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입금 확인 문자가 도착한 건 새크라멘토에서 돌아온 지 6일째 되던 날 아침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무심코 핸드폰을 켰을 때, 은행 앱의 알림이 떠 있었다.
[Wire Transfer Received: $640,500,000.00]
6억 4,050만 달러.
숫자가 너무 커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진짜네.'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계좌를 열어봤다.
산 아키텍쳐 그룹 LLC 명의의 법인 계좌.
$640,500,000.00
쉼표가 몇 개인지, 0이 몇 개인지 세어봤다.
한화로 환산하면... 약 9,351억 원.
'이게 내 돈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제까지 60달러짜리 에어비앤비에서 잤고, 오늘도 똑같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밖 풍경도 똑같았다. LA의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나는 여전히 나였다.
'하지만 모든 게 달라졌다.'
숫자가 바뀐 것뿐인데,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자유란 이런 것일까. 선택의 무게가 사라지고, 가능성만 남은 상태. 어깨를 짓누르는 책무에서 벗어나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삶.
배가 고파왔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청바지에 티셔츠.
평소처럼 가볍게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
숙소 근처 카페.
익숙한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리스타가 인사를 건넸다.
"오, 또 오셨네요. 오늘도 카푸치노?"
"네."
"5달러입니다."
카드를 내밀었다.
개인 카드였다. 법인 카드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
커피를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
거리를 바라봤다.
조깅하는 사람들, 출근하는 사람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6억 달러가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삶의 방식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생각하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맛있었다.
***
점심때가 되었다.
오늘은 조금 다른 곳에 가보기로 했다.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샹브르 누아르 (Chambre Noir)
라 브레아 애비뉴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1920년대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높은 천장과 넓은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예약 없이 갔지만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테이블 하나 가능한가요?"
"몇 분이세요?"
"혼자요."
"이쪽으로 오세요."
창가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메뉴판을 펼쳤다.
프렌치 요리들이 빼곡했다.
가격은... 애피타이저가 18달러부터, 메인이 38달러부터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런치 코스로 주세요."
"좋은 선택입니다. 음료는요?"
"물이요."
웨이터가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가져갔다.
잠시 후 첫 번째 요리가 나왔다.
아뮤즈 부슈.
작은 한 입 크기의 음식이었다. 염소 치즈 무스 위에 비트 칩이 올라가 있었다.
입에 넣자 부드러운 치즈의 풍미와 바삭한 비트의 식감이 조화를 이뤘다.
'맛있네.'
천천히 씹으며 음미했다.
두 번째는 애피타이저.
훈제 연어와 아보카도 샐러드.
신선한 채소 위에 얇게 슬라이스된 연어가 장미꽃처럼 말려 올라가 있었다.
레몬 드레싱이 곁들여져 있었다.
포크로 한 입 떠먹었다.
연어의 부드러움, 아보카도의 크리미함, 레몬의 상큼함.
'이런 게 미슐랭 요리구나.'
회사 다닐 때는 점심을 10분 안에 해치웠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김밥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 넉넉했다. 급할 것도 없었다.
한 입 한 입 천천히 먹으며 맛을 느꼈다.
메인 요리는 오리 콩피.
바삭하게 구운 오리 다리와 감자 퓌레, 그리고 오렌지 소스.
나이프로 오리 고기를 자르자 육즙이 배어나왔다.
한 입 베어물었다.
'와.'
입안에서 녹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다. 오렌지 소스의 새콤달콤함이 오리의 느끼함을 잡아줬다.
'이래서 미슐랭이구나.'
디저트는 크렘 브륄레.
표면은 캐러멜처럼 단단하게 구워져 있었고, 안은 부드러운 커스터드였다.
스푼으로 표면을 톡 깨뜨렸다.
딱.
소리가 경쾌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바닐라 향이 입안에 퍼졌다.
'행복하다.'
혼자 중얼거렸다.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 것.
이런 사치가 가능한 삶.
계산서가 나왔다.
총 95달러.
팁 포함하면 약 115달러.
한화로 약 17만 원 정도였다.
