”


그가 외쳤다.


“잡는다!”


나는 그대로 달렸다.

발밑의 땅이 미끄러질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세나리데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금세 내 뒤로 작아졌다.

라엔의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쫓아왔다.

낙엽이 터지고, 가지들이 내 어깨를 스쳤다.

숨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속도로라면 곧 잡힐 게 뻔했다.

나는 달리던 발을 살짝 꺾어, 흙바닥을 손으로 세차게 쓸어 올렸다.

마른 흙먼지가 퍽 하고 터져, 바람을 타고 뒤로 날아갔다.


“우엑, 뭐야 이건!”


라엔이 잠시 멈춰 눈을 비볐다.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달렸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


뒤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에리온! 그건 반칙이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바람이 내 웃음을 삼켜가며 숲 속으로 멀어져 갔다.

달릴수록 숲이 얇아졌다.

나무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바람이 더 넓게 퍼졌다.

풀잎 대신 잿빛 흙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전보다 강해졌다.


그때였다.

시야가 툭, 열린 듯 느껴졌다.

그 앞은 지금까지 봐온 숲의 어느 곳과도 달랐다.

나무가 없었다.

풀도 드물게 자랐고, 바람이 지나가며 흙먼지만 일으켰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평원이 있었다.

나는 발을 멈췄다.

심장이 요동쳤다.

지금껏 숲속에서는 느낀 적 없는, 낯선 냄새가 났다.

조금은 더 건조한 냄새.


‘저기··· 뭐가 있을까.’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저쪽을 향해 끌렸다.

저기라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내 눈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아무도 까맣다고 말하지 않는 곳.

그게 그저 바램인지, 내 속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발만 내디뎌 보면 알 것 같았다.


“잡았다!”


그때 라엔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다.

순간 어깨가 확 끌려갔다.

라엔이 내 팔을 붙잡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진짜로 잡았다! 드디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굳었다.

눈동자가 내 뒤쪽, 숲이 끊긴 그곳을 향해 떨렸다.


“잠깐.”


그가 나를 더 세게 붙잡았다.


“거기 나가면 안 돼.

어른들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어?

숲 끝 너머로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잖아.”


“난 그냥···”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냥 나가보고 싶었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라엔의 손끝이 떨렸다.


“궁금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거긴 진짜로, 아무도 안 가.”


잠시 후 세나리데가 달려왔다.

숨을 몰아쉬며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무슨 일이야? 왜 거기 서 있어?”


라엔이 짧게 대답했다.


“에리온이 숲 끝까지 갔어.”


“뭐라고?”


세나리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곧장 내 앞을 막았다.


“거긴 어른들도 안 가. 아무도.”


“왜?”


“그냥 그래. 그쪽은 마나가 멈춘대. 새도 안 날고.”



“그만 봐. 이제 돌아가자.”


라엔이 내 팔을 놓자, 세나리데가 나를 한번 노려봤다.


“진짜 바보야. 다음엔 그렇게 뛰지 마.”


“미안.”


“미안할 게 아니라, 잡히면 다음 술래잖아.”


세나리데가 일부러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라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다음 술래는 에리온이야.

이제 숨을 때 내가 진짜 잘 숨는 법 보여줄게.”


우리는 웃으며 다시 나무 사이로 걸어갔다.

하루 종일 놀고 난 뒤의 공기는 달았다.

나무들이 흔들릴 때마다 마치 우리를 칭찬하듯 부드러운 바람이 스쳤다.

세나리데는 장난처럼 손을 흔들었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만나자!”


라엔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일은 내가 먼저 숨을 거야. 진짜로.”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나를 맞았다.


“오늘도 늦었구나. 손 씻고, 밥부터 먹어야지.”


식탁 위에는 작은 나무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연둣빛 과일이 반쯤 껍질을 벗겨진 채 담겨 있었다.

엘드라실의 축복이었다.

과일의 껍질을 벗기니 은은한 향이 새어나왔다.

살짝 달고, 끝에는 풀잎 같은 향이다.

엘프들은 이걸 매일 먹는다.

엘드라실의 축복은 매일 저녁이 되면 마을 전체로 퍼졌다.

그게 우리에게 마나를 돌게 하는 원천이라고 했다.

어른들은 그것을 세계수, 엘드라실의 숨결이라 불렀다.

엘드라실의 뿌리가 이 숲 밑을 관통하고,

그 뿌리에서 흘러나온 힘이 열매로 맺혀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나는 그 말을 믿으면서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누구도 열매를 거르지 않았다.

그러면 마나의 흐름이 끊긴다고,

숲이 그 엘프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일을 반쯤 베어 물었다.

달콤한 즙이 혀끝에 닿자, 몸 안 어딘가가 따뜻하게 반응했다.

팔끝으로 미세한 빛이 스며드는 느낌.

눈을 감으면 금빛 가루가 몸속을 흘러다니는 것 같았다.


그저 맛있었고, 따뜻했고,

먹을 때마다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축복이 더 달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웃었다.


“그건 네가 많이 뛰어서 그래.

땀 흘린 날엔 달게 느껴진단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엘드라실의 축복이 있는 한, 우린 안전해.

숲은 우리를 버리지 않아.”


그때 문이 열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또 늦었군.”


아버지였다.

감시단의 제복 위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묵직한 나무 활을 문가에 기대어 두고 손을 털었다.


“오늘도 경계선에 다녀오셨어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바람이 거세다. 숲의 가장자리가 조금 불안정해졌어.”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잔을 내밀었다.


“괜히 걱정시키지 말아요. 아이가 또 겁먹잖아요.”


“겁이 아니라 경계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에리온, 숲의 끝 근처엔 절대로 가지 마라.


최근 그쪽에서 이상한 흔적이 발견됐다고 하더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방 안엔 조용한 냄새가 남았다.

엘드라실의 향과 나무껍질의 온기, 그리고 살짝 단 과즙 냄새.

나는 손끝으로 남은 즙을 닦으며 창가에 걸터앉았다.

밖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저녁빛이 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숲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어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시간의 숲이 제일 예쁘지? 세상이 숨을 고르는 것 같잖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오늘은 조금 조용해요.”


“그건 바람이 잠든 거야. 내일이면 다시 흔들릴 거야.”


어머니는 웃으며 창가의 등불을 올렸다.

주황빛 불이 깜빡이며 천천히 번졌다.

그 빛이 벽을 따라 퍼지는 동안,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서 숲의 끝이 희미하게 빛을 잃고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어둠은 평소와 달랐다.

뭔가가 그 너머에서 기다리는 것처럼,

고요했다.











작가의말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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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프의 배신자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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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7화. 단절 25.11.14 0 0 12쪽
7 6화. 입단 시험 25.11.13 2 0 14쪽
6 5화. 훈련 25.11.13 4 0 14쪽
5 4화. 거래 25.11.12 10 0 13쪽
4 3화. 탈출 25.11.11 10 0 12쪽
3 2. 침략 25.11.10 11 0 12쪽
» 1. 숨바꼭질 25.11.10 14 0 12쪽
1 0. 프롤로그 25.11.10 15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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