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거래
돌이 흩어져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메마른 평원 위에 박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윤이 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가 흘러내렸고, 그 소리가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땅.
바람과 돌뿐이었다.
나는 바위 사이에 몸을 웅크렸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모래를 긁는 소리, 거친 숨, 그리고 옷이 스치는 짧은 울림.
급하게 쫓아온 모양이었다.
갑옷은 입지 않은 듯했다.
쇠의 무게를 덜어낸 대신, 살갗 하나로 화살을 막아야 했다.
나는 숨을 눌렀다.
횃불 셋.
불빛이 바위 면을 타고 번졌다.
멀리선 붉은 점 같았지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ᚷᚱᚩᛊ.”
낮게 울리는 목소리.
그들이 흩어졌다.
그림자들이 갈라지고, 발소리가 좌우로 퍼졌다.
바람이 한 번 방향을 틀었다.
모래가 눈가를 스쳤다.
나는 석궁을 들었다.
손끝이 미끄러웠다.
돌의 냉기가 손등을 타고 올랐다.
한 명이 가까워왔다.
횃불의 불꽃이 바위 틈을 훑었다.
그 불빛이 조금만 더 기울었다면 내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숨을 죽였다.
그가 멈췄다.
횃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빛이 내 손끝을 스치려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불꽃이 휘청였다.
'지금이다'
그 틈에 방아쇠를 당겼다.
짧은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갔다.
살을 찢는 둔탁한 감각.
남자는 말없이 쓰러졌다.
손에서 떨어진 횃불이 모래 위에서 튀었다.
뒤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ᚷᚱᚩᛊ! ᚩᚱᛗ!”
두 개의 불빛이 동시에 움직였다.
나는 몸을 돌려 달렸다.
바위 틈을 가르며, 바람을 헤치며.
모래가 발밑에서 폭발하듯 흩어졌다.
숨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뒤쪽 불빛이 요동쳤다.
돌무더기를 빠져나오자 시야가 열렸다.
바위가 끊겼다.
달빛이 평원을 덮고 있었다.
더이상 숨을 곳은 없었다.
바람이 정면에서 불었다.
모래가 얼굴을 때렸다.
“ᚷᚩᛏ ᚢᛖᚱᛖ!”
나는 다시 달렸다.
바람이 귀를 찢었다.
숨이 가빠지며 폐 속에서 쇳맛이 났다.
뒤쪽에서 불빛이 요동쳤다.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그때 화살 하나가 스쳤다.
바람을 찢는 소리.
그리고 살갗이 터지는 열감.
왼쪽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아프다기보다, 온몸이 휘청였다.
또 한 발.
그림자 옆을 지나가며,
화살이 돌에 부딪혀 튕겼다.
금속이 울렸다.
숨이 터져 나왔다.
목이 갈라졌다.
한 번, 두 번, 발끝이 모래에 파묻혔다.
발목이 무겁게 당겨졌다.
그때 멀리 검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돌기둥들.
달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윤이 났다.
기둥 사이로 어둠이 서 있었다.
불빛이 가까워졌다.
뒤에서 모래가 요동치며 일렁였다.
화살이 돌에 맞아 튀는 소리가 파편처럼 흩어졌다.
나는 방향을 틀었다.
거기뿐이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뒤에서 불던 바람이 한순간 강해졌다.
모래가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등 뒤를 스치는 공기가 마치 손처럼 나를 밀어냈다.
불빛이 흔들리고, 고함이 바람 속으로 묻혔다.
모래가 그들의 얼굴을 덮었는지 화살이 멈췄다.
'기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앞으로 갈수록 바람이 등 뒤에서 밀어붙였다.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소리도, 불빛도 조금씩 희미해졌다.
돌기둥들이 가까워 지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단순한 바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양.
금이 간 표면 위로 빛이 스며들며, 오래된 기호들이 드러났다.
둥글게 배열된 기둥, 무너진 천장, 그리고 그 중심에 열린 통로.
바람은 그 안으로 흘러들어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나는 그대로 그 틈으로 들어섰다.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의 결이 부드러워지고, 냄새가 변했다.
돌가루와 썩은 흙, 그리고 어딘가 오래된 금속의 향.
뒤에서 고함이 또 울렸다.
불빛이 벽면에 부딪혀 흔들렸다.
