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는 됐고, 청소비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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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쓸어버려욧
그림/삽화
.
작품등록일 :
2025.11.21 18:52
최근연재일 :
2025.12.09 06:27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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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글자수 :
125,468

작성
2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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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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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악마는 근로계약서를 찢는다

DUMMY

"자, 여기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박철우 팀장이 내민 것은 비싸 보이는 만년필과 두툼한 계약서였다.

장소는 청담동 거리 한복판이 아니라, 그들이 급하게 섭외한 인근의 최고급 호텔 라운지였다.

폭신한 소파, 은은한 클래식 음악, 그리고 내 앞에 놓인 도저히 이해 안되는 가격의 3만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단 하나, 이 계약서의 '제목'을 읽기 전까지는.


"흐음···"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계약서의 첫 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박철우와 그의 부하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 입만 바라봤다.


[표준 근로 계약서]

[사용자(갑): 한국 헌터 협회 / 근로자(을): 강태주]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철우를 바라봤다.


"박 팀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그랜드 마스터님. 연봉 5억에 계약금 1억, 조건은 업계 최고 수준입니다."


"이거, 누가 썼어요?"


"아, 협회 법무팀에서 최고 수준의 대우를 보장하기 위해 특별히···"


"최고 수준?"


나는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던졌다.

얼음이 든 유리잔이 달그락거렸다.


"지금 나랑 장난합니까?"


"네···? 혹시 금액이 부족하십니까? S급 헌터 초임 중에서도 파격적인···"


"돈 문제가 아니잖아, 이 양반아."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박철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여기 봐요. '근로자(을)'."


나는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톡톡 쳤다.


"나, 엄연히 사업자 등록증 있는 사람입니다. '싹쓸이' 대표라고요. 근데 나보고 협회 밑에 들어가서 월급쟁이 노릇을 하라고요?"


"아, 아니, 그건 형식상의 절차일 뿐이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법이죠. 내가 이 계약서에 도장 찍는 순간, 나는 당신네 협회장한테 '결재'를 받아야 하고, '출근'을 해야 하고, '지시'를 받아야 하잖아."


나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내가 이계에서 마왕 목 따고 돌아와서 제일 먼저 다짐한 게 뭔지 알아요? 다시는 남의 밑에서 일 안 한다는 거였어. 왕궁 기사단장? 영주? 다 필요 없어. 내 인생의 결재권자는 나 하나면 족해."


사실은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어서 그런 거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그, 그렇다면···?"


"고용 계약이 아니라, '외주 용역 계약'으로 갑시다."


"외주··· 요?"


"네. B2B 거래. 헌터 협회가 '갑', 우리 '싹쓸이' 업체가 '을'. 협회가 해결 못 하는 더러운 건수 생기면 우리한테 의뢰하고, 우리는 건당 수수료 받고 처리해 주는 파트너십."


박철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내 말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역시··· 그랜드 마스터. 어딘가에 소속되어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시는구나. 구름처럼 자유로운 영혼! 5억이라는 거금을 줘도 자유를 팔지 않겠다는 저 고고한 기개!'


박철우는 감동한 듯 울먹이며 넥타이를 풀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분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협회 규정상, 외부 업체와 그런 식의 포괄적 용역 계약을 맺은 전례가 없습니다. 게다가 보안 문제도 있어서, 이건 협회장님의 직접 재가가 필요합니다."


협회장.

한국 헌터 협회의 정점. '철권(鐵拳)' 최무진.

S급 헌터이자, 꽉 막힌 꼰대로 유명한 노인네다.


"귀찮게 진짜···. 거기 가면 밥 줍니까?"


"협회 구내식당이 5성급 호텔 뷔페식입니다. 외부 파트너도 이용 가능합니다."


"갑시다. 차 대기시켜요."


나는 락스 통을 챙겨 들고 앞장섰다.

뷔페라니. 오늘 저녁은 거기서 해결이다.


---------------------------------------------------------------


한국 헌터 협회 본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우뚝 솟은 63층짜리 마천루.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헌터와 직원들의 시선이 꽂혔다.


그도 그럴 것이, 박철우 팀장을 비롯한 정예 스카우트 팀이 호위하듯 모시고 들어온 사람이···

낡은 작업 조끼에 락스 통을 들고, 허리춤엔 분홍색 고무장갑을 찬 나였으니까.


"뭐야? 저 사람은? 배관 수리공인가?"

"박 팀장님이 왜 저렇게 쩔쩔매?"

"혹시 저 락스 통, 신종 아티팩트인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당당하게 걸었다.

원래 사장님은 작업복 입고 다녀도 포스가 나는 법이다.


우리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 협회장실로 향했다.

띵―.

