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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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들어온 지도 몇 시간이 지났다.
회색 하늘 아래, 콘크리트 덩어리 위로 고블린의 피가 튀었다.
책에서 읽었던 대로, 여긴 확실히 폐허가 된 도시 배경이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공기는 훨씬 더 썩은 냄새가 났다.
키이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소리.
고블린 놈들이다.
“지현아, 뒤로.”
“응.”
무너진 콘크리트 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하나, 둘, 셋.
세 마리의 고블린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처음에 만났던 그 고블린과 달리 중요한 부분만 간신히 가리고 있는 차림이다.
들고 있는 무기도 허접하고.
[강주언이 ‘실드 lv.1’을 발동합니다.]
익숙하게 스킬을 발동시킨다.
전신을 감싸는 단단한 느낌.
그의 주변 공기가 일그러진다.
키에에!
가장 앞에 있던 고블린이 녹슨 칼을 휘두른다.
강주언도 실드로 덮인 주먹을 마주 휘둘렀다.
터엉!
투명한 막 위로 불꽃이 튀어오른다.
고블린의 칼날이 부서졌다.
그 충격으로 놈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몇 번의 전투.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이 실드라는 것이 생각보다 엄청 단단하다는 것을.
강주언은 몸을 돌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팔 위의 실드가 순간적으로 진동했다.
쾅!
투명한 주먹이 고블린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렸다.
핏물이 튀어오르며 고블린 머리통이 사라진다.
퉁!
등 뒤에서 달려든 녀석의 칼이 실드에 막힌다.
강주언은 고블린의 양쪽 팔을 붙잡은 뒤, 발로 복부를 몇 차례 걷어찼다.
퍼걱!
부러진 칼을 들고 달려들던 녀석의 머리통까지 깨주고.
전투를 끝냈다.
죽은 고블린의 몸이 하얀 불길에 타오르듯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작은 마석 조각.
이미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지만, 언제봐도 신기하다.
정말로 게임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여기.”
먼저 마석을 줍고 있던 배지현이 강주언에게 건낸다.
“마석을 내가 다 갖고 있어도 되겠어?”
“응. 오빠가 더 세니까 그게 맞아.”
탑 안에서는 화폐처럼 쓰이는 마석.
그녀의 말이 맞기는 한데,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다.
해맑게 웃고 있는 배지현이 들고 있는 것은 고블린들이 떨어뜨린 잡템들이었다.
누더기 같은 천 조각이랑 부러진 금속.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잡템들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각성자들이 탑에서 누릴 수 있는 탑의 기적 중 하나, 인벤토리다.
“그런 잡템들 모아서 뭐하려고?”
“재밌잖아. 히힛.”
입을 가리며 웃던 그녀가 강주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래서 탑에 들어오게 된 거라고? 나까지 업고?”
맞다. 고블린들이 나오기 전까지 그 이야기 중이었지.
“응.”
고개를 끄덕이며 강주언은 슬쩍 배지현의 눈치를 봤다.
범죄자나 고블린의 대가리는 마음대로 터뜨리지만, 그녀의 눈치를 자꾸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배지현은 기분 나빠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주언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잘했어.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오빠 죽이고, 나도 죽었을 거야.”
말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녀가 웃고 있으니까 따라 웃었다.
어쩐지 그녀의 눈동자 안쪽 어딘가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잠깐만, 나 쉬.”
배지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솟아올라온 폐허를 향해 다급하게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강주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전에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배지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따뜻하고.
그런데 탑에 들어와서는 뭔가.
너무 솔직해진 느낌이랄까?
기본적인 욕구에 민감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
“뭐해! 나 쉬하는데 가려줘야지!”
무너진 벽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주언은 황급히 뛰어가며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솔직하고 이상해져?
그게 뭐?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현이가 깨어났다는 거니까.’
조르르.
강주언은 몸을 최대한 부풀리고 등으로 막아섰다.
감히 몰래 훔쳐보는 놈이 있다면 정말로 때려죽일 것이다.
그게 사람이던, 몬스터던.
눈을 부라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워만 있던 사람이 혼자서 소변도 보다니.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흐음.”
“왜? 무슨 일 있어?”
슬쩍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훔쳐보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
설령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미친놈 같지만, 진심이다.
“하고 싶다.”
“······응?”
“그거 하고 싶다고!”
“뭐?!”
강주언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빨라졌다.
너무 솔직해지고, 욕구에 민감해진 것 같아서 걱정은 무슨!
욕구 최고다! 만세!!
**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그러엄.”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강주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1층에서 들러야 할 곳은 마을이다.
탑에서 마을은 아주 중요하다.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물론 장비와 아이템, 심지어 술과 음식까지도 팔고 있다.
각 층마다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다.
1층, 그리고 그 이후로는 5층 단위로 마을이 존재한다고 그랬다.
다시 말해서 여기 1층에서 필요한 것들은 구하지 못하면 5층까지 이 꼴로 가야한다는 것.
“오빠, 저기 고블린!”
“간닷!”
가는 길에 고블린들을 보이는 족족 때려잡고 있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탑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죽이면 떨어지는 마석.
그것이 이 안에서는 화폐나 마찬가지니까.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모아야 한다.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지현아!”
“응!!”
퍽! 퍼걱!
고블린들을 때려잡은 강주언은 주변 폐허들을 살펴보며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보면 마을 가는 길을 알 수 있어?”
“응.”
“어떻게 알아?”
“열심히 정보를 찾아봤거든.”
“하긴, 우리 오빠가 그런 건 예전에 일할 때도 잘했지.”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움찔했지만, 그녀의 웃는 얼굴에 기분이 풀렸다.
