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김 변호사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조언은 이렇습니다. 일단 미국에서 LLC나 법인을 설립하시고, 그 법인 명의로 당첨금을 수령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 신원 보호에도 도움이 되고, 세금 관리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법인 설립이요?"
"네. 복권 당첨자의 신원은 공개되는 주가 많습니다. 캘리포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법인 명의로 수령하면, 법인 이름만 공개되고 개인 정보는 보호됩니다."
이해가 됐다.
"법인 설립에 얼마나 걸리나요?"
"빠르면 일주일, 보통은 2주 정도 소요됩니다. 저희가 전담해서 진행해드릴 수 있습니다."
"비용은 얼마나 되죠?"
"법인 설립 비용은 약 5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사이입니다. 그리고 저희 법률 자문 비용은 시간당 500달러입니다. 복권 수령 전체 과정을 맡아드리면 총 3만 달러에서 5만 달러 정도 예상됩니다."
비싼 금액이었다.
하지만 당첨금액을 생각하면 5만 달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진행해주세요."
김 변호사가 미소를 지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단계별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는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우선 법인 설립. 법인명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음···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요."
"혹시 어떤 직종에 종사하고 계신가요?"
"전에는 건설사에서 일했습니다. 건축학 전공입니다."
"그럼 건축 관련 이름은 어떠세요? 나중에 사업을 하시더라도 자연스럽습니다."
"좋네요. 그럼··· 산 아키텍쳐 그룹."
내 이름을 땄다. 산. 한국어로는 산이지만, 영어로는 San이었다.
"산 아키텍쳐 그룹 LLC. 괜찮습니다. 이 이름으로 등록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재무설계사 섭외. 이 금액을 관리하려면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좋은 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복권 수령 절차도 중요합니다. 캘리포니아 복권 관리소는 새크라멘토에 있습니다. 직접 방문하셔야 합니다. 예약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언제쯤 가능한가요?"
"법인 설립이 완료되는 대로 바로 가능합니다. 2주 후쯤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김 변호사가 서류 몇 장을 꺼냈다.
"여기 서명해주시면, 저희가 대리인으로서 법인 설립과 복권 수령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김 변호사가 서류 뭉치를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서류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계약서는 생각보다 두꺼웠다. 20페이지가 넘었다.
법률 용어가 빼곡했다. 건축 용어는 익숙했지만, 법률 용어는 달랐다.
하지만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계약 기간 부터 복권 수령 완료 시까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다.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계약서에는 명확한 출구 조항이 있었다.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그때까지 발생한 비용만 지불하면 됐다.
'좋아. 하자.'
나는 펜을 들었다.
손이 약간 떨렸다.
인생을 바꿀 서명이었다.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이름을 썼다.
최산.
날짜를 적고, 다시 한 번 서명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저희가 최산 님의 대리인이 되겠습니다."
김 변호사가 계약서를 챙기며 악수를 청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모든 절차를 안전하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악수를 나누는 순간,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그날 저녁, 나는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김 변호사가 보낸 이메일이 와있었다.
법인 설립에 필요한 서류들과, 앞으로의 일정표였다.
일정:
- 법인 서류 작성 시작
- 법인 등록 완료 예정
- 캘리포니아 복권 관리소 방문 예약
- 당첨금 수령
한 달도 안 남았다.
'한 달 뒤면 내 계좌에 6억 4,050만 달러가 들어온다는 거네.'
상상이 안 됐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6억 4,050만 달러로 뭘 할까?'
건축사무소를 차릴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빌딩을 살 수도 있었다.
평생 여행만 다닐 수도 있었다.
뭐든 할 수 있었다.
선택지가 무한했다.
'천천히 생각하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이제 시간은 내 편이었다.
***
다음 2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김 변호사와 수시로 연락하며 서류를 주고받았다.
법인 등록에 필요한 각종 서류들.
사업자등록증, 세금 관련 서류, 은행 계좌 개설 서류···
복잡했지만, 김 변호사가 하나하나 설명해줘서 어렵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LA를 계속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달랐다.
'이 도시에서 건물을 사볼까?'
다운타운을 걸으며 상가 건물들을 봤다.
특히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의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르데코 양식의 오래된 건물들과 현대적인 고층 빌딩이 공존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저 빌딩은 얼마일까?'
가격을 검색해봤다.
다운타운의 중형 오피스 빌딩은 보통 5천만 달러에서 1억 달러 사이였다.
'6억 4,050만 달러면 저런 거 서너 채는 살 수 있겠네.'
부동산 앱을 다운받아 매물들을 둘러봤다.
LA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뉴욕의 매물들도 봤다.
'재밌네.'
건축을 전공한 내게는 건물을 보는 게 취미였다.
이제는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 재밌어졌다.
***
김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산 님, 좋은 소식입니다. 산 아키텍쳐 그룹 LLC 등록이 완료됐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법인 명의로 복권을 수령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복권 관리소 예약은 XX월 XX일 오전 10시로 잡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새크라멘토까지 함께 가시죠."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달력을 봤다.
나흘 후였다.
'드디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날짜가 정해지니 실감이 났다.
