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찔렀다. 인근 세가들에게 호화롭기로 소문났던 강씨세가(姜氏世家)의 대연회장이었건만, 지금은 잿더미와 시체만이 뒤엉킨 채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변해있었다.
“크윽!”
강진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검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 검자루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전신의 혈도가 비명을 지르고, 왼쪽 허벅지에 박힌 화살은 한 걸음 뗄 때마다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 앞, 무너진 누각의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고립되어 있었으니.
“비켜라!”
강진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땅을 박찼다. 단전에 남은 내공을 밑바닥까지 긁어모았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가전무공 청풍검(靑風劍) 제3식, 나뭇잎을 가르는 쾌검.
강진이 자랑하는 필살의 일격이 전방을 가로막은 복면인을 향해 쇄도했다.
일류 고수라 자부하던 강진의 검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쾌검.
하지만.
까앙-!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강진의 검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상대는 마치 그럴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검조차 뽑아들지 않았다.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 자는 그런 여유를 부릴만한 자격이 있는 자였다. 강진의 검은 상대가 두르고 있는 얇은 기막 조차도 뚫을 수 없었으니.
“고작 일류 수준의 내공인가. 가볍군.”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단순한 손짓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힘은 그렇지 않았다.
콰아앙!
“커헉!”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망치에 얻어맞은 듯, 강진의 몸이 십장(十丈) 밖으로 처박혔다.
등 뒤에 있던 돌기둥이 산산조각 났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뇌를 강타했다. 입에서는 검붉은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이런 육체의 고통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였으니.
“으으윽...”
아버지, 강씨세가의 가주이자 지역에서는 손에 꼽히는 고수였던 강호연의 신형이 허공으로 들려 올랐다.
놈들의 우두머리가 쥔 붉게 빛나는 구슬. 그 기이한 보주가 뿜어내는 끔찍한 흡입력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전신 혈공(穴孔)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피였다.
내공과 함께 뽑혀져 나오는 피. 한 인간이 평생을 갈고닦은 정기(精氣)이자 생명의 근원.
“이, 개새끼들이...!”
강진이 바닥을 기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육신은 모든 피를 잃고 미라처럼 변했다.
지금까지 봐온 무공들과는 결이 다른 무언가.
그래, 인간을 재료로 삼는 사악한 요술(妖術).
‘저것들은... 무림인이 아니다.’
강진은 깨달았다. 강호의 도리도, 무인의 긍지도 통하지 않는 괴물들.
소문 속에서나 듣던, 인간을 벌레 취급하며 영혼을 탐한다는 마인(魔人)들이 분명했다.
푸욱.
마른 짚단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말라버린 아버지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아... 아아...”
분노가 공포를 집어삼켰다. 슬픔같은 감정은 사치였다.
어머니도, 동생도, 평생을 함께한 가문의 충직한 무사들도 모두 저렇게 당했다.
피 한방울 남기지 못하고, 저 붉은 구슬의 먹이가 되었다.
“수확이 나쁘지 않군.”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붉게 빛나는 구슬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듯 한 목소리.
오히려 농부가 잘 익은 곡식을 추수한 후의 뿌듯함과 같은 감정조차 느껴졌다.
“강씨세가의 혈통에 섞인 영기가 제법 쓸만해. 이 정도면 단주님께서도 기뻐하시겠어.”
“그렇습니다. 변방의 섬구석에 박혀 사는 벌레들 치고는 영혼의 질이 훌륭합니다.”
옆에 있던 부하가 아부하듯 맞장구쳤다.
벌레.
그 한마디가 강진의 뇌리에 박힌다.
“우리는... 벌레가 아니다...”
강진은 부러진 검을 지팡이 삼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시야는 피로 얼룩져 붉게 보였다.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건 이미 알았다. 도망칠 곳은 없다.
그렇다면.
‘정체라도... 놈들의 껍데기라도 벗겨주마.’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놈들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했다. 그래야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 테니까.
“죽어라!!”
강진은 마지막 생명력을 태워 놈에게 달려들었다. 더이상의 삶을 포기한 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한 수.
심장이 뚫리든 목이 베이든 상관없었다. 오직 한 걸음, 놈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슉.
우두머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검기(劍氣)가 강진의 가슴을 관통했다.
푸욱!
등 뒤로 붉은 피분수가 솟구쳤다. 심장이 터졌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에서 빠져나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법 한 거대한 고통이 몰아쳤다.
하지만 강진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 앞으로 파고들며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호오?”
우두머리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서렸다. 강진은 피를 토하며 놈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놈의 얼굴을 가린 검은 복면을 잡아당겼다.
찌이익-!
질긴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 그리고 오른쪽 뺨에서 목덜미까지 이어지는 기괴한 문신.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 한 형상.
“......!”
강진의 눈에 그 문신이 화인(火印)처럼 박혔다.
“쳇.”
우두머리가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드러난 것에 대해 당황하기는커녕,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 강진의 손을 쳐냈다.
“흑사련(黑蛇聯)의 비밀을 본 대가는 비싸다, 애송이.”
흑사련.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강호의 어느 문파 목록에도 없는 이름. 내 부모와 형제, 가문을 멸망시킨 원수의 이름.
서걱.