“그런데 1층 말고는 정보가 없어.”
“정말? 그럼 어떡해?”
마치 고의로 막아버린 것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다 방법이 있어.”
강주언이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인벤토리에는 탑 안에서 주운 물건만 들어가기 때문에 이렇게 가지고 다녀야 한다.
“휴대폰? 어차피 여기서는 안 되잖아.”
배지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런데 탑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갤러리가 있대. 거기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탑 갤러리’.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탑에서 제공하는 기능은 아니다.
각성자 중 한 명이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서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탑에 맨 처음 들어간 전설의 1세대 각성자 중 한 명이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단지 추측일 뿐이다.
“그런 게 있어? 그럼 지금 해보자.”
“여기선 안 돼.”
“응? 그럼?”
“5층에 있는 마을에서 이용권을 구입해야 이용할 수 있다고 했어.”
최소 5층까지는 올라와야 사람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관리자의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 힘들어. 쉬고 싶어.”
배지현의 발끝이 떨리고 있었다.
하긴 많이 걷기는 했다.
여기는 밤도, 낮도 없이 계속 흐린 하늘 뿐이라 잊고 있었다.
“그래. 이 근처에서 좀 쉬자. 잠깐만.”
강주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건물들, 반쯤 녹아내린 콘크리트.
그중 유일하게 네 벽이 남은 폐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가 막혀 있었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강주언이 ‘실드 lv.1’을 발동합니다.]
쾅!
부셔버리면 그만이니까.
“이리 와.”
안은 싸늘했다.
바닥은 제법 평평했지만, 뒤덮고 있는 먼지와 깨진 유리 조각들이 문제였다.
‘나야 상관없지만.’
강주언이 걱정스럽게 배지현을 쳐다보았다.
저 가녀리고 부드러운 사람을 저런 바닥에 눕힐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덮을 것, 아니 최소한 깔 것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
“응?”
“봐바.”
배지현이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것들을 바닥에 늘여놓았다.
하나 같이 모두 잡템들 뿐이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몇 개를 집어들었다.
낡은 천과 가죽 조각 같은 것들이었다.
‘저런 걸로는 택도 없는데.’
하지만 그녀의 희망이 꺾이게 둘 수는 없었다.
“우와. 그거면 되겠다. 잘했어, 지현아!”
최선을 다해 반응을 했다. 엄지까지 치켜들어가며.
“왜 저래?”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그것들은 한 군데에 모은 배지현이 양손을 뻗었다.
[배지현이 ‘합성 lv.1’을 발동합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손끝에 작은 입자가 모인다 싶더니.
파밧.
은은한 빛과 함께 회색 천이 생겼다.
넓고 심지어 깨끗하기까지 하다.
“성공!”
배지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이게······.”
강주언이 눈썹을 올렸다.
“합성! 내 특성!”
생각해보니 여기까지 오면서 그녀의 특성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탑에 들어왔다는 것은 각성자라는 뜻인데도.
배지현이 잡템을 줍고 다녔던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다 생각이 있구나.”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가 혀를 삐죽 내밀며 웃었다.
예전에도 칭찬을 좋아하긴 했지만, 탑에 들어오고 나서는 특히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기분이 좋아보이길래 분위기를 좀더 띄워보기로 했다.
“또 뭐 할 수 있어?”
“후훗. 기다려봐.”
파밧! 파밧!
베개, 식탁보, 가죽 치마.
이런 것들이 허공에서 튀어나온다.
“재료와 관련된 것을 만들 수 있어.······가끔 이상한 것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면 내 옷도?”
“당연하-으읏.”
풀썩.
신나서 손을 뻗던 배지현이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다.
“지현아!”
창백해진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은 없고, 또 뭘 확인해봐야-.
“아, 제발 호들갑 좀.”
강주언의 이마를 툭 때렸다.
“바보야. 그냥 마나가 다 떨어진거잖아.”
하긴 그랬지.
각성자들이 스킬을 사용하려면 마나가 있어야 한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잠깐만?
“지현아. 마나가 느껴져?”
“응. 그리고 시스템 창에도 나오잖아.”
“응?”
시스템 창에도 나온다고?
[강주언]
[특성: 실드]
[보유 스킬]
[액티브]
실드 lv.1
[패시브]
-
없다.
마나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스킬을 사용하면서 마나가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도 받은 적이 없는데?
뭐지?
“나 지금 뭔가 잘못된 건가?”
어느새 잠든 배지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를 편하게 눕힌 뒤, 강주언은 일어났다.
사방이 막혀 있는 폐건물.
들어올 수 있는 곳은 강주언이 뚫어놓은 곳 밖에 없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뒤, 몸을 기댔다.
간간히 들려오는 고블린들의 소리를 들으며 옅은 잠에 들었다.
저벅.
벽에 기대 잠들었던 강주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공기 끝에서 낯선 기척이 스쳤다.
저벅.
심장이 한 번 묵직하게 뛰었다.
강주언은 숨을 죽였다.
바깥의 먼지 사이로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빠르지 않은 걸음.
그러나 확실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벽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시선이 자동으로 폐허 안을 훑었다.
한가운데, 배지현이 천을 덮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배 위에 팔을 얹고, 숨결이 고르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짧게 숨을 내쉰 뒤, 몸을 움직였다.
입구 바로 옆, 부서진 콘크리트 기둥 뒤.
몸을 낮추며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손끝에 감각이 모였다.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모래를 밟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폐건물의 문턱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순간.
강주언의 몸이 튀어올랐다.
- 작가의말
전개를 빨리 하려고 생각하다보니 너무 급해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화에서 또 만나요!
선작과 추천은 작가에게는 '마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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