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걷고, 건물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쉬었다.
3일째 되는 날, 나는 할리우드에 갔다.
워크 오브 페임을 걸으며 바닥의 별들을 봤다.
마릴린 먼로, 마이클 잭슨, 브루스 리···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몇 장 찍었다.
SNS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냥 내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TCL 차이니즈 시어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여기가 그 유명한 곳이구나.'
영화에서만 보던 장소였다.
4일째, 산타모니카에 갔다.
피어를 걸으며 바다를 봤다.
태평양이었다.
넓고, 푸르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두 끝에 서서 한참을 바다를 바라봤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한국에서는 언제 이런 거 해봤나.'
지난 6년 동안 바다를 본 적이 몇 번이나 됐을까?
회사 워크숍 때 한 번? 아니, 그때도 회의하느라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모래사장에 앉았다.
사람들이 서핑을 하고 있었다. 비치발리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자유로워 보였다.
'나도 이제 저렇게 살면 되는 건가.'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해가 지는 걸 봤다.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아름다웠다.
'예쁘다···'
중얼거렸다.
언제 이런 노을을 본 적이 있었나.
회사 다닐 때는 노을을 볼 시간이 없었다. 퇴근하면 이미 깜깜했으니까.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나는 일어났다.
프롬나드를 걸으며 저녁을 먹었다.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랍스터를 시켰다.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내가 나를 위해 돈을 쓸 때였다.
랍스터는 맛있었다.
한국에서는 먹어본 적 없는 맛이었다.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매일 다른 곳을 갔다.
베니스 비치, 게티 센터, 그리피스 천문대, 더 브로드 미술관···
특히 게티 센터는 인상적이었다.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현대 건축의 걸작.
흰색 석회암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한 건물 한 건물 천천히 둘러봤다.
곡선과 직선의 조화, 빛과 그림자의 대비, 공간의 흐름···
'이거야, 이게 건축이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왜 건축을 좋아했는지,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떠올랐다.
미술관 정원에 앉아 LA 시내를 내려다봤다.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답다.'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 지금 행복하네.'
지난 7년 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행복.
단순하지만 소중한 감정.
눈가가 뜨거워졌다.
울컥했다.
'내가 왜 우냐···'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불행했으니까.
너무 오랫동안 나를 죽이고 살았으니까.
이제 겨우 살아난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
저녁.
나는 코리아타운에 있었다.
일주일 만에 한식이 먹고 싶어졌다.
'한양 갈비'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친근한 한국어가 반가웠다.
"갈비랑 찌개 하나 주세요."
"네, 잠시만요!"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옆 테이블에서 한국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형님, 오늘 파워볼 얼마예요?"
"15억 달러래. 역대 최고액이라던데."
"헐, 미친··· 15억 달러면 한화로 얼마야, 2조 원?"
"맞아. 당첨되면 한국 가서 건물이나 몇 채 사야지."
"하하, 형님도 꿈 크시네. 근데 저거 당첨 확률이 얼마예요?"
"3억 분의 1? 뭐 그 정도였나? 하여간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대."
"그래도 꿈은 공짜잖아요. 나도 하나 사볼까?"
파워볼. 미국의 상징적인 복권이었다. 45개 주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이 복권은 종종 수억 달러의 잭팟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곤 했다. 당첨 확률은 3억 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이 오히려 사람들의 꿈을 자극했다.
평범한 주유소 직원이 하루아침에 억만장자가 되고, 빚에 허덕이던 가정이 단번에 완전한 재정적 자유와 해방을 얻는 이야기들. 그런 극적인 인생역전의 순간들이 파워볼을 단순한 도박이 아닌, 아메리칸 드림의 또 다른 이름으로 만들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먹으면서 계속 옆 테이블의 대화가 들렸다.
"15억 달러면 뭐 하고 싶으세요?"
"나? 말했잖아. 갓물주 해야지. 서울 강남에 빌딩 하나 사고, 제주도에 펜션 하나 짓고···"
"하하, 저는 그냥 평생 놀고 싶어요. 일하기 진짜 싫거든요."
공감이 갔다.
나도 일하기 싫었다. 정확히는, 챗바퀴 돌듯이 무의미한 일을 하기 싫었다.
음식이 나왔다. 갈비를 한 점 집어 먹었다. 고소한 기름이 입안에 퍼졌다.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한 숟가락 떠먹으니 속이 든든해졌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으니 입이 터졌다.
나는 밥 한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했다.
밖으로 나오니 어둑어둑했다.
거리를 걸으며 아까 식당에서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파워볼··· 한번 사볼까?'
어차피 꿈은 공짜라고 했다.
3달러, 한화로 4,000원 정도면 살 수 있으니까.
담배 한 갑 가격도 안되는 거다.
'뭐, 재미로 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
근처에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들어갔다.
문 여는 소리가 울렸다.
"복권 있나요."
점원이 웃으며 용지를 건넸다.
"직접 고르실 건가요, 아니면 자동으로 할까요?"
