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보자에겐 가방이 제일 중요합니다.
무림으로 떠나는 날 아침. 우리는 대현자 아르해스의 안내를 받아 탑 지하에 위치한 ‘마도구 창고’에 모였다.
“와··· 뭔가 엄청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휑하네요.”
일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녀석의 말대로였다. ‘대현자의 창고’라는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게,
내부는 썰렁했다. 벽면을 가득 채웠을 선반들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 쌓인 나무 상자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끄럽습니다. 원정이 길어지면서 쓸만한 마법 물품들은 대부분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남은 것은 사용법이 까다롭거나 마력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 고대의 유물들뿐이지요.”
아르해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차피 최신형 마법 도구는 마나 없는 내가 쓰지 못한다. 내게 필요한 건 ‘특수 기믹’이 있는 아이템이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런 구석에 박혀 있는 게 ‘찐템’일 확률이 높거든요. 일단 생존에 필요한 것부터 챙깁시다.”
나는 먼지 쌓인 상자들을 뒤적였다. 가장 시급한 건 수납공간, 그리고 내 목숨을 지켜줄 방어구다.
“대현자님, 혹시 마나 없이 작동하는 가방이나 방어구 있습니까?”
“아, 마침 적당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아르해스가 구석에서 낡은 가죽 배낭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공간의 배낭’입니다. 내부에 아공간이 형성되어 있어 마차 한 대 분량의 짐이 들어갑니다. 외관도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
나는 배낭을 받아 들었다. 겉보기엔 허름했지만, 손을 넣어보니 팔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살펴보기] - 아이템: 아공간 배낭 (등급: 희귀) - 효과: 인벤토리 50칸 확장
‘오케이, 인벤토리 확보. 근데 가방 4개는 국룰 아닌가?’
나는 떨떠름하지만 일단 배낭을 멨다.
“그리고 이건 ‘아이기스의 팔찌’입니다. 착용자가 치명적인 위협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마나 장벽을 생성해 줍니다.
미리 충전된 마석으로 작동하니 현수 님도 사용 가능합니다.”
[살펴보기] - 아이템: 아이기스의 팔찌 (등급: 영웅) - 효과: 오토 쉴드 (1회 방어 후 재충전 필요)
‘생존기 하나 확보.’
나는 팔찌를 손목에 찼다. 이걸로 눈먼 화살에 비명횡사할 일은 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협상 카드’를 챙겨야 했다.
“대현자님, 저번에 말씀드린 드래곤 부산물 좀 볼 수 있을까요? 무림인들 꼬시려면 확실한 미끼가 필요해서요.”
“여기 있습니다. 악룡 칼리고의 전신(前身)이라 불리던 고대룡의 뼈입니다. 드워프들이 아니면 가공이 힘들어 방치해 뒀던 것인데···.”
아르해스가 상자를 열자, 시퍼런 광택이 도는 거대한 뼈조각들이 드러났다. 그냥 뼈가 아니었다.
뿜어져 나오는 기운 자체가 달랐다. 무림인들이라면 이걸 보는 순간 눈이 뒤집힐 거다. ‘만년한철’보다 귀한 재료일 테니까.
“훌륭하네요. 이거면 충분합니다.”
나는 용골을 몽땅 배낭에 쓸어 담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 관련된 아티팩트가 필요합니다. 차원이 다르면 시간도 다르게 흐른다고 하셨죠?”
“예리하십니다. 맞습니다. 무의 차원은 이곳보다 시간이 약 3배 빠르게 흐릅니다. 그곳에서의 3일이 이곳의 하루지요.”
“그럼 우리가 거기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간, 여기선 악룡이 부활해 버릴 수도 있겠네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아르해스가 엄지손가락만 한 회중시계를 건넸다. 시계바늘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고, 숫자 대신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종말의 계측기’입니다. 악룡 칼리고의 봉인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을 0으로 잡고 역산하는 시계지요. 바늘이 12시에 도달하면··· 세상은 끝납니다.”
나는 시계를 받아 들었다. 남은 시간은 대략 1년 남짓. 하지만 차원의 시간차를 고려하면, 무림에서의 시간은 약 3년 정도 여유가 있다는 소리다.
[살펴보기] - 아이템: 종말의 계측기 - 효과: 남은 레이드 시간 표시 (Time Limit)
“좋네요. 모든 보스전은 원래 타임 어택(Time Attack)이죠. 쫄깃하고 좋습니다.”
나는 시계를 품에 넣고 일행을 둘러봤다. 일호는 낡은 성검을 허리춤에 차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살펴보기] - 파티원: 조일호 (직업: 용사) - 상태: 긴장, 의욕 과다 - 싱크로율: 15%
‘싱크로율 15%라···. 아직은 손발이 안 맞는군.’