나흘 후면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
당첨금 수령일 당일.
나는 김 변호사의 링컨 차를 타고 새크라멘토로 향했다.
LA에서 새크라멘토까지는 차로 약 6시간 거리였다.
"긴장되시죠?"
김 변호사가 물었다.
"네, 조금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절차는 간단합니다. 복권을 제출하고, 신원 확인하고, 수령 방식을 선택하면 끝입니다."
"사진 찍는다던데요."
"네, 복권 관리소에서 당첨자 사진을 찍습니다. 보통은 큰 복권 패널을 들고 웃는 사진이죠. 하지만 최산 님은 법인 명의로 수령하시니까, 개인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을 겁니다."
안도가 됐다.
당첨 사실이 알려지면 골치 아플 게 뻔했다.
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렸다.
5번 고속도로를 타고 쭉쭉 뻗은 길을 달렸다.
캘리포니아의 풍경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LA 시내를 벗어나자 풍경이 바뀌었다. 건조한 갈색 언덕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끔 보이는 풍력 발전기들이 천천히 돌아갔다.
'캘리포니아가 이렇게 넓구나.'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서울의 답답한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고속도로를 달리며 6억 달러를 받으러 가고 있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어.'
몇 시간 후, 새크라멘토에 도착했다.
캘리포니아 주청사 건물이 보였다. 고전적인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복권 관리소는 저기입니다."
김 변호사가 건물을 가리켰다.
주차를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California State Lottery]
간판이 붙어있었다.
리셉션에 다가갔다.
"예약하고 온 최산입니다."
"신분증 보여주시겠어요?"
여권을 내밀었다.
확인을 마친 직원이 말했다.
"3층으로 올라가세요. 당첨금 수령 창구입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이었다.
몇 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한 직원이 우리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당첨 복권을 가져오셨나요?"
"네."
지갑에서 복권을 꺼냈다.
직원이 복권을 받아 자세히 살펴봤다.
형광등 아래에서 복권을 비춰보고, 뒷면의 서명을 확인했다.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했다.
키보드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숫자를 하나하나 대조했다.
기계에 복권을 넣어 스캔했다.
띠리링.
기계음이 울렸다.
직원이 화면을 확인하고, 동료 직원을 불렀다.
"책임자님, 확인 부탁드립니다."
중년의 여성 직원이 다가왔다. 안경을 쓴 책임자였다.
그녀도 똑같은 절차를 반복했다.
복권 확인, 컴퓨터 입력, 숫자 대조, 스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됐습니다."
책임자가 나를 바라봤다.
"15억 달러 파워볼 잭팟 당첨자이십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공식적인 확인이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담당자의 입에서 직접 듣는 순간은 달랐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수령 방식을 선택해주세요. 일시불 혹은 30년 연금."
"일시불로 하겠습니다."
"일시불 선택 시, 현금 가치는 9억 1,500만 달러입니다. 여기서 연방세 30%가 원천징수되어, 최종 수령액은 6억 4,050만 달러입니다."
'6억 4,050만 달러.'
예상했던 금액이었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실감이 났다.
김 변호사가 작게 속삭였다.
"외국인 세율이 적용돼서 생각보다 깔끔합니다."
책임자가 두꺼운 서류 뭉치를 건넸다.
"여기 서명해주세요. 총 15군데입니다."
나는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읽었다.
수령 확인서, 세금 동의서, 개인정보 처리 동의서...
한 곳씩 서명했다.
최산. 최산. 최산.
열다섯 번째 서명을 마쳤다.
"법인 명의로 수령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법인 서류를 제출해주세요."
김 변호사가 준비한 서류를 건넸다.
산 아키텍쳐 그룹 LLC 등록 서류, 세금 관련 서류, 은행 계좌 정보...
책임자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다.
도장을 찍고, 컴퓨터에 입력하고, 서류를 스캔했다.
"정상처리 되었습니다. 입금은 영업일 기준 5일에서 7일 이내에 완료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진 촬영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옆방으로 안내받았다.
문을 열자, 작은 스튜디오가 나왔다.
조명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캘리포니아 복권 로고가 붙어있었다.
중앙에 거대한 복권 패널이 세워져 있었다.
[$1.5 BILLION POWERBALL WINNER]
금색 글씨가 반짝였다.
15억 달러.
숫자로 보니 더 크게 느껴졌다.
사진사가 카메라를 준비하고 있었다.
"법인 대표로서 사진을 찍겠습니다. 패널 옆에 서주세요."
나는 패널 옆으로 걸어갔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준비되셨나요?"
"네."
"하나, 둘, 셋!"
플래시가 터졌다.
순간 눈이 부셨다.
"좋습니다. 한 장 더요. 이번엔 패널을 손으로 가리켜주세요."
나는 패널의 $1.5 BILLION 글씨를 손으로 가리켰다.
플래시가 다시 터졌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번엔 자연스럽게 웃어주세요."
웃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김 변호사가 옆에서 말했다.
"최산 님, 지금 이 순간을 즐기세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순간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진심으로 웃었다.
마지막으로 플래시가 터졌다.
"축하드립니다, 최산 님. 이제 공식적으로 억만장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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