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로 전생한 블랙요원
“일 고!”
소년의 외침과 함께 패 하나가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자—! 이번에는 뭐가 깔렸는지 봅시다.”
소년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엎어진 패를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살짝 묻힌 침이 번들거렸다.
“그렇지!”
패가 뒤집히는 순간, 주변이 술렁였다.
“비광이다! 이 고!”
“오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둘이 동시에 탄식을 흘렸다. 한쪽은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사내였고, 다른 한쪽은 팔자수염을 기른 체구 좋은 장수였다.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패를 냈다.
“삼 고!”
“어? 이번엔 무깍지네.”
소년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패를 내려놓았다.
“스톱··· 아니지. 정지!”
탁.
패가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입가가 길게 올라갔다.
“자, 어디 봅시다.”
소년은 천천히 패를 세기 시작했다.
“자렴 숙부님은 피박이시고요. 자효 숙부님은— 광박이십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곧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하하하하! 이게 몇 점이야, 대체!”
소년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의 두 중년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오늘은 패가 진짜 안 붙네.”
구레나룻의 중년, 조인 조자효가 한숨을 내쉬었다.
“패가 안 붙는 게 아니오.”
옆의 팔자수염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이 오늘 신들린 거지.”
조홍 조자렴의 말에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자, 장부를 좀 봅시다.”
소년이 계산을 마치고 말했다.
“자효 숙부님은 지금까지 2천5백 전을 저에게 주시면 되겠습니다.”
“에이.”
조인이 손을 내저었다.
“집사에게 말해두지. 관저로 와서 받아가거라.”
“알겠습니다요.”
소년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계산은 자효 숙부님이 제일 시원하십니다.”
조인은 픽 웃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인 조자효(曹仁 子孝).
조씨 가문의 최고의 장수이자 인척관계를 제외해도 조조세력에서는 가장 최고의 장수였다.
소년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으로 옮겨갔다.
“자렴 숙부님은··· 오늘 좀 많으십니다.”
“얼마나?”
“6천5백 전입니다.”
“뭣이?”
조홍이 벌떡 일어날 듯 몸을 들썩였다.
조홍 조자렴(曹洪 子廉).
조조의 육촌 동생으로 조조세력의 초기 즉 현재는 조조 휘하에서 가장 위신이 높은 장수였다.
우선 조조가 거병할 시에 무려 가병 천 명에 병사 5천여 명을 모아서 합류했고, 반동탁 시절에는 자신의 전마를 조조에게 내주며 조조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도 있었다.
“그렇게 많아?”
소년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패가 워낙 잘 붙어서요.”
조홍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더니, 품속에서 낡은 문서 하나를 꺼냈다.
“액수가 너무 크다. 연주 동쪽 범현 경내에 산 하나가 있는데, 그걸로 치자꾸나.”
탁자 위에 내려놓인 문서.
조인이 그걸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자렴, 그건 독염산이잖나.”
“그래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산이다. 독소금뿐인 민둥산을 조카 앞에서 내놓는 게 말이 되나?”
조홍이 코웃음을 쳤다.
“백학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천금으로도 못 사는 준마를 고작 도박판 6천5백 전에 내놓으라고?”
“어림도 없지.”
조인의 말에 조홍이 발끈했다.
“그럼 어쩌라는 거요!”
두 사람의 말다툼을 조용히 듣고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숙부님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소년에게로 향했다.
“독염산이란 게··· 정확히 어떤 곳입니까?”
조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독소금이 굳어 만들어진 산이다. 물도 안 스며들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이지.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좋습니다.”
“···뭐?”
“저는 마음에 드는데요.”
소년은 망설임 없이 문서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독염산으로 퉁 치죠.”
조홍과 조인은 동시에 말을 잃었다.
“이 녀석이 진심인가?”
“조카, 나중에 후회해도 몰라.”
“괜찮습니다.”
소년은 태연하게 웃었다.
“도박판에서 나온 물건인데, 깨끗해야죠.”
