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칠성등 불빛이 파르스름하게 올라오는 가운데,
공명의 혼이 갑자기 이전과 다른, 묘하게 진중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니 조건은··· 사실 걸고 말 것도 없다.”
승룡이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씀이오?”
공명이 한 손을 등 뒤로 넘기며 말했다.
“합일이야, 합일!
니 인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나랑 합쳐지는 것.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만···
너면서 나인 거지.”
승룡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오?”
공명은 피식 웃었다.
“그게 불가능했으면
넌 지금 내 목소리도 못 듣지.
설명 길게 하지 말자. 합쳐지고 나면 다 알게 된다.”
승룡의 마지막 질문
“마지막으로 하나··· 질문해도 되겠소?”
공명이 버럭했다.
“아오 한대 쥐어박고 시작해벌라!
너 그러다 자연사한다?
하나만! 딱 하나만이다. 얼른 해!”
승룡은 숨을 고르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내가 당신과 합일한다 해도···
이 육신은 이미 오래 버티지 못하오.
수명이 몇 일도 안 남았는데, 어찌할 참이오?”
공명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오? 아주 바보는 아니네?
맞아. 방술로는 답 없어.
답이 있었으면 내가 천년전에 이미 했지.”
승룡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어찌하실 작정이오?”
공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참. 당연한 거 아냐?
방술로 안 되면 무공으로 하지.”
승룡은 멍해졌다.
“···공께선 무공을 익힌 적이 없지 않소?
그런 기록은 전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명이 확 성질을 냈다.
“어??
이 자식이···
아픈데 찌르네?
하··· 죽어서도 무공 못 배웠다고 무시를?
갑자기 열 받네.
사원 그 자식을 확—!”
승룡은 깜짝 놀랐다.
“사원이라면··· 봉추 방통을 말하시는 게요?”
공명이 버럭 소리쳤다.
“봉추? 봉황은 무슨!
그 닭대가리 생각만 하면! 진짜!!!”
공명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공명의 어린 시절 – 봉추 사건
공명의 영혼이 씩씩대며 말했다.
“얘기 잘 들어.
방통이랑 나? 원래 인척이었어.
그놈이 나보다 두 살 위 형!
어릴 때 맨날 와서 같이 놀곤했지!”
승룡은 처음 듣는 공명의 비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어릴 때 원래
주유처럼 전장에 서는 책사를 꿈꿨어!
백마 타고 선두에서 지휘하고, 칼도 좀 쓰고
캬~ 멋지지않냐?”
공명은 손으로 허공을 긁으며 울분을 토했다.
“그래서 무공도 배웠어!
근데 어느 날 운기조식하는데
그 닭대가리가 불러도 대답 없다고 뒤통수를 까버린거야!!”
승룡의 눈이 커졌다.
“···운기조식 중 충격을?!”
“그래!!
기혈 다 뒤틀려서 사경을 헤맸지!!
집 근처 의원이 나름 이름 있었으니까 살았지, 안 그랬으면 평생 불구였어!”
공명은 부채를 던질 듯이 흔들었다.
“그 뒤로 내 기혈은 무공 못 쓰는 몸이 됐다.
이게 다!
방! 통! 때문이야!!”
승룡은 할 말을 잃었다.
공명은 한숨을 몰아쉰 뒤, 갑자기 울상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너 촉군 텃세가 얼마나 심한지 아냐?”
승룡이 멍해져 바라보았다.
“내가 지한테 언제 세 번 찾아오라고 했어?
시키지도 앉은짓 하길래 미안해서 따라간 건데...
의형제 놈들은 ‘왜 지들 형 세 번 오게 했냐’고 갈구지,
무공도 못한다고 무시하지,
계책을내도 뭐라 하지,
잘생겻다고 뭐라 하지···”
'어? 마지막껀 오해가...?'
공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장도 안 나가봤다고 뭐라 하고···
주공 그 양반도 그래! 총애를 할라면 좀 눈치껏!
관우 그양반 질투가 얼마나 심한데...
너 임마, 남자 질투는 여자 질투랑 비교가 안 돼!
그 양반 장난아니다 진짜!!”
