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피차간에
하루 아침에 전화위복이었다.
상황은 전혀 안 바뀌었는데도 말이다. 바뀐 것은
'그 귀공자가 세자였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뿐.
신랑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그 놀라움과 기쁨이란! 하인현은 혼례식 내내 꿈을 꾸는 듯 했다.
***
하지만 막상 합궁을 기다리며 방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점점 당혹스러워졌다.
'아! 제발! 땀이라도 나지 말았으면!'
날씨가 더워서 나는 땀이 아니다. 초여름이지만 시원한 밤이니까.
심리적 요인 때문에 나는 땀이다. 매우 민망한 땀!
'왜 안 오시지?'
하다가
'혹 내가 싫어 안 오시나?'
하는 당혹스러운 깨달음에 겨드랑이에 땀이 나고, 겨땀 때문에 더 당혹스럽고..가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져있다.
***
하인현같은 상황이면 누구나 이러지 않을까?
짝사랑과 맺어지는 것까지는 좋겠지만, 짝사랑을 인지한 후에는 그쪽과 아주 간단한 대화조차 나눠본 적 없는데, 곧바로 신혼 첫날밤을 치러야 한다면?
게다가 그쪽은 이쪽을 안 좋아할 만한 상황이라면? 아니, 이쪽을 싫어하는 게 확실하다면?
만회할 기회는 커녕, 점점 흥건해지는 겨땀 때문에 그쪽이 이쪽을 혐오하기까지 할 것 같다면?
***
'큰일났다! 땀이 두피로까지 가고 있어!'
조선 시대 세자빈은 가채 때문에, 머리에 열이나 땀이 나기 시작하면 가라앉히기 더 힘들다. 안 그래도 머리카락이 긴데, 남의 머리카락까지 더 얹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아직 세자가 들어와 옷고름을 풀어주기 전이라, 궁중 혼례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정장의 끝인 옷답게 겹겹이어서, 땀이 식는 걸 옷이 한층 더 차단해버린 셈이다.
***
세자는 땀에 절어 꼬질꼬질한 모습에 더 싫어질 것이고, 이러다가는 땀 냄새까지 확 끼치게 될 것 같다.
'안 그래도 첫 만남 때 용모 지적받았는데!'
진퇴양난이다. 머리에 쓴 것들이라도 벗고 싶은데, 세자가 또 멋대로라며 더 싫어할 것 같아 못 벗겠다.
여러명의 궁녀가 정성껏 얹어준 것이라, 혼자 재빨리 다시 쓸 수는 없을 것 같고.
***
이날 밤, 세자는 세자대로, 세자빈은 세자빈대로, 모냥 빠지는 생리 현상 때문에 민망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세자빈 쪽은 의학에 대해서 많이 알았지만, 오늘밤은 별로 도움이 안 되었다.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혈자리들을 눌러보고는 있지만, 땀도 마음도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는 상황이다.
세자가 너무 오랫동안 안 들어오고 있으니까!
'역시 내가 싫으신 거야!'
***
전화위복이 다시 전복위화가 되어가고 있다.
'아!! 나는 내일부터 최소 평생 독수공방인 건가?!'
짝사랑남과 맺어졌는데, 짝사랑남에게 평생 가까이 갈 수 없다니! 그것도 그가 거부하기 때문에!
심지어 어머니가 그리 염려하시던
'궁중 여인으로서의 소박'
까지 당할 수도 있다.
폐세자빈은 면한다 해도, 말 뿐인 중전이 된 후,
'결국 폐비가 되어버리겠지.'
궁 밖에 내쳐진 후, 그 집 안에 갇혀 사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 되면, 나는 먼 발치에서도 장차 전하를 볼 수 없는 거잖아!'
하인현은 땀을 가라앉히긴 커녕, 눈물까지 나려 했다.
'나는 그런 슬픔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오늘은..
'진정 오늘마저도 거부하시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안 오시지?'
***
조선 세자의 혼례날 합궁은 국가 공식 절차다. 심지어 상궁들에게 합궁 교육을 받고, 합궁 때에도 상궁들이 밖에서 감시, 지도하기까지 하는.