잠시 침묵.
이내 조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잠깐만요.”
소년이 손을 들었다.
“제가 어디 돈 따려고 숙부님들과 고정지를 하겠습니까?”
소년은 씩 웃었다.
“제가 한 턱 쏘겠습니다. 영웅루로 가시죠.”
조홍이 먼저 웃었다.
“그럴까?”
조인은 잠시 소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시진 후에 보자꾸나.”
조홍의 관저에서 열렸던 도박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소년은 먼저 조인의 관저로 가서 패배금 2천5백 전을 받았다.
계산은 언제나 정확해야 했다. 그래야 관계가 틀어지지 않는다.
진류성에서 가장 큰 주루.
영웅루.
소년은 주루 앞에 서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주 땅의 하늘은 오늘따라 맑았다.
그는 품속에서 문서의 감촉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독염산.
아무 쓸모없는 땅이라 불리는 그 산이,
언젠가는 조조 세력 전체에 영향을 미칠 씨앗이란 것을---.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2화. 죽었어야 할 자
독염산의 땅문서를 품에 넣고 영웅루로 향하던 그 순간,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문득—
‘원래라면, 이 시점의 나는 살아 있지 않아야 했다.’
하후광.
그 이름은 후세의 기록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하후광은 하후씨 가문의 자제였다.
한나라 개국 공신 하후영의 후손이라는 이름값은 있었으나, 가문 내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방계였다.
그래도 하후씨였다.
조조가 거병하자, 하후돈과 하후연이 가장 먼저 그의 곁에 섰고
하후광 역시 동생 하후은과 함께 가문의 이름으로 군에 참여했다.
그때의 나이, 열다섯.
하후연 휘하의 자제병으로,
동탁 토벌이라는 이름의 전쟁에 끌려갔다.
그리고—
반동탁 연합군이 와해되던 그 전투에서,
조조는 대패했고
하후광은 도망치는 와중에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졌다.
변수하 기슭.
수십 구의 시체가 널브러진 그곳에서,
하후광은 조용히 시체로 남았다.
원래라면.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나는 하후광이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숨이 막혔다.
코로 썩은 피 냄새와 흙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전신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시체 더미 사이에 누워 있었다.
“···씨발.”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말은,
이 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정원 소속 특공대,
블랙요원이었다.
공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원.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수행 중이던 특수 임무 도중,
적국 공작원 수십 명과 교전했다.
임무는 성공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번 임무에서 큰 상처를 입고 전사했다.
확실히.
그런 내가,
눈을 떠보니 하후광의 몸 안이었다.
더 기이한 건,
두 사람의 기억이 모두 온전히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하후광의 어린 시절,
가문의 위계,
삼국지라는 세계의 흐름.
그리고—
내가 알던 역사.
‘···장난 아니군.’
몸은 열다섯 살 소년이었지만,
머릿속에는 수십 년간 축적된 경험과 냉정함이 남아 있었다.
우선 살아야 했다.
나는 기어오르듯 시체 더미에서 빠져나왔다.
근처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병사들과 말들이 흩어져 있었다.
전투는 끝난 지 꽤 지난 듯했다.
조조군은 패주했고,
동탁군 역시 추격을 포기한 상태였다.
즉—
이곳에는 누구도 오지 않는다.
나는 며칠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죽은 병사들의 몸을 뒤져 동전과 무기를 모았다.
검 하나, 장창 두 자루.
그리고—
다리가 크게 다친 전마 한 필.
처음엔 도망치려 했지만,
며칠 동안 보살피자 말은 점점 얌전해졌다.
죽은 말들의 살을 잘라 말려 육포를 만들었다.
비위가 상할 여유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며칠 뒤.
전마는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나는 말 등에 식량과 무기를 싣고 길을 나섰다.
처음엔 함께 걸었고,
이틀쯤 지나자 말이 스스로 몸을 낮췄다.
타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 말이—
범상치 않다는 걸.
진류성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이는 하후연이었다.