내 시야에만 보이는 ‘공격대 시스템’ 창에는 단순한 정보만 떠 있었다. 예전 게임처럼 복잡한 수치는 없었지만,
오히려 직관적이라 편했다. 싱크로율이 100%가 되면, 내 생각대로 일호가 움직여 줄까.
“일호야, 준비됐냐?”
“네, 형. 근데··· 세렌 님은요?”
일호의 시선이 세렌에게 향했다. 아무리 봐도 엘프의 외형은 너무 튄다. 뾰족한 귀와 은발은 무림에선 ‘요괴’ 취급받기 딱 좋다.
“세렌 님. 변신 마법 가능합니까? 그 귀랑 머리카락, 무림 가면 너무 튀어요. 요괴라고 돌 맞을 수도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잠시만요.”
세렌이 눈을 감고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더니, 은발 머리칼이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뾰족하던 귀는 둥글게 변했고, 푸른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 되었다.
“어때요?”
서구적인 이목구비는 여전했지만, 확실히 동양적인 분위기가 섞여 들었다. 마치 서역에서 온 이국의 공주 같은 느낌?
“헉···.”
일호가 숨을 삼켰다.
“진짜 존나 예쁘다······.”
“일호야, 그 말풍선 바뀌었다. 자, 준비 끝났으면 출발합시다.”
아르해스가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이번엔 실수가 아니다. 정확한 좌표 계산과 막대한 마석을 투입한, 완벽한 차원 이동 게이트였다.
“부디 무사하시길. 이 늙은이는 여기서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 진지 잘 챙겨 드시고 계세요.”
일호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우리는 빛 기둥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두 번째 차원 이동. 이번 목적지는 중원(中原)이다.
우웅- 팟!
시야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냄새였다. 판타지 세계의 맑은 숲 내음이 아니라, 흙먼지와 말똥 냄새, 그리고 쇠가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섞인 탁한 공기.
“쿨럭, 쿨럭! 켁, 여기 공기 왜 이래요? 미세먼지 나쁨 수준인데? 역시 대륙인가···.”
일호가 기침을 하며 코를 막았다. 나 역시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는 어느 좁은 골목길 구석에 서 있었다. 벽은 붉은 황토로 지어졌고, 바닥은 거친 돌길이었다.
“여기가··· 무림인가요? 생각보다 좀··· 칙칙한데요.”
세렌이 옷소매로 입을 가리며 물었다. 흑발로 변신했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품은 이 지저분한 뒷골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일단 나가보자. 분위기 파악이 먼저야.”
나는 골목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대로변을 살폈다. 거대한 성벽, 검은색 기와지붕, 그리고 붉은색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에 적힌 글자. ‘진(秦)’.
“진나라네.”
내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진나라요? 진시황 그 진나라요?”
일호가 물었다.
“어. 저기 깃발에 쓰여 있잖아. 진(秦)이라고.”
“어? 형, 저 한자 못 읽는데요? 근데 왜 읽히지? ‘진’이라고 딱 보이는데?”
“아.”
그제야 깨달았다. 아르해스가 걸어준 ‘통해의 주문’이 단순히 음성 언어뿐만 아니라 문자까지 해석해주고 있다는 것을.
판타지 언어 패치가 중국어 버전까지 호환되다니, 성능 하나는 확실하다.
“마법 덕분이야. 일단 말 통하는 건 확인했으니 다행이네.”
우리는 조심스럽게 대로변으로 나섰다. 하지만 내가 알던 무협지 속 낭만적인 중원이 아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다들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었고, 곳곳에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창을 들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진시황 사후, 이세황제 호해의 치세인가.’
공대장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헬게이트다. 가혹한 법치, 과도한 세금, 그리고 사상 통제. 백성들이 웃음기를 잃은 게 당연하다.
“형, 저기 사람들 옷 입은 거 봐요. 다들 꾀죄죄해요. 여기가 진짜 고수들이 사는 데 맞아요? 다들 영양실조 걸린 거 같은데.”
“일단 정보부터 모으자. 원래 퀘스트의 시작은 주막인 거 알지?”
우리는 대로변을 따라 걷다, 낡은 깃발이 걸린 2층짜리 목조 건물을 발견했다. ‘함양 주루(咸陽酒樓)’.
“들어가자. 밥 좀 먹으면서 귀동냥 좀 해보게.”