"직접 고를게요."
나는 용지를 들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1부터 69까지의 숫자가 빼곡했다. 여기서 5개를 골라야 했다.
펜을 들었다.
'몇 번을 고르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내 인생에서 나름 의미 있는 숫자들을 선택하기로 했다.
먼저 떠오른 건 내 나이.
32.
서른두 살.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나이.
이 숫자를 먼저 마킹했다.
그 다음은...
6.
회사에서 일한 년수. 6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
이것도 선택했다.
32와 6..
세 번째 숫자를 고민했다.
'퇴사일이 10월 31일이었지...'
10과 31을 더하면 41.
'41로 하자.'
32, 6, 41.
네 번째.
'미국에 온 게 11월 7일...'
11과 7을 더하면 18.
'18이네.'
32, 6, 41, 18.
마지막 하나.
'그냥... 3으로 하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좋아하는 숫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왠지 3이라는 숫자가 좋았다.
32, 6, 41, 18, 3.
다섯 개 완성.
이제 파워볼 숫자.
1부터 26까지 중에 하나.
'뭘로 하지...'
문득 건축학과를 졸업했던 날이 떠올랐다.
20XX년 2월 13일.
'13.'
서양에서는 불길한 숫자라고 하지만, 나한테는 새로운 시작이었던 날.
'13으로 하자.'
32 - 6 - 41 - 18 - 3, Powerball: 13
완성됐다.
카운터로 갔다.
"다 고르셨어요?"
"네."
용지를 건넸다.
점원이 기계에 넣었다.
찌익찍직.
복권이 나왔다.
"3달러입니다."
3달러를 냈다.
"행운을 빌어요!"
"감사합니다."
복권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작은 종이.
거기 내 인생의 조각들이 숫자로 박혀있었다.
3 - 6 - 18 - 32 - 41, Powerball: 13
'당첨되면 웃기겠네.'
피식 웃으며 편의점을 나왔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복권을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당첨되면 재미있겠지.'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다.
진지하게 당첨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3억 분의 1의 확률이라고 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냥, 꿈을 사는 것.
3달러짜리 작은 꿈.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보였다.
LA 시내라서 많지는 않았지만, 몇 개는 보였다.
'저 별 중 하나가 나한테 오면 재미있겠네.'
웃으며 걸었다.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복권은 지갑에 넣어뒀다.
내일이면 추첨이 된다.
'당첨되면 뭐 할까?'
상상을 해봤다.
건축사무소를 차릴까?
아니면 그냥 평생 여행이나 다닐까?
'에이, 무슨 상상을···'
스스로 비웃었다.
당첨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상은 즐거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나는 오전 10시쯤 일어났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다.
뉴스 알림이 떠 있었다.
"파워볼 잭팟 추첨 오늘 밤"
'아, 오늘 추첨이구나.'
어젯밤 복권을 샀던 게 생각났다.
별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다른 뉴스들을 봤다. LA 날씨, 할리우드 소식, 스포츠 뉴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평소처럼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점심을 먹고, 거리를 걸었다.
저녁이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켰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유튜브를 보고,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아, 복권 결과 나왔나?'
검색창에 파워볼 결과를 쳤다.
첫 번째 링크를 클릭했다.
페이지가 로딩됐다.
그리고 당첨 번호가 보였다.
3 - 6 - 18 - 32 - 41, Powerball: 13
"...응?"
눈을 의심했다.
다시 봤다.
여전히 똑같았다.
3 - 6 - 18 - 32 - 41, Powerball: 13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갑을 뒤졌다.
복권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숫자를 확인했다.
3 - 6 - 18 - 32 - 41, Powerball: 13
똑같았다.
완전히 똑같았다.
"뭐야···"
중얼거렸다.
노트북 화면을 다시 봤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아니었다.
한 번 더 확인했다.
여전히 똑같았다.
"이게··· 진짜야?"
손이 떨렸다.
복권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숫자를 한 개씩 확인했다.
3. 맞다.
6. 맞다.
18. 맞다.
32. 맞다.
41. 맞다.
파워볼 13. 맞다.
전부 맞았다.
"하···"
실실거리며 웃음인지 울음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나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15억 달러···'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진짜 미쳤네···"
혼잣말이 나왔다.
다시 복권을 봤다.
작은 종이 한 장.
3달러짜리 종이.
그게 2조 원이 되었다.
현실 같지 않았다.
꿈 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복권은 내 손에 있었고, 숫자는 정확히 일치했다.
"진짜네··· 진짜 맞았네···"
계속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침착해야 했다.
심호흡을 했다.
'좋아, 침착하자. 침착하게···'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인터넷을 검색했다.
'파워볼 당첨 후 할 일'
수많은 기사가 나왔다.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파워볼에 관해 찾아보다가 문득 창밖을 봤다.
LA의 밤이었다.
별이 보였다.
어젯밤 올려다봤던 그 별들.
그 중 하나가 정말로 내게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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