공명은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승룡은 조용히 말했다.
“많이··· 서러우셨겠구려.”
무공이 약하면 무시당하는 것.
모산파도 겪어온 일이었기에, 승룡은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합일을 결심하다
승룡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소이다.
뭐든지 시작하시오.”
공명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 계약 완료다.”
승룡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머리를 비워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공(空)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다.”
승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
공명이 폭발했다.
“멍때리라고 임마!!!
나..공명이야..좀 우아하게 가자 우아하게
이래서 머리 검은 것들하고는···!”
승룡은 허겁지겁 자세를 고쳤다.
“···아, 알겠소이다.”
승룡이 정신을 비우자
공명의 혼이 천천히 허공에 오행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토굴 위에 다섯 색의 빛이 돌아가며 조화를 이루고,
승룡의 몸은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행이 하나로 합쳐져 태극문양을 만들더니
그 문양이 승룡의 머리 위로 내려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토굴 안이 밝게 번쩍였다.
토굴을 채운 빛이 꺼지자,
승룡은 천천히 눈을 떴다.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삐걱거렸지만,
그의 머릿속은 기묘하게 명료했다.
그 순간이었다.
수십 년간의 모산파 방술,
천 년 전 촉한의 병법과 음양가의 학식,
전장과 외교,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와 책략이
마치 폭풍처럼 그의 의식 안으로 밀어닥쳤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젊은 제갈량이 운기조식 중 머리를 얻어맞고 기혈이 틀어진 장면,
관우의 질투에 시달리던 감정,
방통과의 유년 시절,
촉군에서의 울분과 설움 등이
자기 기억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것이··· 합일.”
목소리는 승룡의 것이었다.
하지만 말투, 생각, 논리, 판단···
모든 것이 예전과 달랐다.
개별된 두 존재는 사라지고,
방술과 병법, 음양과 무예에 능통한
전혀 새로운 한 사람이 깨어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승룡’이라 부를지,
‘공명’이라 부를지조차 모호했다.
아니! 둘 다 아니었다.
새로운 존재.
승룡(承龍)이자 공명(孔明)의 모든 것을 품은 하나의 인격.
그는 맨 먼저 몸의 한계를 느꼈다.
“이 육신···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겠군.”
이 판단도, 이 말투도,
승룡만의 것도 아니고 제갈량만의 것도 아니었다.
합일된 존재만이 가진
냉철하고, 계산적이면서도 정에 약한 특유의 균형감.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자신이 만들었던 ‘팔괘진경’의 구조를 떠올렸다.
“이제야··· 이 심법의 진의를 완성할 수 있겠구나.”
그는 단번에 결단을 내렸다.
몸을 살리고, 반로환동을 이루는 길.
팔괘가 조화되는 경지
그 경로가 머릿속에서 눈처럼 펼쳐졌다.
“시작하자.”
그의 정좌와 함께
팔괘의 기운이 토굴 가득 퍼져 나갔다.
팔괘진경이 완전히 돌아가기 시작하자
토굴 안의 공기가 뒤흔들렸다.
팔괘의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하늘과 땅, 불과 물,
바람과 우레, 산과 연못—
자연의 여덟 이치가 하나로 교차하며
거대한 흐름을 이루었다.
그 기운은 폭포수처럼 승룡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노쇠한 세포가 타오르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재생된 새로운 기가 스며들었다.
순환은 계속되었다.
태우고 재생하고 다시 채우고.
그리고, 순간
토굴 전체가 눈부신 빛으로 차올랐다.
콰아앙!
빛이 폭사하듯 흩어지고
고요가 찾아왔다.
승룡은 천천히 눈을 떴다.
숨을 들이쉬자
몸 깊은 곳에서 새로 태어난 듯한 생기가 끓어올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팔, 손, 얼굴을 어루만졌다.
늙음에 굳고 거칠었던 피부가
봄비 맞은 나무껍질처럼 스르륵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 아래에서—
새하얀, 매끄럽고 탄력이 있는 젊은 피부가 드러났다.
흰 머리는 단 한 올도 남지 않고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숨이 멎은 듯한 침묵.
