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화 : 세입자 하수태
내 인생은 숫자로 요약된다. '4억 5천'.
이 쓰러져가는 4층짜리 단동 빌라를 물려받았을 때 남겨진 순수 '빚'이다. 매달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이자만 수백. 1층 편의점은 3달째 월세가 밀렸고, 2층은 202호 아줌마를 빼면 201호는 반년째 공실이었다.
내 유일한 희망, 내 생명줄, 내 구원. 그것은 3층 옥탑방에서 '존재'하시는 권태룡 씨였다. 그가 내는 월세 40만 원과, 그의 보호자 '다곤' 어르신이 보내주는 정체불명의 후원금 400만 원. 합계 440만 원.
그래, 가끔 멸치가 비명을 지르고 벽에서 촉수가 튀어나오면 좀 어떤가. 내 4억 5천짜리 시한폭탄을 막아주는 유일한 방파제인데.
그 방파제가 오늘, 박살 날 위기에 처했다.
똑. 똑. 똑.
초인종이 아니었다. 눅눅한 이 빌라와 어울리지 않는, 바싹 마른 노크 소리였다.
"누...구..."
나는 현관문을 열고 말을 잃었다.
권태룡 씨와 정반대의 존재.
머리부터 발끝까지 샛노랬다. 그것도 화사한 노랑이 아니라, 먼지에 찌들고 햇빛에 바래 누렇게 떠버린 색. 군데군데 해진 낡은 노란 중절모, 때 묻은 노란 트렌치코트. 그에게서는 곰팡내와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딱 봐도... 돈이 없어 보였다.
"실례. 201호. 비어있다고 들었소."
남자의 목소리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됐지만, 어딘가 쪼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네. 반년째 비어있긴 한데... 보증금 3천에 월 60..."
"보증금? 월세?"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 그런 속물적인 것! 나는 '예술가'요. '하수태'라고 하지. 이 빌라... 아주 마음에 들어. 이 절망적인 균열, 이 썩어가는 구조! 아주 '영감'이 떠오르는군!"
...또라이가 분명했다. 나는 문을 닫으려 했다.
"특히..."
하수태라는 남자가 3층 천장(권태룡 씨의 옥탑방)을 올려다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저 위에서 새어 나오는... 저급하고 축축한 '잠꼬대'. 아주 역겨워. 내 예술 활동을 위해선 저놈과 가장 먼 곳이 좋겠군. 201호... 당장 계약..."
...콰-앙!!!
"어?"
내 시야에서 검은 잔상이 스쳤다.
방금 전까지 3층 옥탑방에 '존재'해야 할 권태룡 씨가, 내 옆에 서 있었다. 그 묵묵하던 양반이, 생전 처음 보는 살의(殺意)를 뿜어내며.
그의 후드 아래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심해의 포효가 새어 나왔다.
"네놈이... 여길... 왜..."
그리고 권태룡 씨가 움직였다. 아니, '폭발'했다.
권태룡 씨의 오른팔이 부풀어 오르더니, 검은색 갑각과 촉수가 뒤엉킨 거대한 집게발처럼 변형되었다. 그것이 하수태의 머리를 향해, 이 빌라 벽째로 분쇄할 기세로 내리찍혔다!
콰드득!!
"아악! 내 벽! 내 담보물!"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샛노란 남자, 하수태는 여유로웠다.
그는 날아오는 집게발을 향해 낡은 노란 장갑을 낀 손바닥을 펼쳤을 뿐이다.
"쯧쯧. 여전하구나, 동생. 대화보다는 폭력이지."
치이이이이익-!
권태룡 씨의 촉수 집게발이 하수태의 손바닥 앞, 샛노란 '인장(印章)'에 막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검은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고, 벽지와 내 얼굴에 역겨운 비린내를 풍기며 달라붙었다!
"겨우 이 정도 '광기'로 날 막겠다고?"
"닥쳐."
권태룡 씨의 등 뒤에서 수십 가닥의 검은 촉수가 튀어나와 하수태를 향해 폭풍처럼 몰아쳤다!
쾅! 콰쾅! 콰드드득!
"안 돼! 내 대출금! 내 이자!"
촉수들은 하수태를 피해 빌라 벽을 무차별적으로 강타했다. 콘크리트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수태는 그 파편 속을 우아하게 걸어 다니며,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날아오는 촉수를 노란 인장으로 태워버렸다.
"너무 축축해! 불쾌해! 네놈의 존재 자체가 이 우주의 '오점'이다!"
"먼지... 덩어리... 사라져..."
