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진실의 맹세 (상).
“그쪽이 사뿐히 즈려 밟고 있는 그거... 제 손수건이에요.”
"네? 이크!"
김소월 시의 한 구절을 건넨 듯한 낯선 여성의 말에, '세진'은 발 밑을 쳐다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OO 대학교 약속의 명소인 시계탑 앞이었다.
까닥 까닥
친구들과 PC방에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리던 세진에게, 그녀는 그의 신발을 들어올리라는 손가락 제스처를 취하며 말한 것이었다.
바닥에서 손수건을 급히 주워 그녀에게 건네주며 정중히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정말 모르고 밟았어요.”
“감각 신경이 둔한가 봐요? 난 감각이 예민해서 개미만 밟아도 깜짝 놀라는데.”
"에이, 설마 그럴 리가..."
그녀는 화사한 옷차림에 큰 눈과 밝은 미소로 생기 넘치는 표정이었고, 이는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느낌으로 세진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세진은, 비로소 장난임을 눈치채고 웃었다.
“크크, 이 손수건으로 닦으면 그쪽 얼굴에 신발 바닥 무늬가 찍힐 테니 제가 빨아드릴게요.”
평생 빨래 한 번 한 적이 없는 세진이었지만, 왠지 손수건을 그냥 돌려주면 그녀와의 인연이 끝날 것 같아 수작을 부렸다.
“빨래는 됐구요... 맥주나 빨게 술이나 한잔 살래요?”
"예? 뭘, 빨아요?"
"맥주요, 맥주!"
"그...그럼, 그럴까요."
그녀는 걸걸하게 술자리 제안 후 앞장섰고, 세진은 친구들과의 약속은 잊은 채 아기새처럼 그녀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걸크러시한 매력을 가진 그녀의 이름은 '애희'라고 했다.
그들은 그녀의 단골인 듯한 호프집에서, 시원한 맥주와 푸짐한 안주를 시켰다.
"언니~ 생맥주 500 두 잔이랑 골뱅이 소면 세트 줘요~"
"어머나... 오늘은 왠일로 남자랑 둘이 왔네?"
잠시 후.
"캬~ 역시 대학가 앞은 싸고 양이 많아서 좋다니까요."
"애희씨는 맥주처럼 시원시원해서 보기 좋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세진 씨라고 했죠? 우리의 첫 만남을 기념하며, 건배~"
"네... 건배..."
짠~
애희는 큰 인심이라도 배풀 듯이 말했다.
"이걸로 손수건 값은 퉁치는 걸로 할게요."
"그래도 세탁은 해드릴 테니까, 애희씨 연락처 좀 주실래요?"
"어머? 세진씨... 저랑 계속 보고싶은가 보다~ 맞죠?"
"아...아니, 그런 게 아니......고 맞는 것 같아요."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과 웃음소리 속에서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둘만의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에 다가갔다.
* * *
그렇게 연인이 된 세진과 애희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가 그녀보다 1살 위여서, 애희는 세진을 오빠라고 불렀다.
"세진 오빠!"
"앗, 깜짝이야."
“오빠는... 내 첫인상이 어땠어?”
만화방에서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가 뜬금없이 물었다.
세진은 별 생각 없이, 애희에 대한 본인의 첫 느낌을 얘기했다.
“당당하고... 저돌적이고... 전투적인...?”
“그러니까, 내가 동물로 치면 코뿔소나 멧돼지쯤 되는 느낌인 거네?”
흐으으응~ 탁! 탁!
뜨거운 콧김과 함께, 애희는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에 부딪히며 입만 웃는 채로 말했다.
그제야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끼며, 그는 앞선 말실수를 아름답게 포장했다.
“그...그런 걸크러시한 매력과 함께,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지!”
주먹을 풀고 세진을 두 팔로 감싸며,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도 처음엔 손수건 밟은 오빠 발만 보고 분노가 끓어오르다가, 얼굴을 보고 나서 화가 풀렸지.”
"내 얼굴이 좀 괜찮긴 하지?"
"그것보다 약간 호구상이라, 맥주를 뜯어먹을 좋은 기회라는 느낌이..."
"아무튼 화가 안 풀렸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애희의 알쏭달쏭한 진심에, 어색하지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점차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애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우리 한 가지만 약속해.”
“응, 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기... 내가 먼저 맹세할게!”
"거짓말? 맹세?"
주섬 주섬
그녀는 맥주잔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려는 듯, 가방에서 바늘을 꺼내 본인 손가락을 따려고 했다.
"이렇게 각자 피를 섞어 함께 마셔야 맹세가 강해진데!"
"애...애희야, 그만 둬. 넌 무슨 여자애가, 삼국지도 아니고 피로 맹세를 하려고 해?"
예방 주사도 무서워 하는 세진은, 화들짝 놀라 애희를 말리며 말을 이었다.
“바늘은 됐고, 나도 맹세할게. 나 세진은 애희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하지 않는다!”