하인현은 이 교육을 받을 때 싫은 티가 났었다.
'첫날밤을 남이 지켜보겠다는데, 그것도 간섭하면서 지켜보겠다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첫날밤을 글로 배운 사람이 가르치는 거잖아.'
예전에 합궁 교육 얘기를 들었을 때 한 생각이다.
웃겼다. 정작 상궁 자신은 그런 경험이 있으면 큰일나는 사람이니 말이다. 아이러니하잖은가?
물론 억지로 끌려왔을 땐, 본인 일이라 전혀 웃기지 않았지만.
***
'그래도 낭군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최선을 다할 텐데.'
라고 생각한 게 불과 어젯밤이다.
기꺼이 그럴 마음이 된 오늘밤에는, 정작 낭군님이 안 오시고 있고.
떨쳐내려 해도, 낭군님이 오늘도 안 오시고, 내일도 안 오시고, 모레도 안 오시고, 평생 안 오실 거 같은 불길한 예감에 자꾸만 빠져든다.
하인현은 품 속의 투명옥 노리개를 옷 위로 느껴보았다. 혼례복을 입고 있어서 꺼내기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이미 아까 꺼내서 손에 쥐고 있었을 것이다.
***
투명옥이라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희귀 보석을 노리개로 지닐 수 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인덕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 어사였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이가 선물한 것.
부모님은 금지옥엽 하인현에게 이 노리개를 주었다. 노리개나 장신구에 큰 관심이 없는 아이가 계속 감탄하니 준 것이다.
"와! 세상에 이런 보석이 있었어요?"
"그러게! 참 신기하구나!"
딸이 2개의 투명옥을 각각 양손에 올려놓고 외친다.
"보세요! 빛이 보석 밑에 모였어요!"
"그러게! 참 예쁘구나!"
딸내미가 투명옥 1개를 한쪽 눈 앞에 들고, 다른 쪽 눈을 감고 들여다보며, 탄성을 내지른다.
"투명옥! 이름도 딱이네요! 빛이 통과해요! 건너편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이리 저리 갖고 놀며 계속 감탄하니,
"여보! 우리 인현이 생일 선물로, 투명옥으로 노리개를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어요?"
"좋은 생각이오!"
이렇게 되어, 투명옥 2개를 매단 노리개가 하인현의 품속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
당연히 이 노리개는 하인현의 보물 1호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투명옥 중 1개가 분실되어버렸지만.
하인현은 감히 부모님께 1개는 잃어버렸다고 말씀 못 드렸다.
수호석같은 느낌으로 준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어쩐지 이 투명옥이 빛을 모아, 우리 인현이를 지켜줄 것 같지 않소?"
"그러네요. 하루가 멀다 하고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니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데 말이에요."
"인현아, 이 투명옥 2개가 어쩐지 네 어미와 이 아비 같지 않느냐? 나중에 우리가 없더라도, 이 둘이 너의 수호석이 되어줄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어찌 1개를 잃어버렸다고 밝힐 수가 있겠는가?
***
"혼자 있을 때 아니면 꺼내지는 마라. 수호석이 도리어 강도를 부르면 곤란하지 않느냐."
이런 당부와 함께 받은 것인데, 말 나온 김에 말하면, 하인현은 은장도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잃어버렸다.
이 또한 감히 말하지 못했다. 좀 많이 위험한 일이 있었던 때라, 걱정끼칠까봐서다.
***
특별한 은장도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특별한 설계와 주문으로 만든 것. 손잡이에는 아버지가 직접 쓴 글씨도 새겨져 있다.
보통은 애기씨 자신의 가슴을 '찌르기만' 하면 되지만, 하인현의 것은 '베기' 기능도 있다. 유명 장인이 정성을 들여 만든 단도답게, 아주 예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약초를 캐려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데 가시덤불이 방해를 한다? 그러면 은장도로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하인현의 은장도는 일명 '맥가이버 칼'처럼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어머니가 하인현이 산과 들을 맘껏 돌아다니도록 놔둘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여자 아이이긴 해도 이런 칼이 있으니, 자기 자신을 잘 지키긴 하겠지..'