문이 열리고, 운동장만 한 집무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앙, 거대한 흑단나무 책상 뒤에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최무진.

대한민국 무력 랭킹 3위.

그는 서류를 보던 눈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찌릿―!


눈이 마주친 순간,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일반인이라면 숨이 막혀 기절할 정도의 강력한 '기세'였다.

박철우 팀장조차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기 싸움인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 기세는 이계에서 오크 족장이 방귀 뀔 때 나오는 풍압보다 약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뚜벅뚜벅 걸어가, 협회장 앞의 의자를 빼서 털썩 앉았다.


"아이고,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으셨네. 노인네 뼈 시리게."


"······!"


최무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자신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도 태연하게 에어컨 타령을 하는 나를 보며 내심 경악했다.


'허세가 아니다. 내 살기를··· 마치 산들바람처럼 흘려버렸어. 이놈, 진짜다.'


최무진은 기세를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자네가 박 팀장이 보고한 그··· '청소부'인가?"


"네. '싹쓸이' 대표 강태주입니다. 명함은 다 떨어져서 없네요."


"보고서는 읽어봤네. 펜트하우스 악령 퇴치, 르 블랑 주방 정화, 그리고 빙의자 부대 제압까지. 실력은 확실한 것 같더군."


"뭐, 먹고살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헌데··· 우리 협회의 정직원 제안을 거절했다고?"


최무진이 박철우가 올린 보고서를 탁탁 쳤다.

연봉 5억 거절. 외주 계약 요구.


"자네, 여기가 어딘지 아나? 나라를 지키는 헌터 협회야. 장사꾼 마인드로 거래를 하려 들면 곤란해."


"협회장님."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사업도 중요합니다. 저는 제 회사의 사장입니다. 남의 밑에서 월급 루팡이나 하려고 귀신 잡는 거 아닙니다."


"허, 이놈 보게?"


최무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주변에 예스맨들만 있다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놈은 처음일 테니까.


"좋아.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말일세."


최무진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건 믿지 않아. 외주 계약? 좋지. 하지만 우리 협회의 파트너가 되려면 그만한 자격을 증명해야 해."


"그래서요?"


"테스트를 하나 하지. 통과하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특수 위생 관리 협약'을 맺어주겠네. 하지만 실패하면···"


"실패하면?"


"그건 그때 가서 보자고."


협박이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까짓거 합시다. 빨리 끝내고 밥 먹으러 가죠. 테스트가 뭡니까? 쉐도우 복싱이라도 할까요?"


"아니. 따라오게."


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집무실 한쪽 벽면에 있는 책장을 밀었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마치 박물관의 수장고 같았다.

각종 기이한 물건들이 유리관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최무진은 그중 가장 안쪽에 있는, 시커먼 기운을 내뿜는 유리관 앞에 섰다.


"이걸 보게."


유리관 안에는 낡은 청동 거울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거울이 아니었다.

거울 표면에는 검은 곰팡이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기괴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건 '저주받은 귀면경(鬼面鏡)'일세. S급 게이트에서 발굴된 유물이지. 하지만 저주가 너무 강력해서, 접근하는 사람마다 미쳐버리거나 피부가 썩어들어갔어. S급 정화 헌터들도 손을 뗐지."


최무진이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자네가 청소 업체 사장이라며? 이 거울을··· '청소'해 보게. 견적은 얼마나 나오려나?"


이건 함정이다.

일반적인 물리력으로는 닦을 수 없는 저주다.

박철우 팀장이 "위험합니다!"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최무진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나는 유리관 앞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더럽긴 하다.

영적인 오염도가 심각해서, 거울이 아니라 썩은 늪처럼 보였다.


"견적이라···. 이거 꽤 비싼데."


"가능하겠나? 실수하면 자네 팔이 썩어 문드러질 수도 있어."


"거참, 노인네가 겁은 많아가지고."


나는 가방을 열었다.

이번에는 락스가 아니다.

저런 눌어붙은 저주에는 액체보다는 마찰력이 필요하다.


나는 하얀색 직육면체 스펀지 하나를 꺼냈다.

다있소에서 1,000원에 5개 들이로 파는 '매직 블럭'.

물론 이것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다.

내가 이계의 성녀가 쓰던 세숫대야 물에 푹 담가서 말린, '홀리 매직 블럭'이다.


"물 좀 있습니까?"


나는 옆에 있던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스펀지를 적셨다.

그리고 꾹 짰다.


"자, 작업 들어갑니다."


나는 유리관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마자 검은 독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 키에에에엑! 감히 인간 따위가!


거울 속의 악령이 비명을 지르며 독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나는 숨을 참으며 스펀지를 거울 표면에 갖다 댔다.


쓱.