기둥이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나는 몸을 낮췄다.
바닥에 피가 떨어졌다.
어깨가 저릿했지만, 아프다는 감각은 멀었다.
그보다 이곳의 공기가 낯설게 고요했다.
어딘가에서 돌이 구르는 소리,
바람이 멈칫하고 폐허 전체가 숨을 들이마시는 듯 잠잠해졌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두 개의 불꽃이 폐허 안으로 들어왔다.
모래와 흙을 밟는 발소리가 규칙 없이 번졌다.
“ᚷᚱᚩᛊ...”
낯선 음률이 공기를 긁었다.
잠시 뒤, 다른 쪽에서 짧은 답이 돌아왔다.
“ᚩᚱᛗ.”
그들이 가까워졌다.
횃불의 불빛이 바닥을 훑었다.
그 끝에서 피의 자국이 드러났다.
'아뿔사'
바닥 위에 번진 붉은 점.
그 점들은 나를 향해 이어졌다.
한 명이 그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때, 반대편에서 소리가 났다.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돌이 아닌, 더 가볍고 불규칙한 소리였다.
기둥 사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스치듯 미끄러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ᚾᚩᛗ...?”
짧은 말이 흘렀다.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 명이 손짓했다.
그가 횃불을 들고 반대편 통로로 방향을 틀었다.
남은 한 명은 피의 흔적을 따라 그대로 앞으로 나아왔다.
불빛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멀리서, 횃불 하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한 줄기 불빛이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옮길 때마다, 그의 횃불이 벽에 부딪혀 번졌다가 사라졌다.
모래 위를 밟는 소리가 일정했다.
조심스러웠지만, 너무 늦지 않았다.
불빛이 가까워졌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발끝이 모래를 밟을 때마다 작은 먼지가 일었다.
숨소리와 바람소리만이 그 사이를 메웠다.
나는 숨을 죽였다.
석궁을 내려두고, 단검을 손에 쥐었다.
돌벽이 차가웠다.
피가 식은 팔이 그 표면에 닿자,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어느새 흔적이 끊겼다.
그가 멈췄다.
불빛이 기둥을 타고 내 앞을 스쳤다.
한 걸음, 두 걸음.
숨이 코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땅에 묻은 피를 보고 주위를 살피는 듯했다.
횃불이 조금 내려갔다.
불빛이 손끝까지 번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 순간,
뒤쪽 통로에서 약한 바람이 불었다.
불꽃이 흔들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다'
나는 움직였다.
발끝이 모래 위를 스쳤다.
팔이 뻗었고, 단검의 날이 살을 밀었다.
짧은 숨.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횃불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그것을 잡았다.
나는 단검을 빼냈다.
피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번, 두 번, 호흡을 고르고 나서 그 시체를 조용히 뒤로 밀어넣었다.
나는 시체를 끌어 기둥 뒤로 옮겼다.
돌무더기와 그림자 속에 밀어 넣자, 형체가 금세 사라졌다.
손을 털었다.
모래와 피가 함께 묻어나왔다.
폐허는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멀리, 어둠의 끝이 희미하게 열려 있었다.
거기엔 불빛 하나가 남아 있었다.
작고, 흔들리고, 너무 멀었다.
저쪽까진 갈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갔다.
그 바람이 등 뒤에서 한 번 더 밀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미세하게 기울었다.
그 아래서 나는 석궁을 들어올렸다.
남은 화살 두발.
아마 별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을거다.
그리고 나는 다 걸었다.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불빛을 쫓아.
기둥 사이로 금이 간 돌벽이 이어졌고, 천장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모래가 천천히 떨어지며, 바람이 그 틈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나는 석궁을 들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모래 위로 천천히 발을 밀었다.
공기는 식어 있었고, 냄새가 바뀌었다.
쇠와 먼지, 그리고 오래된 피의 냄새.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그가 어딘가를 살피며 멈춘 듯했다.
기둥 너머,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이 닿은 곳에는 무언가의 형태가 있었다.
제단.
반쯤 무너진 돌 구조물.
한가운데가 움푹 파였고, 그 안에 돌조각과 금속 파편이 섞여 있었다.
벽에는 닳아 지워진 문양들이 얕게 남아 있었다.
그것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가느다란 그림자가 벽면을 따라 흐르는 듯했다.
그가 그 앞에 서 있었다.