싸움은 격화되었다. 권태룡 씨의 몸에서 칠흑 같은 녹색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복도 전체가 순식간에 심해의 압력에 짓눌리는 듯했고, 벽에서는 해초와 따개비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수태 역시 몸에서 혼돈스러운 황금색 '오라'를 내뿜었다. 그가 내뿜는 건조한 기운에 해초가 말라비틀어지고, 멀쩡하던 시멘트 벽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빌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울부짖었다! 내 4억 5천이 공중분해되는 소리였다!
"그만두세요!!!"
나는 이자 독촉 전화에 시달리던 모든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여기서 싸우지 마! 이 집 무너지면 나 파산한다고! 내 대출금 어쩔 거냐고, 이 신(神)놈들아!"
내 처절한 절규가 먹힌 걸까. 두 개의 거대한 오라가... 동시에 잦아들었다.
"...쳇!"
"...쳇!"
두 사람이 동시에 혀를 차며,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부서진 벽 파편 속에서 잿가루를 뒤집어쓴 채, 덜덜 떨며 물었다.
"태... 태룡 씨... 저... 저 노란 분은... 대체... 누구죠?"
권태룡 씨가 증오가 가득한 저음으로 으르렁거렸다.
"저놈은..."
"아아! 소개가 늦었군요!"
하수태가 권태룡 씨의 말을 끊고 연극적으로 돌아섰다.
"내 이름... 음... 내 본명은 그쪽 두뇌가 감당하기엔 좀... 벅차니. 그냥 '하수태'라고 부르시죠. 저기 저 축축한 해산물 덩어리는... 불행하게도 제 '이복형제'랍니다."
그때였다. 하수태가 입주하려던 201호의 옆집, 202호 문이 끼익 열렸다. 2층 아줌마가 파마롤을 만 채로 고개만 쏙 내밀었다.
"아이고... 또 '별'들이 싸우네. 시끄러워라."
아줌마는 하수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코를 막았다.
"어우, 쟤는 곰팡내가 더 고약해. 총각, 저런 건 들이는 거 아니야."
쾅. 문이 닫혔다.
하수태는 잠시 모욕감에 부들거렸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며 201호(문짝이 반쯤 부서진)를 가리켰다.
"주인장. 이 방. 제가 쓰겠습니다. 보증금... 대신에 저놈이 날뛰지 못하게 '감시'해 주는 걸로 하죠."
"월세...는..."
"없습니다. 전 가난한 예술가라서요." 나는 멍하니 하수태를 바라봤다. 0원. 0원짜리 세입자. 지금 당장 다음 달 이자 낼 돈도 없는데.
권태룡 씨가 3층에서 나를 쏘아봤다. 그의 후드에서 살벌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꺼져라. 먼지구덩이."
그 말에 하수태의 눈이 샛노랗게 번뜩였다.
"네놈이 감히 이 집주인을 협박하는 거냐, 이 멍청한 해삼아!"
두 사람의 '오라'가 다시 스파크를 튀기며 피어오르려는 것을 본 순간, 내 이성이 끊어졌다.
안 돼. 여기서 2차전이 벌어지면... 내 4억 5천... 내 담보물... 진짜 가루가 된다!
게다가 저 0원짜리 세입자... 눈빛을 보니 여기서 거절했다간 날 먼지로 만들어버릴 게 뻔하다.
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드... 드립니다! 201호! 쓰세요!"
하수태가 의심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이봐, 주인장. 목소리가..."
"쓰시라고요!"
나는 거의 울부짖었다.
"월세는 무슨! 공짜로 쓰세요! 예술 활동... 응원합니다! 하하... 하..."
권태룡 씨는 내 '결정'에 불쾌한 듯 "흥" 소리를 내며, 축축한 냉기를 뿜고 옥탑방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집주인의 권한을 존중한 듯하다
하수태는 만족스럽다는 듯, 박살 난 201호 문짝을 발로 뻥 차서 열고는 곰팡내 나는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1층 현관에서부터 '다곤' 어르신이 무거운 공구 통을 들고 낑낑대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망할 놈의 새... 아니 형제들! 지들 싸움에 늙은이 고생시키는 것도 유분수지!"
다곤 어르신은 2층으로 올라와 처참하게 부서진 벽을 보며 혀를 찼다.
"저 아래 '심연(深淵)'에서 이 '얕은 차원'까지 '차원 복구 장비' 들고 올라오는 게 쉬운 줄 아냐고! 에잉! 집주인 양반! ...아이고, 저 노란 먼지 덩어리는 또 왜 여깄어! 재수 없게!"
나는 440만 원짜리 옥탑방 세입자와, 0원짜리 201호 세입자, 그리고 매번 투덜대며 차원을 넘어 수리하러 오는 관리인(신)을 보며 생각했다.
...나, 이 4억 5천 대출... 갚을 수 있을까?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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