― 끄아악?!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펀지가 지나간 자리에 붙어 있던 검은 저주가,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하얗게 사라졌다.

S급 헌터들도 정화하지 못했다는 그 저주가, 고작 천 원짜리 스펀지에 밀려나고 있었다.


"역시 찌든 때에는 매직 블럭이라니까."


나는 신나게 팔을 움직였다.

쓱싹, 쓱싹.


― 아, 안 돼! 내 저주가! 내 껍질이!

― 아파! 살살 문질러! 피부 벗겨져!


거울 속 악령이 애원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청소는 리듬이다.

그리고 구석구석 닦아야 제맛이다.


"어디서 꼬질꼬질하게 하고 다녀. 세수 좀 하고 살아라."


나는 거울의 테두리 장식 틈새까지 꼼꼼하게 닦아냈다.

검은 구정물이 뚝뚝 떨어졌다.

최무진과 박철우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 말도 안 돼···.'


최무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 거울은 닿기만 해도 마나 회로를 태워버리는 흉물이었다.

그런데 저 청년은 맨손으로 거울을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저 하얀색 네모난 아티팩트···

닿는 순간 저주를 소멸시키는 성속성 파동이 느껴졌다.


'저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정화의 성석(聖石)'인가?! 저 귀한 걸 소모품처럼 쓰다니!'


최무진의 착각은 우주를 뚫고 나갈 기세였다.


5분 뒤.

청동 거울은 번쩍번쩍 빛이 났다.

검은 곰팡이는 온데간데없고, 거울 표면에는 내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악령은?

너무 깨끗해진 거울이 부끄러운지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끝."


나는 더러워진 스펀지를 휴지통에 툭 던져 넣었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며 최무진을 돌아봤다.


"자, 깨끗해졌죠? 이제 계약서 다시 씁시다."


최무진은 멍하니 거울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는 내 어깨를 팡 치며 말했다.


"합격! 합격일세! 자네 말이 맞아. 자네 같은 인재를 직원으로 묶어두는 건 실례지."


"그렇죠?"


"좋아. '싹쓸이' 업체를 협회의 공식 지정 파트너로 등록하겠네. 기본 자문료 연 10억. 건당 수당 별도. 식대, 장비 지원 무제한!"


연 10억.

그것도 출근 안 하고 기본급으로만.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사장 하길 잘했다.


"단!"


최무진이 검지 하나를 세웠다.


"첫 번째 의뢰가 있네."


"뭡니까? 야근만 아니면 됩니다."


"자네를 노린다는 그 '나이트클럽 여왕'. 놈들이 최근 강남 일대 게이트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 자네가 우리 협회의 파트너로서 그곳을··· '대청소'해주게."


본거지 소탕.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자문료 10억이다.

그리고 그놈들이 내 잠을 방해한 주범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청소 도구는 지원해 주는 거죠?"


"물론이지. 협회 창고를 개방하겠네. 원하는 건 뭐든 가져가."


"좋습니다. 계약 성립."


나는 최무진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로써 나는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공식 파트너, 연봉 10억짜리 청소 업체 사장님이 되었다.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도 되죠? 뷔페라면서요."


나는 배를 문지르며 집무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최무진과 박철우가 경외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배웅했다.


물론 그들은 몰랐다.

내가 쓴 그 '성석(聖石)'이 다있소에서 산 천 원짜리 스펀지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밥값 뽕을 뽑기 위해 뷔페 접시를 10그릇 넘게 비울 예정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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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한강 물이 맑아질 때까지 25.12.02 42 5 14쪽
14 싹쓸이는 법인이 아니라 주식상장을 못할텐데 25.12.01 44 4 15쪽
13 구조대? 아니, 신발 신고 들어오지 마! 25.12.01 46 3 13쪽
12 납치라뇨? 지금 변기 닦느라 바쁜데요 25.12.01 52 3 10쪽
11 S급 신병 25.12.01 57 3 14쪽
10 성스러운 민폐 25.11.30 72 3 12쪽
9 잠 좀 자자, 이 새끼들아 25.11.29 78 5 9쪽
8 비트 주세요 (2) 25.11.28 80 4 12쪽
7 비트 주세요 (1) 25.11.27 89 5 12쪽
6 내 장비는 다있소에 있다 +1 25.11.26 102 6 12쪽
» 악마는 근로계약서를 찢는다 25.11.25 126 6 13쪽
4 식대는 별도죠? +1 25.11.24 150 6 10쪽
3 사연 있는 곰팡이는 없다 (2) 25.11.23 190 5 15쪽
2 사연 있는 곰팡이는 없다 (1) 25.11.22 215 7 8쪽
1 강남 펜트하우스의 춤추는 곰팡이 25.11.21 264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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