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탈출
불빛이 눈꺼풀을 스쳤다.
희미한 붉은빛이 깜빡였다 꺼졌다.
눈을 뜨자, 불이 있었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묶여 있었다.
손목과 발목이 거친 밧줄에 감겨 있었다.
피가 굳어, 살과 밧줄이 하나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살이 뜯겼다.
차가운 흙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곧 이상한 걸 깨달았다.
이 냄새는 숲의 냄새가 아니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엔 썩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피, 금속, 타버린 나무, 그리고 익은 고기 냄새.
바람이 불 때마다 풀잎이 눕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엔 나무가 거의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무 그림자 대신, 깎아지듯 솟은 바위들이 보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긴 숲속이 아니었다.
밖이었다.
벌판이 시작되는 자리.
바람이 그대로 불어오는 자리였다.
멀리서 말들이 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는 인간들이 있었다.
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갑옷을 벗어둔 채, 그들은 마시고 웃었다.
“ᚷᚩᚱᛊ ᚾᚩᚱᛗᛞ!”
낯선 언어가 튀어나왔다.
거칠고 낮았다.
불빛에 비친 얼굴들이 번들거렸다.
기름과 땀, 피의 윤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를 보며 손짓했다.
다른 자가 낄낄거리며 무언가를 던졌다.
무겁게, 내 앞에 떨어졌다.
피가 절반쯤 마른 고깃덩이였다.
“ᚩᚱᚠᚨ, ᚾᚩᚱᛗᛞ!”
뜻은 몰랐지만, 웃음의 방향은 분명했다.
비웃음. 조롱.
나는 몸을 웅크렸다.
몸의 감각이 돌아오자, 고통도 함께 밀려왔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다리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한기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여긴··· 어디지.’
기억이 희미하게 엉켜 있었다.
숲, 불길, 세나리데의 손, 그리고
터져나온 빛.
그 이후는 없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발자국이 흙을 밟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 순간 웃음이 터졌다.
“ᛊᚩᚱᛗ ᚷᚱᚩᚢᚾᛞ!”
다른 자들이 따라 웃었다.
낮고, 더럽고, 짐승 같은 웃음이었다.
그들이 내 주변을 빙 둘러섰다.
누군가는 술병을 들고,
누군가는 칼끝으로 내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이 막혔다.
목 안쪽이 말라붙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 소리가 귀 안을 가득 채웠다.
누가 피식 웃었다.
곧 다른 자가 따라 웃었다.
“ᚩᚱᚠᚨ!”
낯선 말이 터졌다.
짧고, 거칠고, 혀끝이 튀는 소리.
곧 또 다른 자가 따라 웃었다.
“ᚷᚩᚱᛊ ᚾᚩᚱᛗᛞ!”
언어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온몸으로 느껴졌다.
비웃음, 놀림, 그리고
자신들의 세계에서만 허락된 잔혹한 유희.
그들은 내가 움찔한 걸 보고 더 크게 웃었다.
“ᚠᚱᛟᛗ ᚩᚾᚱᛊ ᚷᚩᚾᛊ!”
언어는 다르지만, 말투는 알 수 있었다.
우쭐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사냥꾼이 사냥감을 내려다볼 때의 목소리.
누군가의 발이 내 어깨를 툭 찼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였다.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웃었다.
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들고,
누군가가 술을 마시다 절반을 흘렸다.
액체가 바닥을 타고 흘러
내 손등에 닿았다.
“ᚠᚱᛟᛗ ᚩᚾᚱᛊ ᚷᚩᚾᛊ!”
이번엔 셋이 동시에 외쳤다.
목소리들이 겹쳐 하나의 울음처럼 퍼졌다.
그중 하나가 병을 들어올렸다.
그는 짧게 웃더니,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것을 내 쪽으로 던졌다.
병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쨍’
유리 조각과 술방울이 얼굴 옆을 스쳤다.
따뜻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을 삼켰다.
그러나 삼킨 공기가 목에서 걸려 올라오지 않았다.
눈꺼풀이 떨리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밧줄이 살을 파고들었다.