했던 것.
***
'내가 은장도와 투명옥 한개를 잃어버린 벌인 거 같다!'
라고 생각했었다, 뜬금없는 세자빈 간택 시험 통보를 받은 것은.
'불효, 불효, 이런 불효녀가 없지!'
본인도 둘을 잃어버린 게 너무나 슬펐지만,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했다. 그렇다고 그날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후회하지는 않아도
'난 벌 받아 싸다!'
는 자책에 시달려왔다.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잃어버리지 않았을 거라는 자책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서 신경쓸 겨를이 없긴 했지만 말이다.
***
남아있는 수호석을 더 자주 꺼내보게 되었다.
짝사랑남 생각이 짙어진 탓도 있다. 밤마다 꺼내보면서 그 귀공자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 도령의 건강과 안위를 먼저 빌었다.
'한번만 마주칠 수 있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라고도 빌었고. 정작 자신이 집밖에 자주 안 나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혼례복 속 수호석을 옷 밖으로 느껴보면서 후회했다.
'어젯밤 내 기도 때문에 안 오시는 건 아닐까?'
라는 괜한 생각 때문이다.
그동안 세자빈을 무르게 해달라는 기도는 참아왔지만, 어젯밤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투명옥을 손에 올려놓고는,
'아! 내가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결국 수호석을 손에 꼭 쥔 채로 기도했던 것이다. 천지신명,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께.
'저는 정말 세자빈으로 궁에 갇혀 살긴 싫습니다. 님과 함께라면, 궁에 갇혀 살아도 잘 살아가겠지만, 님을 평생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유부녀의 몸으로 만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로 시작하는 기도였다.
아무래도 유력 집안의 잘난 자제니, 조만간 등용될 것이고, 그러면 장차 중전이 된 자기 앞에 한번은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무엇이 더 비극인가?
짝사랑남을 평생 다시는 못 보는 것이 더 비극인가? 아니면 유부녀.. 그것도 왕의 여자가 되어,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남자로 다시 만나는 것이 더 비극인가?
"진정.. 님과 함께라면, 저 푸른 초원 위 허물어져가는 초가에 살아도 행복할 터이나, 님이 없으면, 이 구중궁궐에서 호사롭게 살아도 불행하겠습니다."
를 거쳐서
"저를 이 궁에서 빼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가 결론인 기도였다.
***
물론, 그런 게 가능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상상이라도 해보는 그런 기도였다.
하인현 자신이 도망치는 게 아니라, 마법이든 도술이든 초자연적인 힘이든이 작용하여 그녀가 사라지면,
'부모님께는 해가 없이,'
자신은 궁 밖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님 없이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이 궁궐 말고 산과 들을 자유롭게 떠돌며 살게 하시옵소서!"
이런 마음인 것이다.
***
바로 다음날 밤에 이리 후회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
격동의 하루였다. 나락에서 천당 갔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다시 천당가고 싶어서, 하인현은 눈을 감고 기도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 원망했던 것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 어리석은 기도 드린 것 죄송합니다!"
눈을 감고 정성껏 취소 기도를 한 후에도, 세자는 오지 않았다.
***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세자 저하 옥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낮에 볼 때는 건강한 것 같았지만, 이렇게까지 오지 않다니 말이다.
'아냐! 그랬다면 밖이 소란스러워졌겠지.'
애써 걱정들을 떨쳐보다 영 안되니, 간곡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
한참 빌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은 눈으로 느껴지는 빛의 강도도 갑자기 세진 것 같다.
'뭐지?'
눈을 뜬 하인현의 입에서 짧고 낮은 비명이 튀어 나왔다.
"악!"
매우, 매우, 매우! 낯설고 이상한, 민망하기까지 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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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이 이야기에는 **가상의** 인물, 책, 약초 등이 등장하지만, 상상의 산물일 뿐임을 주의하시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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