횃불이 제단 위를 훑었다.
불꽃이 닿자, 금속 파편 하나가 반짝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석궁을 들어, 조준선을 그의 목 뒤에 맞췄다.
그러나 방아쇠가 닿기 직전 천장에서 먼지 한 줌이 떨어졌다.
사각.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발사음이 터졌다.
화살이 날아가, 돌기둥에 박혔다.
금속이 울렸다.
그가 몸을 돌렸다.
횃불이 이쪽을 향했다.
빛이 내 얼굴을 스쳤다.
'젠장'
나는 다급히 재장전했다.
손끝이 떨렸다.
화살이 홈에 제대로 걸리지 않았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ᚷᚩᛗ!”
다행히 그가 다가오기 전 화살을 장전했다.
다시 발사했다.
화살이 빗나갔다.
벽에 맞고 튕겨나며 파편이 흩어졌다.
벽에 부딪혀 튕겨나며 돌조각이 터졌다.
그는 이미 달려들고 있었다.
빛이 흔들렸고,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충격.
숨이 터졌다.
등이 돌기둥에 부딪혔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그가 팔을 휘둘렀다.
금속이 스쳤다.
아슬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볼 옆이 갈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단검을 꺼냈다.
하지만 늦었다.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이 짓눌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다.
다른 팔로 반격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몸이 벽에 박혔다.
머리가 돌과 부딪혔다.
시야가 번쩍였다.
귀가 울렸다.
그의 눈이 가까워졌다.
숨과 피 냄새가 뒤섞였다.
그의 팔이 다시 올라갔다.
내 팔도 같이 올라가며, 단검이 떨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목을 움켜쥐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그 순간,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
모래에 반쯤 묻힌 돌조각.
나는 그대로 움켜쥐었다.
온몸의 남은 힘을 모아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
피가 튀었다.
그가 비명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바로 따라 쓰러졌다.
시야가 흔들렸다.
팔에서 힘이 빠졌다.
돌이 손에서 굴러 떨어졌다.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폐가 붙잡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피범벅인 얼굴.
다시 내 쪽으로,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나는 뒤로 밀려났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기듯이 물러섰다.
숨이 헐떡거렸다.
모래와 피가 뒤섞여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에 힘이 없었다.
다리가 휘청였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차가운 감촉이 등에 닿았다.
돌이었다.
나는 멈췄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다.
숨이 막혔다.
피가 어깨에서 흘러내려 돌 표면을 타고 떨어졌다.
균열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아니, 들린 것 같았다.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낮고,
생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힘을··· 원하느냐.”
그는 아직 내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려줘···”
그 말이 입에서 새어 나갔다.
의식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모든 거래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리고 대가는 반드시 치러져야 하지.”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제단 위의 피가 다시 흘렀다.
균열이 벌어지며 붉은 선이 번졌다.
“나의 존재를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에게 힘을 주지.”
차가운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그 바람이 내 피 냄새를 삼켰다.
눈앞의 어둠이 형체를 가진 듯 움직였다.
이건 잘못된 거라고.
어딘가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그런데,
피가 너무 많이 흘렀다.
손끝이 식어 가고, 시야가 흔들렸다.
살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받아들일게··· 제발, 살려줘.”
말이 흩어졌다.
숨이 섞인 채로 어둠 속으로 흘러들었다.
“거래는 이루어졌다.”
그 한마디가 제단을 울렸다.
돌의 틈에서 피가 번져나갔고,
붉은 빛이 균열 사이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 무게가 사라졌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
등골을 따라 무언가가 스며들어 올라왔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두 번 크게 뛰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찬 기운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몸을 가누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허리가 펴지고, 고개가 들렸다.
의식은 뒤에 있었고, 몸은 앞서 있었다.
그가 있었다.
아직 쓰러지지 못한 채,
피투성이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인간.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손이 움직였다.
손끝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공기가 뒤틀렸다.
짧은 진동.
그다음
펑.
순간, 그의 머리 주변이 일그러졌다.
형태가 부풀었다가,
안쪽에서 무언가 터져 나왔다.
피와 바람이 동시에 터져나가며,
공기가 웅 하고 울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끝이 아직 떨렸다.
뭔가 뜨거운 것들이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의식이 꺼졌다.
- 작가의말
재밌게 보셨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