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요새의 불청객과 낙제 성녀
학원요새 칼텍
마왕에 의해 멸망직전까지 몰렸던 세계는 성녀와 용사의 희생으로 어떻게 든 상황을 타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그대로 겨우 넘겼기 때문에 대륙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산과 들이 불탔고 지성체도 전쟁 전후로 1/1000으로 줄어 있었다.
전후 대륙의 모든 지성체들은 뒤처리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그 중 하나의 이슈가 칼텍이었다.
세계에게 남은 최후의 성. 많은 논의 끝에 대륙은 그 성을 어떤 세력에게도 주지 않고 재건의 바탕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성은 교육기관이 되었다.
1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성은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하였고, 작금에는 각국에 고위 교육기관들이 생겼음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실력위주로 뽑는 원칙이 반영된 것도 있겠지만, 이러한 서사도 한몫 했을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역사는 기록으로만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원형의 대마법방어 성벽. 안으로 들어갈수록 건물이 오래되고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건축물이자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최후의 희망]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층층이 내려오는 장관이 역사와 서사를 증명하고 있었다.
가장 외곽의 성문 앞으로 붉은 머리의 사내가 지나쳐 간다. 그저 지나갈 뿐인데 도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사내의 이름은
레인 디퍼러.
그의 등장에 학원 요새가 출렁인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워낙 유명인이었고
오랜만의 등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레인이 보인 것은 1년도 더 전, 졸업을 한학기 남긴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죽은 거 아니었 어?"
"행방불명이라고 했는데 살아있었 다니."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워낙 적을 많이 만드는 사람인 데다가, 연락조차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레인은 칼텍에 오자마자 복학 처리를 위해 교무처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레인은 주변 사람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누군가는 오자마자 시비를 걸고 다닌다며 볼멘소리를 냈지만 레인의 악명을 알기에 큰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참고로 레인의 악명 중 가장 높은 것은
'불만 있으면 팬다'였다.
볼멘소리를 낸 a남과 눈이 마주친다. 레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다.
이번엔 그 옆에 있던 통통한 b녀 역시나 혀를 찬다.
"지금 시비 거는 건가요!?"
결국 두 남녀가 소리친다.
"아니? 그저 그대들의 덧없는 사랑을 슬퍼할 뿐인데."
"사..랑?"
갑작스러운 레인의 말이 두 남녀가 급 당황하며 자리를 피한다.
케이스는 그렇게만 끝나지 않았다. 교무처에서도 수속을 하며 교직원 a와 b를 보고도 혀를 찬다.
교직원들은 한두 번 겪는 게 아닌지 참고 넘긴다.
사실 레인은 시비를 걸려고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다난의 시선에서 보인 사람을 레인의 기억속에서 찾고 있었다. 기억을 뒤져야 하기에 보는 순간 딱딱 떨어져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고속 사고를 통해 대충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앞선 a, b녀를 포함 교직원 모두 [학원요새 섬멸]로 인해 다 사망한 자들이었다. a, b남녀는 겹쳐 죽어 있었는데 서로를 보호한 흔적이 있었다. 우정? 애정? 사실은 알 수 없다. 이건 짚어 넘긴 것.
참고로 [학원요새 섬멸]은 말그대로 학원 요새 전체가 멸망해 버린 사건, 레인의 기록에 따르면 마왕의 4개의 재앙에 의한 것이라 되어 있었다.
또한, 기억 속에서의 학원 요새 섬멸은 시기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레인의 졸업 직후 라는 것. 트리거는 알 수 없지만 항상 그랬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교무처에서 시간을 떼 울 수는 없는 관계로 공원 한구석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레인 도대체 어떻게 나보고 하라는 거냐!'
그랬다. 붉은 머리의 사내는 레인이 아니었다. 다난이었다. 차원마검과의 혈투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다난이었다.
'부탁한다.'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 애초에 레인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건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억을 정리한다면
레인은 자신이 마주하지 못한 용사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게 자신(다난)의 손에 죽었던 누 군가에 의해 죽었을 거라 했다.
교단의 예언에서 다난은 반드시 용사와 함께 최후의 전장에서 함께 할 거라 했다.
머리속으로 교단에서 받은 인명부를 하나하나 짚어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천천히 저어 노을이 질 정도였다.
레인의 등장에 학원 요새의 많은 학생들과 세력들이 몰려와 있었지만 레인이 수시간을 멍을 치는 사이 다들 관심이 떨어져 나가며 자리를 이탈하고 있었다.
가장 큰 궁금증은 레인이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였다.
죽었다 살아온 언데드라는 소문
대륙 권력은 잡기 어려우니 복학생으로 요새의 학생 권력을 영원히 잡겠다는 소문
숨겨진 애인이나 조력자를 통해 전복을 꿈꾼다는 소문
등등의 이야기. 물론 이는 다난의 탓이라고 보다 레인의 탓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학생기자가 앞에서 손을 흔들더니 그대로 자리를 이탈하며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각사각
흡사 바퀴벌레 소리 같은 것이 났다. 주변을 찾아보니 수풀 사이로 엉덩이가 하나 뾰쪽 나와 있었다. 나오려다 가 뭔가 낌새를 느끼고 숨으려 한 것으로 보였다.