차가운 금속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강진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지는 자신의 몸뚱이가 보였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몸뚱이가.
의식이 빠르게 흐려지고, 어둠이 밀려왔다.
원통했다.
분했다.
이대로 끝이라고?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저 놈들의 배를 불려줄 먹이로 끝나야 한다고?
‘누구 마음대로...’
강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의지만은 명확했다.
죽여버리겠다.
반드시 죽여버릴것이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지옥 저 밑바닥에 닿을지라도
네놈들의 목을 물어뜯어 주마.
흑사련... 흑사련...!
하지만 그런 원통함이 무색하게도
시야는 차츰 어두워지고, 그렇게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생각했던 그 심연 속에서.
[띠링-]
경쾌하면서도 이질적인 소리가 뇌리를 때렸다.
***
[조건 충족: 필멸자의 한(恨)]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윤회천서(輪廻天書)’가 당신의 영혼에 귀속됩니다.]
눈앞에 황금빛 글자들이 떠올랐다. 죽음 이후의 세계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이고 차가운 빛.
[제1회차 생(生)을 정산합니다.]
화면이 바뀌며 강진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강씨세가의 소가주로 태어나, 검을 잡고, 무공을 익히고, 촉망받던 후기지수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밤, 세가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이름: 강진
신분: 강씨세가 소가주
경지: 일류
업적:
가문을 지키지 못한 자 (F)
사망 원인: 흑사련주에게 참수
[총 획득 인과율: 100 P]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 눈앞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던 한가지는, 포인트의 의미.
100포인트. 그것이 강진의 첫 번째 삶에 매겨진 값어치였다. 허무했다. 평생을 수련하고 발버둥 친 결과가 고작 숫자 100이라니.
하지만 강진이 좌절할 틈도 없이, 강진의 눈앞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점 오픈]
마치 객잔의 차림표처럼, 나열되어있는 수많은 항목들.
<배경>
[명문가 장남 환생]: 10,000 P (구매 불가)
[황실의 핏줄]: 50,000 P (구매 불가)
[몰락 귀족의 자제]: 1,000 P (구매 불가) ...
<재능>
[천고의 기재]: 50,000 P (구매 불가)
[천뢰의 신체]: 100,000 P (구매 불가)
[검술 천재]: 5,000 P (구매 불가) ...
이름만 봐도 화려한 목록들이었지만, 대부분은 모두 잿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강진이 가진 포인트는 고작 100포인트였으니.
그 끝이 없는듯한 수많은 목록 속에서는, 오직 한 가지 항목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수>
[기억 계승]: 100 P (필수 권장) :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한 채 환생합니다. 구매하지 않을 시, 모든 기억이 소거되며 새로운 인격으로 시작합니다.
‘환생? 내가 생각하는 그 환생이 맞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단어가 눈앞에 펼쳐지자, 다 타들어가 재가 되어가던 분노가 가슴속에서 다시 거세게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분노를 가진 채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면... 나에게 다시 한번 복수의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억을 잃는다면 복수도 없다.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산다 한들, 부모님의 원수를 잊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강진은 이를 악물었다.
‘구매한다.’
생각을 떠올리자 마자,
[100 P를 소모하여 '기억 계승'을 구매하셨습니다.]
[잔여 포인트: 0 P]
[남은 포인트가 없으므로, '배경' 및 '재능'은 무작위로 배정됩니다.]
시스템의 경고 메시지가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경고: 포인트가 극도로 부족합니다.]
[경고: 낮은 확률로 '최하급 인생'이 배정될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
강진은 생각했다. 개로 태어나든 벌레로 태어나든 상관없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이 분노를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언젠가 다시 그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을 테니까.
[설정 완료.]
[다음 생을 시작합니다.]
우웅-!
황금빛 빛무리가 강진의 의식을 감쌌다.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기증.
그 속에서, 강진은 자신의 의식이 어딘가로 옮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으윽...”
정신을 차리자 마자 느껴지는 것은 지독한 악취였다.
썩은 음식물 냄새, 오물 냄새, 그리고 씻지 않은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공기.
강진은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팔이 쉬이 올라가지 않았다. 아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이건...’
눈앞에 앙상한 팔뚝이 보였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팔.
손등에는 떼가 덕지덕지 껴있고, 손톱은 깨지고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열서너 살은 먹었을까 싶은 아이의 팔.
“일어났냐, 똥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진은 고개를 돌렸다. 허름한 폐가(廢家). 지붕은 반쯤 무너져 하늘이 보이고, 바닥에는 짚단과 멍석이 아무렇게나 깔려 있었다.
그곳에 넝마를 걸친 사내 넷이 모여 앉아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거지들.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뒷골목의 하급 거지들이었다.
강진은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전생의 기억이 물밀 듯이 쏟아져 오며 현생의 기억과 충돌했다.
어렵사리 차린 정신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여기는... 개방의 분타인가? 아니, 그조차도 되지 못하는 왈패들의 소굴 같군.’
주위를 둘러보자, 구석에 고여 있는 빗물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강진은 비틀거리며 웅덩이로 기어갔다.
수면에 비친건 부스스한 머리카락, 움푹 패인 볼. 영양실조에 걸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의 소년.
그 소년이 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작가의말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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