예전의 내 하루 식비가 2만 정도였다.
이제는 점심 한 끼에 17만 원을 쓸 수 있었다.
'식비에 돈을 많이 쓰면 이상하게 죄책감을 느끼던 때도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레스토랑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배가 불렀다.
마음도 편안했다.
***
오후, 나는 LA의 건축물을 체계적으로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대로 공부하면서 보고 싶어졌다.
노트와 펜을 챙겼다.
카메라도 가져갔다.
첫 번째 목적지는 게티 센터.
전에도 한 번 갔었지만, 이번엔 다르게 볼 생각이었다.
우버를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퓨니큘러를 타고 정상에 도착했다.
흰색 석회암 건물들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리처드 마이어의 걸작.'
건물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했고, 1997년에 완공됐다. 현대 모더니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이탈리아 트라버틴 석회암과 알루미늄 패널, 유리를 주요 재료로 사용했다.
흰색 석회암이 LA의 강렬한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건물의 입체감을 극대화시켰다. 마이어 특유의 기하학적 구성이 돋보였다.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며 리듬감을 만들어냈다.
'역시 마이어다워.'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건물을 천천히 걸으며 관찰했다.
곡선과 직선의 조화.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한 설계.
각 건물이 언덕의 지형을 따라 배치된 방식.
'이게 진짜 건축이지.'
중앙 정원에 앉아 스케치를 했다.
건물의 외곽선, 창문의 패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각도.
한참을 그리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
다음 목적지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다운타운에 있는 프랭크 게리의 대표작이었다.
우버에서 내리자마자 압도됐다.
'와.'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외벽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곡선들이 자유롭게 흘러내리는 듯한 형태.
해체주의 건축의 정수였다.
건물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각도를 바꿔가며 봤다.
각도에 따라 건물의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어떤 각도에서는 배의 돛처럼 보였고, 어떤 각도에서는 꽃잎처럼 보였다.
'이런 걸 설계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입구로 들어가 로비를 봤다.
내부는 외부와 달리 따뜻한 나무 재질로 되어 있었다.
더글러스 퍼 목재가 벽과 천장을 감싸고 있었다.
'외부는 차갑고 날카롭지만, 내부는 따뜻하고 부드럽네.'
대조가 인상적이었다.
콘서트 홀 내부도 들어가 봤다.
객석은 포도밭 스타일로 배치되어 있었다. 관객들이 무대를 둘러싸는 형태.
음향을 위해 설계된 곡면 패널들이 천장과 벽면에 붙어있었다.
'완벽하다.'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건축가의 작품이었다.
기능과 예술의 조화.
밖으로 나와 다시 한번 건물을 올려다봤다.
'언젠가 나도 이런 건물을 설계하고 싶다.'
그 꿈이 다시 선명해졌다.
회사 다닐 때 포기했던 꿈.
이제는 다시 꿀 수 있었다.
돈이 있으니까.
시간이 있으니까.
자유가 있으니까.
마지막 목적지는 더 브로드 미술관.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2015년에 완공된 현대 미술관.
외벽이 특이했다. 흰색 허니컴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마치 베일을 두른 것 같았다.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의 작품이구나.'
입구로 들어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천장에서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클루스 디자인.'
천장의 개구부를 통해 들어온 빛이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미술 작품들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프 쿤스...
현대 미술의 거장들.
하지만 내 눈은 자꾸 건축에 갔다.
공간의 흐름, 빛의 활용, 동선의 설계.
'이래서 건축을 좋아했지.'
미술관 카페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오늘 본 걸작들에 대해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옆 테이블에 젊은 학생들이 앉았다.
스케치북과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건축학과 학생들 같았다.
"이 건물 정말 대단하지 않아?"
"응, 특히 저 베일 구조. 구조적으로도 복잡할 텐데."
"디테일이 장난 아니야. 하나하나 다 계산된 거 같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저랬었다.
건축물을 보면 신나서 떠들고, 스케치하고, 사진 찍고.
"실례지만..."
한 여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혹시 건축 전공이세요? 아까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도 봤거든요. 엄청 집중해서 보시길래."