"거기 나올 거면 나오고.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빠져."
하지만 엉덩이는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시야에만 보이지 않으면 다른 이도 같다고 생각하는 이치였다.
짝!
레인이 평평한 엉덩이를 그대로 손바닥으로 갈긴다.
"히익!"
"여자!?"
레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수풀에서 흰색의 정복을 입은 푸른 머리의 여자가 기어 나온다.
레인의 기억에도 없는 여자였다. 다난 본연의 기억을 뒤지기 시작한다.
"저예요! 저 인피니티아! 기억 안 나세요?"
"누구?"
"이프요!"
기억해낸다.
검은 교단에서 지급한 명부에 있는
(낙제)성녀 후보생 인피니티아(통칭 이프) 였다.
현존하는 대륙의 성녀 후보생 중 가장 말단을 차지하고 있었고, 성녀의 이능 중 단 하나도 개화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안경에 아프로 같은 이상한 머리스타일까지. 다난이 전문가적 시선을 뒤로하고 그냥 보았을 때도 방금 전 본 평범남녀 이상의 사람은 아니었다.
심지어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력이 뛰어나지도, 특별한 재능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성녀 후보에 올랐다는 건 무언 가가 있는 것인데.
"저기."
아무리 고속 연산을 해도 시간을 너무 끄는 것은 위험했다.
이번엔 레인의 기억속에서 인피니티아와의 인연을 찾아본다. 금세 찾아내고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인연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학생 회장 선거운동을 하며 으레 하듯이 하는 인사
[당선된다면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 정도였다.
결론이 난다.
아무래도 이 소녀는 그저 사회성이 부족한 이인 것 같았다. 운 좋게 성녀 후보생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아. 무슨 일이지?"
"저를 도와주신다고 했잖아요. 바로 지금입니다."
인피니티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도 그때 귀중한 한 표를 드렸잖아요."
아무래도 사회성 부족의 전형적인 모습.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아무래도 현실적인 충고를 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이런 부탁은 내가 학생회장일때 이야기를 했어 야지. 이제 나는 힘없고 백 없는 한학기 남은 복학생일 뿐이거든."
추욱-
거리가 있음에도 기분이 전해져 온다.
"알아요. 하지만 그때 레인님이 보여준 모습. 저는 당신을 믿어요. 누구나 보는 관점 따라 갈린다고 필요할 때는 언젠가 빛을 발할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흑ㅠ"
인피니티아의 어깨가 처지며 뒤로 돌아선다. 동정심 유발 전략일지는 모르겠지만 다난의 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인피니티아의 마지막 말에 잠시 생각을 멈춘다.
"잠깐!"
"마음이 바뀌셨나요?"
이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전의 흐느낌은 거짓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건 아닌데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지?"
"네? 아니라고요?"
"빨리!"
레인의 재촉에 놀란 인피니티아가 입을 연다.
"저 도와준다고 한 거요?"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쳇."
이프가 결국 체념하듯 입을 연다.
"관점이요?"
"관점이라."
레인과 헤어진 이후로, 아니 용사후보생을 찾으라는 예언을 받들었을 때부터 계속 다난은 고민하고 있었다.
레인의 기억 속의 자신은
용사 후보를 살해한 다난.
검은 교단의 예언이 말한 자신은
용사의 조력자로
용사와 함께 최후의 전장에서 싸워 나가는 다난.
두 문장은 모순 그 자체였다.
조력자면서 살해자.
이러한 고민 속에서 이프가 말한 '관점'의 차이라는 말에서 하나를 깨닫는다. 모순이 아니라면 두 말이 다 사실이라면
다난의 손에 죽은 이들은 용사가 모두 아니었고
다난의 손이 아닌 다른 데에서 다른 방법으로 죽은 사람이 용사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더 안경 뺑뺑이의 '쳇'을 외치고 있는 인피니티아도 용사일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녀가 죽은지는 모르나 다난이 죽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도와 주시는 걸까요?"
무언가 분위기 바뀜을 놓치지 않고 이프가 입을 연다.
"이 또한 운명인가? 좋아, 뭘 도와주면 되지?"
"저의 졸업을 도와주세요."
"뭐?"
인피니티아 디 에슬란드
16세
이름이 너무 길어서 다들 이프 라고 부른다.
과거 성녀에 의해 성녀 후보로 지목되었으나, 성녀의 4개의 이능 중 아무것도 개화하지 못했다. 덕분에 후보생의 위명으로 들어온 학원 요새에서 퇴학 직전. 퇴학당할 시 수도원으로 가서 평생 봉사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으로 현재 동분서주중.
개별적으로는 암기력이나 응용력 등은 뛰어나나 신성력 자체가 너무 부족해서 기술 자체를 제대로 펼칠 수 없음.
지옥 같은 패션센스와 사회성은 작금의 상황이 고착화되며 더욱 가속화되었음. 현재까지는 성녀 후보라 전용 가드가 붙어 있는 상황이나 실력도 후보생 중 최악이며 떠날 채비를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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