바늘을 집어넣는 그녀의 표정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역시, 맹세가 약한 느낌이야... 오빠, 뭐라도 걸고 하자.”
"설마, 목숨 같은 걸 걸자는 건 아니지?"
그녀는 눈 앞의 맥주잔을 들이밀며 말했다.
"목숨은 봐줬다. 자, 맥주를 걸고 다시 말해 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니?'라는 표정으로, 세진은 다시 한번 맹세를 했다.
"나 세진은 애희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하지 않는다. 어길 시 앞으로 맥주를 안 마신다, 됐지!"
벌컥 벌컥
말을 마치자 마자, 세진은 500cc 맥주를 원샷으로 마셔버렸다.
"와~ 오빠 생각보다 터프하네. 그럼 이번엔 내 차례지?"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굳은 결심을 한 듯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집었다.
"나 애희도 세진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하지 않는다. 어길 시..."
"아...안 돼, 이딴 맹세에 손등을 찍을 필요까진 없잖아!"
"뭐래?"
왼손을 뻗어 접시를 앞으로 당기며, 그녀의 젓가락이 향한 곳은... '골뱅이 소면'이었다.
"어길 시, 앞으로 이 골뱅이를 안 먹는다!"
세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맥주를 걸었는데, 너는 골뱅이 소면...도 아니고 골뱅이야?"
"내가 골뱅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오빠가 더 잘 알잖아? 둘 다 쌤쌤이야."
뻔뻔하게 웃으며, 애희는 골뱅이를 질겅질겅 씹었다.
"뭐, 됐다. 그냥 서로 거짓말 안 하면 되는 거니까."
"맞아, 이래서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거야."
"앞으로 맥주랑 이별하지 않는 날이 오지 않길..."
"골뱅이도~"
하지만 그 날 이후.
그들의 대화는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해졌다.
어느 날.
"오빠... 나 배 아파. 생리가..."
"어, 우리 애희 똥 마려운 거 아냐? 거짓말하면 안되는 거 알지?"
"그...그래, 똥 마려워..."
"냄새 좀 빠지게, 일 보고 산책 좀 하다 와."
"우쒸..."
또 다른 어느 날.
"애희야, 나 과제 때문에 친구랑 약속이 있는데..."
"오빠 또 PC방 가서 게임하려는 거지? 거짓말이면 이제 맥주는 금지야!"
"거...거짓말 아니야. 과...과제 열심히 하고 롤 조금 하려고 했어..."
"과제 조금하고 롤 열심히겠지. 지금 나한테 거짓말?"
"알았어, 과제 많이 하고 롤 조금만 하고 올게."
둘 다 조금은 숨이 막혔지만, 그렇게 그들의 진실된(?)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됐었다.
* * *
그러나 운명은, 그들에게 커다란 시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약속이 있다는 말과 함께, 세진이 잘 연락이 되지 않던 어느 날.
- 이 오빠가... 또 PC방 간 거 아니야? 어?
평소 잘 가지 않던 시내 번화가를 걷던 애희는, 가슴 철렁할 광경을 목격했다.
세진이 다른 여자와 다정히 손잡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다.
그 여자는 애희와 달리, 키도 크고 서구적인 얼굴과 몸매를 가진 미인이었다.
- 아닐 거야...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본인의 눈을 의심하며, 애희는 몰래 따라가 보았지만 그 남자는 세진이 맞았다.
그 둘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크게 웃으며 카페로 들어가고 있었다.
- 거짓말이라도, 오빠의 변명을 들어볼래...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 지금 거신 전화는 전화기가 꺼져있거나 없는 번호... ]
세진에게 전화를 계속 걸어봤지만, 그의 전화기는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
애희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 어...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가...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막상 그들 앞에 나타나 화내며 따질 용기는 그녀에겐 없었다.
그랬다!
남들 앞에서 항상 강한 척 쿨한 척했었지만, 사실 애희는 그 누구보다 여리고 내성적인 여성이었다.
그런 본인의 성격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외향적인 것처럼 노력해왔는데...
지금 세진으로부터 받은 충격에 애희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으어~엉... 흑흑..."
그녀는 하염없이 울면서 눈물에 젖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이후.
애희의 부서진 심장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도 여리고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었으므로...
세진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냥 혼자만의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애희는 그를 피하며 그로부터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 애희야, 무슨 일이야? 연락도 안 되고, 다들 모른다고... 문자 확인하면 연락 줘. ]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학교를 찾아가도, 집을 찾아가도...
세진은 애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아무 설명을 듣지 못한 그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를 놓아주어야 했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
*
*
몇 년 후.
세진과 애희는 대학을 졸업한 후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서로의 존재에 대해 잊은 채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시절 친구와 만나기 위해 OO 대학교 시계탑에서 기다리던 그녀는, 근처를 지나가던 세진과 정말로 우연히 마주쳤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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