그러다 승룡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되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가볍고, 심장 박동은 안정적이며,
기운은 강물처럼 또렷했다.
승룡은 광소를 터트렷다.
“하하하하! 내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지?
하늘도 난 못막아!”
놀라움과 자신감,
그리고 미묘한 흥분.
“아차! 애들부터 살리러 가야지.
우리 귀한 일꾼(?)들"
새벽의 찬 기운을 가르며
승룡의 몸이 산문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합일 직후의 힘이 아직 몸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운은 금방 식을 얇은 얼음장 같았다.
“지금 아니면··· 기회를 놓친다.”
폐허가 된 전각을 지나
은자배가 누워 있는 방의 문을 그대로 밀어젖혔다.
쿵—
“누··· 누구시죠!?”
은강이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근맥이 끊긴 다리는 꿈쩍도 하지않았다.
은연은 옆에서 외치다시피 했다.
“여기는 외부인이”
승룡은 한 걸음 들어오며 단 하나만 말했다.
“···시간이 없다.”
휘릭
그의 손끝이 허공을 갈랐다.
찰나였고
거의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툭
은강의 이마 위 혼혈이 살짝 눌렸다.
은강의 눈이 그대로 풀리며 침상 위로 고꾸라졌다.
“아ㄴ..?!”
은백이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휙
이미 이마에 승룡의 손끝이 지나가 있었다.
턱.
은백도 순식간에 잠들었다.
“잠깐···! 누구”
은연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승룡은 한 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미안하구나.
설명은··· 나중이다.”
툭.
은연도 눈을 감는다.
은재, 은호까지
다섯 아이 모두가 한 호흡 안에 침상에 눕혀졌다.
전각 안은 다시 적막해졌다.
단지 아이들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승룡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이다.”
그가 두 손을 벌리자
팔괘진경의 잔여 기운이
빛의 결처럼 끌려 나왔다.
팔괘의 건·태·이·진·손·감·간·곤
여덟 개의 흐름이 전각 안에 흩어져
다섯 아이의 몸으로 동시에 스며들었다.
끊어진 근맥이 이어지고,
말라비틀어진 근육이 되살아나며,
삼 년간 눌린 기혈이 터져나오듯
숨이 깊고 고르게 바뀌었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아이들의 생명이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파직—
파지직—
그 순간, 승룡의 몸을 감싸던 기운이
급격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흡.”
마지막 아이의 근맥이
또렷하게 이어진 것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히듯 가빴다.
승룡은 벽을 짚으며 간신히 서 있었다.
“이게··· 한계군.
팔괘진경은··· 육신으로는 버틸 수 없어.”
팔괘진경은 본래
영혼 상태의 공명이 창안한 조화의경지.
육신이라는 그릇이 생긴 순간
무한한 자연의 기류는
오히려 몸을 찢어버릴 압력으로 변했다.
승룡은 천천히 좌선 자세로 앉았다.
“우선은···내력부터.”
그는 흔들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으로 읊조렸다.
승룡은 팔진심법(八陣心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팰궤심법은 생전 공명이 창안한 심법!
팔괘진경과 달리 육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였다.
부드럽고 온화한 기류가
마치 자연의 기를 한곳으로 모으듯
서서히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승룡의 호흡이 한결 안정되었다.
어깨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후 아쉬울것없지.. 팔궤심법이 극성에만 오르면.."
이윽고 내공을 완벽히 회복한 승룡이 천천히 밖으로 나와 걸었다.
산 중턱 공터에 다다르자,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우수에는 이글거리는 듯한 열양(熱陽)의 기운이,
좌수에는 주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빙한(水寒)지기가 서렸다.
승룡이 가볍게 나무를 향해 손을 털자, 커다란 고목이 ‘샥’ 소리와 함께 깨끗하게 베어져 나갔다.
잘린 단면에는 새하얀 서릿발이 맺혀 있었다.
승룡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양손의 기운을 거두었다.
밤이 짧을 듯했다.
과거 머릿속으로 창안하고 보완한 무공을 재정립하려면...
- 작가의말
팔궤와 팔진의 차이가 나는부분이있어 설정오류 바로잡았네요..하 글 아무나 쓰는거 아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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