움직일수록 더 조여들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눈동자가 검게 번들거렸다.
그는 내 얼굴 가까이에 손가락을 들이밀더니,
내 턱을 들어올렸다.
손끝이 거칠고 뜨거웠다.
“ᚩᚱᚠᚨ··· ᚷᚩᚾᛊ?”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뭘 말하는지 몰라도,
그걸 알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목소리의 높낮이,
끝에 걸린 웃음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내 턱을 탁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자국이 멀어지자
다른 자들이 다시 웃었다.
“ᚷᚱᚩᛊ ᚩᚾᚱᛗᛞ!”
깎아지는 웃음소리가
불빛 위에서 뒤엉켰다.
병이 깨지고, 불씨가 튀고,
그들은 그 모든 소리에 흥을 맞춰 웃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불길처럼 바닥에 퍼졌다.
그 불빛 속에서
다른 그림자들이 겹쳤다.
타오르던 숲,
붉게 일렁이던 하늘,
흙 속으로 꺼져가던 손들.
가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귀 안의 심장 소리가 바뀌었다.
두려움의 고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짓이기고 싶을 만큼
뜨겁고 무거운 소리로.
어머니의 손을 기억한다.
아침마다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 따뜻한 손끝을.
지금은 그 온기가 닿던 자리조차 사라졌다.
라엔의 등을 기억한다.
두려움 속에서도 절대 멈추지 않던 걸음,
항상 나보다 반 발 앞서던 그림자.
그 등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나리데의 웃음도 기억한다.
불빛 아래서 흔들리던 금빛 머리칼과 함께,
작은 노래처럼 맴돌던 웃음소리까지.
이제는 그 잔향만이 귓가에 남아 있다.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가운데에 빈칸이 생겼다.
그 빈칸들이 하나둘 모여 불이 되었다.
그 불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채웠다.
두려움은 얇은 껍질처럼 벗겨졌다.
피부 밑에서 또 다른 감정이 꿈틀거렸다.
뜨겁고, 질기고, 되돌릴 수 없는 감정.
돌려받아야 한다.
그들이 앗아간 모든 것들을.
고향도, 가족도, 친구도, 세나리데도.
모두 되찾아야 한다.
아니, 되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앗아간 만큼,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야 한다.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전부 다.
그 대가를 받게 해 주겠다
으득—
모조리 죽여버리겠어.
그들의 마지막 자손이, 혈통과 자취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들을 쫓아가 하나씩 말살하겠다.
그 생각이 굳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빛이 눈을 스쳤다.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고, 내 시선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가장 가까운 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처음엔 웃었다.
입이 먼저 벌어지고, 이가 번들거렸다.
나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호흡을 낮추고, 초점을 그의 동공에 고정했다.
그의 웃음이 반박자 늦게 멈췄다.
미간이 접히고,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ᚩᚱᚠᚨ···?”
그가 점점 다가왔다.
나는 눈을 내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내 얼굴을 덮었다.
불빛이 가려지고, 그의 숨결이 코끝에 닿았다.
“ᚷᚱᚩᛊ··· ᚾᚩᚱᛗ?”
얕게 짜증난 억양.
손등의 혈관이 도드라지고, 손가락이 내 턱선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대로 바라봤다.
깜박임을 미루고, 혀끝을 다물었다.
그의 동공 속 작은 불씨가 일렁였다
그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술 냄새가 더 진하게 밀려왔다.
“ᚠᚱᛟᛗ ᚩᚾᚱᛊ ᚷᚩᚾᛊ!”
이번엔 또렷한 분노.
손목이 돌아가며 손등이 뒤로 젖혀졌다.
나는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소리가 먼저 왔다.
퍽.
광대뼈 옆으로 타는 통증이 번졌다.
머리가 옆으로 꺾였고, 흙맛이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피가 혀끝에 찍혔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다시 들었다.
눈을 맞췄다.
이번에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또 한 번.
뺨과 턱을 타고 오는 충격이 머릿속을 뿌개듯 흔들었다.
숨은 끊어질 듯 이어졌고, 눈앞이 잿빛으로 번졌다.