객잔 안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활기찬 소음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 나직한 욕설, 그리고 거친 숨소리들이 뒤섞인 탁한 소음이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방인 셋. 세렌이 흑발로 변신해 눈에 덜 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이목구비는 여전히 ‘서역의 귀족’처럼 보였다. 일호의 거대한 덩치 또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점소이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며, 몇 분이십니까?”
말이 통한다. 억양이 조금 낯설지만, 뇌에서 자동으로 필터링되어 한국어처럼 들렸다.
“세 명. 조용한 구석 자리로 줘. 그리고 여기 제일 맛있는 술이랑 고기 좀 내오고.”
나는 대현자에게서 받아온 금화 한 닢을 툭 던졌다.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나라 화폐인 반량전(半兩錢) 수백 개에 달하는 가치였다.
“아이고!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2층 상석으로 모시겠습니다!”
자본주의는 차원을 넘어, 시대를 넘어 통한다. 우리는 2층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래층 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이었다.
“일호야, 세렌 님. 최대한 자연스럽게 있어. 우린 그냥 서역에서 온 상인인 척하는 거야.”
음식이 나왔다. 투박한 만두와 양고기 수육이었다. 판타지 세계의 화려한 만찬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일호는 이것마저도 감지덕지하며 입에 넣었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무기를 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흔한 칼 한 자루, 창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식기류뿐.
‘이상해. 아무리 진나라라지만, 호신용 단검 하나 안 차고 다닌다고?’
나는 지나가는 점소이를 부르며 탁자에 놓인 화주를 한잔 들이켰다.
‘이거··· 도수가 왜 이렇게 낮아?’
밍밍한 술맛에, 무협지에서나 보던 객잔의 주정뱅이들은 다 어디로 갔나 고민하던 찰나, 점소이가 다가왔다.
“이보게,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예, 나리.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금화 값은 해야지요, 헤헤.”
“우리가 서역에서 와서 물정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이 근처에 무공··· 아니, 무예를 좀 하는 분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호위무사가 좀 필요해서.”
그 순간. 비굴하게 웃던 점소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이보시오, 나리! 죽고 싶어 환장하셨소? 금무령(禁武令)이 내려진 지가 언제인데 대놓고 무예 타령이오!”
“금무령?”
“쉿! 목소리 낮추십시오. 관군에게 들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단 말입니다.”
점소이는 벌벌 떨며 탁자를 닦는 척 몸을 숙였다.
“지금 황제 폐하께서 천하의 병장기를 거두어 녹이고 계십니다. 민간인이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있어도 삼족을 멸한다고요.
무예를 익힌 자들은 ‘반역도당’으로 몰려 잡혀간 지 오랩니다.”
“잡혀갔다고? 어디로?”
“대부분은 만리장성 축조 현장으로 끌려갔거나, 참수당했지요. 지금 함양 바닥에 무인은 씨가 말랐습니다.”
상황이 꼬였다. 무림맹에 가서 "마왕 잡으러 갈 파티원 구함!" 공고를 붙이려던 계획은 전면 수정이다. 여기선 무림인 자체가 멸종 위기종이자 수배자 신세다.
“그럼··· 다 잡혀가고 남은 사람은 없소? 분명 숨어 있는 자들이 있을 텐데.”
나는 금화 한 닢을 더 꺼내 점소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점소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금화를 챙기더니, 내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소문에 듣자 하니, 관군의 눈을 피해 도망친 자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어디오?”
“숭산(嵩山)입니다.”
숭산. 소림사가 있는 곳이자, 우리가 처음 추락했던 그 숲. 점소이가 말을 이었다.
“숭산 깊은 골짜기에 관군의 발길이 닿지 않는 ‘무명촌(無名村)’이라는 곳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살아남은 무쟁이들은 다 그쪽으로 도망쳤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거긴 짐승들이나 사는 곳이라···.”
“고맙네. 충분해.”
나는 점소이를 물렸다. 목적지가 정해졌다.
“형, 숭산이면··· 우리 처음에 떨어졌던 거기 아니에요? 닌자들 날아다니던.”
일호가 만두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중국에서 뭔 닌자 타령이야. 경공이겠지, 하···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네.”
나는 찻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오히려 잘됐다. 함양 한복판에서 숨바꼭질하는 것보다, 한곳에 모여 있다면 ‘광역 스카우트’가 가능하니까.
“준비해라. 밥 다 먹으면 바로 이동한다.”
“에? 벌써요? 저 고기 더 먹고 싶은데.”
“가서 먹어. 무림인들이 숨어 있다는 무명촌. 거기가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다.”
무림인 없는 무림. 칼이 금지된 시대. 그 속에서 살아남은 ‘진짜배기’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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