"아, 네. 건축학 전공했습니다."
"어디서 일하세요?"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저희는 USC 건축학과 학생들이에요. 오늘 LA 현대 건축 투어 과제로 나왔거든요."
"USC라, 좋은 학교 다니시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저희 설명 좀 들어보실래요? 교수님이 각 건물마다 발표를 준비하라고 하셨거든요. 피드백 받고 싶어서요."
재밌어 보였다.
"그러죠."
학생들이 자리를 옮겨 내 테이블로 왔다.
세 명이었다. 두 명의 남학생과 한 명의 여학생.
"저는 에이바. 이쪽은 제인슨이랑 마커스에요.
"최산입니다."
"샌? 한국 분이세요?"
"네."
"우와, 대박! 저희 K-pop 진짜 좋아해요. 그리고 한국 드라마도 완전 빠져서 보는데."
에이바가 신나서 말했다.
"아, 네. 그러시군요."
"한국 정말 멋있어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그들의 반응이 순수해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속으로는 약간 씁쓸했다. K-pop과 드라마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한국의 건축은... 내세울 만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인 건축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제이슨이 노트를 펼쳤다.
"자, 그럼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부터 설명할게요. 프랭크 게리의 작품인데요..."
그는 열심히 설명했다.
건물의 형태, 재료, 구조, 의미...
기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오류도 있었다.
"잠깐만요."
내가 끼어들었다.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이 총 12,000개라고 했는데, 정확히는 6,500개 정도입니다. 그리고 각 패널은 컴퓨터로 계산되어 제작됐는데, 같은 모양의 패널이 하나도 없어요."
"어, 정말요?"
"네. 프랭크 게리는 CATIA라는 항공우주 산업용 3D 모델링 소프트웨어를 건축에 도입한 선구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복잡한 곡면 구조를 실현할 수 있었죠."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교수님이세요?"
"아뇨, 그냥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대박. 저희보다 훨씬 많이 아시는데요?"
에이바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럼 이것도 봐주실래요? 제가 그린 디즈니 홀 단면도인데..."
스케치를 봤다.
꽤 잘 그렸다.
하지만 몇 가지 디테일이 빠져있었다.
"여기, 음향 반사판 부분이 조금 더 복잡해요. 각 패널의 각도가 다 달라서..."
나는 펜을 빌려 스케치 위에 수정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각도를 조절해서 음향을 분산시키는 거죠."
"오..."
학생들이 감탄했다.
한 시간 정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건축 이야기, 학교 이야기, 진로 이야기.
즐거웠다.
이런 대화를 나눈 게 얼마 만인가.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어요."
"저야말로 즐거웠습니다."
"혹시 연락처 주실 수 있나요? 나중에 또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죠."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학생들이 떠나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가르치는 것도 재밌네.'
건축을 설명하고, 지식을 나누는 것.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해보고 싶었다.
***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 본 건축물들의 사진을 정리하고, 메모를 타이핑했다.
스케치북을 펼쳐 오늘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그렸다.
디즈니 콘서트 홀의 곡선.
펜으로 하나하나 선을 그어나갔다.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김 변호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재무설계사 미팅 일정 잡았습니다. 목요일 오후 2시, 저희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목요일이라.'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뭘 해야 하지.'
6억 4,050만 달러.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건축사무소를 차릴까?'
그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디에?
미국에서? 한국에서?
미국에서 차리려면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사업 비자를 받아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건 또 다른 고민이었다.
'천천히 생각하자.'
아직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재무설계사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김 변호사와도 더 상의해보고.
그러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내 인생이 정말 바뀌었네.'
몇 주 전만 해도 회사에서 야근하던 내가, 지금은 LA에서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었다.
'내일은 뭘 할까?'
더 많은 건축물을 보러 다닐까.
아니면 그냥 쉴까.
뭘 해도 좋았다.
선택은 내 것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게 답인 것 같았다.
돈에 매이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것.
'그게 진짜 부자 아닐까.'
6억 달러가 있어서 부자가 아니라, 자유가 있어서 부자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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