우리 형제는 원래 그의 휘하였기 때문이다.
하후연은 나를 보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후연은 나를 바로 조조 앞으로 데려갔다.
당연히 조조가 나를 반가워서가 아니라, 내가 구한 말이 조조가 전장에서 탔던 명마 절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
“전장에서 다친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조조는 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이 말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조조의 사람이 되었다.
공을 논하자면 미미했으나,
은혜는 분명했다.
나는 진류군 태수부의 호위무사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그 3년 동안,
나는 단 하나의 목표만 세웠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조조의 핵심 인물들과,
절대 끊어지지 않는 인연을 만드는 것.
조인.
조홍.
하후돈.
하후연.
오늘의 도박판도,
독염산도—
모두 그 연장선에 있었다.
영웅루의 문이 눈앞에 다가왔다.
나는 다시 한 번 품속의 문서를 확인했다.
독염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쓸모없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특히—
역사를 아는 자에게는.
“형님, 오셨습니까?”
문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 하후은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죽었어야 할 나는 살아 있고,
역사는—
이제부터 바뀐다.
진류성에서 영웅루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주루라기보다는,
장수들이 모이는 하나의 장(場)에 가까웠다.
“형님, 오셨습니까?”
영웅루 앞에서 뛰어나온 소년이 허리를 숙였다.
동생, 하후은이었다.
“응. 한 시진쯤 후에 자렴 숙부님이랑 자효 숙부님 오실 거다.”
“술상은 최고로 준비하겠습니다.”
하후은은 익숙하게 사람을 불러 움직였다.
이제 열일곱이 되었지만, 장부를 다루는 손놀림은 웬만한 상인보다 노련했다.
나는 그런 동생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루는 총 삼 층이었다.
1층은 누구나 드나드는 대청.
2층은 장수들과 귀빈을 위한 방 다섯 칸.
그리고 3층.
우리 형제의 공간이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 3층 가장 안쪽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벽을 따라 정렬된 나무 상자들이었다.
오수전(五銖錢).
상자 하나에 대략 만 전.
세어본 적은 없었지만, 매달 한 상자씩 늘어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장부도, 주판도 없었다.
대신—
커다란 철극 두 자루.
그리고 그 옆에서—
드르렁.
코를 골며 엎드려 자고 있는 거대한 사내 하나.
“······”
나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탁자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탕!
“전위 형님!”
“엉?”
사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전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왔냐, 백휴.”
“아니, 좋은 침실 놔두고 왜 여기서 자고 계세요?”
“도둑 들까 봐.”
전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철극을 움켜쥐었다.
“이만한 재물 쌓아두고, 네가 너무 태평한 거 아니냐?”
나는 피식 웃었다.
“형님, 여기 재물 언제 줄어든 적 있습니까?”
“음··· 그러고 보니 없긴 하네.”
“한 달에 상자 하나씩 늘고 있어요.”
전위는 잠시 상자들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는 네가 잘하는구나.”
“사람이 장사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숙부님들 오신다니까 술 마실 준비 좀 하세요.”
“또?”
전위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공짜로 먹이다간 망한다.”
“망할 만큼 안 줍니다.”
“······그렇다면야.”
전위는 철극을 들고 일어섰다.
“언제 오는데?”
“반 시진 정도요.”
“그럼 몸 좀 풀까.”
그는 히죽 웃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후원 훈련장은 영웅루의 숨은 핵심이었다.
장수들이 술만 마시는 곳이라면,
여기까지 자주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예를 겨루고,
활쏘기로 내기를 하고,
진 사람이 계산하는 구조.
그걸 만든 뒤로,
영웅루는 장수들 사이에서 ‘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 ---
전위는 원래 장막의 휘하 병사였다.
관청 앞 깃발을 단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는 일화는
진류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우연을 가장해 그와 술을 마셨고,
싸웠고,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그를 장막에게서 데려왔다.
돈도, 명예도 아닌 의리로.
- 작가의말
선작과 추천 부탁드립니당^^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