주변의 웃음소리는 멀리서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았다.
손끝이 닿자, 그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눈가에 짧은 당황이 스쳤다가, 곧 익숙한 오만으로 바뀌었다.
‘그럼 그렇지.’
그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쭈그려 앉히듯 내려앉아, 몸을 밀착시키며 내 얼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본능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숨결이 코끝에 닿았다.
위협이었다. 놀이였고, 권력의 과시였다.
그의 숨이 코끝을 스쳤다.
술과 피 냄새가 섞여,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그 웃음은 완벽한 오만 그 자체였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이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옥에나 가.”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피식 웃었다.
“ᚷᚩᚾᛊ ᚾᚩᚱᛗ···”
그가 다시 주먹을 들어올린 순간 나는 손을 들었다.
유리 조각이 그의 목 아래로 파고들었다.
피가 튀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몸이 그대로 내 쪽으로 기울어지며, 마치 나를 눌러 앉힌 자세 그대로 쓰러졌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숨결이 내 어깨에 닿았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멀리서 들리는 웃음과 고함소리가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손바닥의 유리조각이 미묘하게 반짝였다.
밧줄은 이미 풀려 있었다.
아까 그들이 던진 병이 깨질 때,
그 파편 중 하나가 내 손끝에 닿았었다.
피와 술이 묻은 손으로 그 유리 조각을 쥐고,
매듭을 따라 천천히 긁어내며 실밥을 잘랐다.
그게 전부였다.
그 작은 조각, 그 짧은 틈이
지금 이 한 번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가죽끈 아래, 단검 손잡이가 있었다.
손끝으로 그것을 천천히 빼냈다.
그의 몸은 여전히 내 앞에 기대어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나는 단검을 손에 쥐고,
발목의 밧줄을 한 줄씩 잘라냈다.
섬유가 끊길 때마다, 자유가 조금씩 돌아왔다.
멀리서 누군가가 술을 마시며 웃었다.
아직 아무도 몰랐다.
불빛 아래, 한 인간이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 올이 떨어졌을 때,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몸은 여전히 내 어깨에 기대 있었다.
피가 턱 밑으로 흘러내렸고, 숨결은 미약하게 떨렸다.
죽어가는 인간의 체온이 내 옷깃을 적셨다.
나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입이 희미하게 열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ᚷ··· ᚩᚱ··· ᛗ···”
무너지는 혀끝이 단어를 만들지 못했다.
손끝에 힘을 주어 그의 허리띠를 더듬었다.
가죽끈 아래, 단단한 손잡이가 닿았다.
석궁이었다.
피와 먼지에 덮인 작은 금속 활, 그 끝에 한 발이 이미 걸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것을 빼냈다.
그의 숨이 마지막으로 목구멍을 긁으며 새어 나왔다.
“ᚾ···ᚩ···ᚱ···”
그리고 멎었다.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멀리서 불빛이 일렁였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ᚩᚱᛗ ᚷᛟᚾᛊ?”
낮고 경계된 목소리.
그가 불빛을 들고 내 쪽을 향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에 쥔 석궁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석궁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이 순간 커졌다.
“ᚠᛟᚱᛊ—”
화살이 날아갔다.
짧은 충격음, 그리고 몸이 쓰러지는 소리.
그제야 뒤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ᚷᚱᚩᛊ! ᚷᚱᚩᛊ!”
혼란이 퍼져나갔다.
천막이 들썩였고,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잠들어 있던 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속으로 터졌다.
인간들이 무기를 집어 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화살집을 더듬었다.
화살이 여섯 개.
손끝이 피에 젖어 미끄러졌다.
하나, 둘, 셋.
넷째를 잡는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웠다.
불빛이 내 쪽으로 흔들렸다.
나는 손을 거두었다.
나머지는 버렸다.
세 자루만 쥐고 몸을 틀었다.
나는 달렸다.
뒤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 무겁게 밟히는 발소리.
“ᚷᚱᚩᛊ!”
“ᚩᚱᛗ!”
짧은 외침들이 어둠 속을 밀어왔다.
- 작가의말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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