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온도
집을 나서고 나서야 밤공기가 생각보다 선선하다는 걸 느꼈다.
아까까지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었다.
가방 끈을 한 번 고쳐 메고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에 맞춰 생각도 같이 움직였다.
집 안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게 덜 괴로웠다.
큰길로 나가자 불빛이 많아졌다.
편의점, 술집,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들.
사람들은 각자 자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전부 남의 일처럼 보였다.
신호등 앞에 섰다.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괜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는 게 웃겼다.
길을 건너며 문득 생각했다.
유나는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을까.
이미 결혼 준비로 바쁠까, 아니면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을까.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으로 가면, 내가 감당해야 할 게 많아질 것 같았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한 카페 앞에서 멈췄다.
예전에 자주 오던 곳이었다.
유나와 처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자리도 이 근처였다.
문 앞까지 갔다가 멈췄다.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괜히 자리에 앉아 있으면, 기억부터 먼저 앉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방향을 틀었다.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아직 이르다고 느껴졌다.
가방 안쪽에서 봉투가 살짝 눌렸다.
움직일 때마다 존재를 알려오는 느낌이었다.
꺼내지 않아도,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걷다 보니 휴대폰이 다시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화면을 켰다.
연락처 앱을 열었다가, 곧바로 닫았다.
대신 검색창에 주소 하나를 입력했다.
청첩장에 적혀 있던 웨딩홀 이름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괜히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괜히 더 알아봤다가,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발이 가는 게 싫었다.
밤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나는 이미, 평소와 다른 하루를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걷고 나면,
무언가를 정해야 할 것 같았다.
걷던 속도를 조금 더 늦췄다.
발걸음이 느려지자 주변 소리가 또렷해졌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웃으며 통화하는 목소리, 신호등이 바뀌는 안내음.
이 동네는 예전 그대로였다.
가게 몇 곳이 바뀌었을 뿐, 길의 모양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불편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익숙한 골목이 나왔다.
예전에 자주 지나던 길이었다.
굳이 이쪽으로 올 생각은 없었는데, 발이 먼저 움직였다.
골목 안은 조용했다.
술집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도, 차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곳은 늘 이렇게 가라앉았다.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괜히 괄호처럼 접힌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여기서 무슨 말을 했고, 어디에 서 있었는지까지.
나는 고개를 한 번 돌렸다.
생각보다 쉽게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스스로를 말리는 소리가 늦게 따라왔다.
휴대폰이 다시 손에 쥐어졌다.
이번에는 화면을 켜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연락처를 열고, 검색창을 비워둔 채 잠시 멈췄다.
이름을 치지 않았다.
번호를 누르지도 않았다.
대신 화면을 내려, 차단 목록까지 천천히 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지워둔 흔적만 남아 있는 화면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끝난 관계라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면을 끄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다음 행동을 화면이 정해주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결국 휴대폰을 잠갔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고 손을 뺐다.
가방 안쪽이 다시 신경 쓰였다.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봉투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안에 적힌 날짜 때문이었다.
다음 달 토요일.
아직 시간이 있다고 말하기엔 애매했고,
벌써 다가왔다고 하기엔 조금 남아 있었다.
그 애매함이 마음에 걸렸다.
결정을 미루기 딱 좋은 거리였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나는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막다른 곳에서 잠시 멈췄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오히려 숨이 쉬어졌다.
뒤돌아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까 지나온 길을 그대로 되짚었다.
같은 길인데도, 느낌은 조금 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이었다.
처음 나올 때는 생각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자연스러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다시 봤다.
아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밤은 여기까지라는 신호 같았다.
집에 들어오자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주머니와 가방이 동시에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종이 위에 적힌 이름과 날짜를 다시 보았다.
아까와 달라진 건 없었다.
달라진 건,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계속 미뤄둘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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